111화 - 폭풍전야 (1)
“소문이라…… 있긴 하죠.”
그 말에 에스티아가 재빨리 침대 가까이 나무 의자를 끌고 왔다. 에스티아가 침대 맡에 앉자 엘라도 의자에 앉았다.
“별 소문은 아닙니다만 기정사실화된 소문은 하나 있습니다.”
엘라가 컵 안에 든 차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 마을에는 불문율이 하나 있죠. ‘오스카 후작저의 컬스 영지에는 가지 말자’.”
엘라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에스티아도 덩달아 긴장하기 시작했다.
“왜 그런가요?”
“유령 마을이라는 소문이 있거든요. 사람 하나 살지 않는다고.”
유령 마을. 사실 그렇게 놀랄 만한 소문은 아니었다. 집사 안셀 말고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 저택을 보고 안 그래도 이상하다 생각했던 참이었다.
“밖에 나가서 얘기해 봤자 가십거리로 여길 뿐이지만 저희는 믿고 있습니다. 인기척이라고는 조금도 없었거든요.”
그동안 몇 번 마차를 타고 오스카 저택으로 간 적은 있었지만 영지에는 들른 적이 없었다. 사람 한 명 살지 않는 마을이라니. 듣기만 해도 기묘했다.
“싸하지 않습니까. 다들 불길하다면서 발도 안 들여놓았죠. 아씨께서도 혹시나 그 영지로는 눕지도 마세요. 영 꺼림칙한 곳입니다.”
엘라는 인상을 확 찌푸리며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소문으로는 사람들이 인신매매로 다 팔려 가서 그렇다는데, 진짜는 아니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요.”
“네…….”
‘인신매매’라는 말 덕분에 에스티아 머릿속에 로셸이 스쳐 지나갔다. 속이 서늘해진 에스티아가 따뜻한 차를 들이켰다. 따스한 기운이 퍼져 나가면서 기분이 조금 풀어졌다.
“아가씨.”
그때 상황을 보고 온 이안이 방으로 들어왔다. 눈치가 빠른 엘라가 바로 자리를 비켜 주었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는 묵고 가야 할 거 같습니다. 워낙 비가 많이 와서 계속 이동하기엔 위험할 거 같습니다.”
“아…… 그래?”
혹시나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이렇게 되자 에스티아는 머릿속이 살짝 복잡해졌다. 하나는 오스카 후작을 오늘 만나러 간다고 미리 얘기를 해놓은 탓이었고, 다른 하나는 또 전전긍긍하며 기다리고 있을 어떤 바보 같은 남자 때문이었다.
“하…….”
“전하가 걱정되셔서 그러신 겁니까?”
에스티아가 한숨을 내쉬자 바로 이안이 그렇게 물어왔다. 에스티아가 펄쩍 뛰었다.
“아니거든!”
“아닌데 왜 한숨을 쉬십니까.”
이안이 뻔히 보인다는 표정으로 에스티아를 바라보았다.
“그야…… 후작님과 오늘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내일로 어떻게 미루어야 할지 해서.”
“그건 진작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내 놓았지요. 그렇게 멀지 않으니 무사히 도착할 겁니다.”
‘와.’
에스티아가 이안의 일 처리 속도에 혀를 내둘렀다. 그 짧은 시간에 그걸 언제 다 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 그럼 걱정해야 할 건 이제 하나로 준 건가요?”
이안이 에스티아를 놀리듯 말했다. 그 모습에 잠시 울컥하던 에스티아가 이안에게 물었다.
“이안, 2년 전에 대공 전하와 나 사이에 안 좋은 일 있었다는 건 알잖아.”
“그럼요.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계기로 두 분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건 모를 수가 없죠.”
이안이 의자에 앉은 채로 무릎 위로 두 손을 맞잡았다.
“그 이후 그분과 내가 어떻게 지내왔는지는 너무 잘 알 거야. 그러니…… 만약에 내가 앞으로 그 사람을 옆에 두고 싶다고 그런다면 내가 너무 바보 같겠지?”
에스티아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살얼음판 속 햇빛 같다지만 그 남자가 처음부터 따스한 빛은 아니었다. 오히려 차디찬 바람이었을진 몰라도.
“글쎄요. 저는 아가씨만 행복하면 그만인지라.”
이안이 일상 얘기를 하듯 편안하게 말을 내뱉었다.
“물론 제가 그분을 좋아한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여러 번 아가씨를 구해 주셨으니까요. 그러니 누가 어떻게 볼까 신경 쓰지 마시고 아가씨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마음을 따뜻하게 안아 주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에스티아는 선뜻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 남자가 자신의 옆에 있는 걸 떠올릴 때마다 무언가가 마음에 턱턱 걸렸기 때문이었다.
에스티아는 그 ‘무언가’가 자신이 잊고 있는 기억이라는 걸 눈치챘다. 에스티아가 여전히 아무런 말을 뱉지 못하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결국, 그 남자한테는 기억하기 싫다고 했지만 기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평생까지는 아니어도 꽤 오랜 시간을 이런 찝찝한 마음으로 살아갈 순 없었다.
“내일 폭우가 좀 잠잠해지는 대로 출발하자.”
“아가씨?”
에스티아를 둘러싼 분위기가 달라지자 이안이 의아해하며 그녀를 불렀다.
“꼭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 그러려면 저 꽃을 빨리 그 후작님께 갖다 드려야 할 거 같아.”
에스티아가 시선을 돌려 협탁 위에 있는 꽃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작은 나무 상자 안에 들어 있는 핑크스가 있었다.
에스티아는 어쩌면 오스카 후작을 떠보는 것보다 핑크스의 ‘이야기’를 다시 듣는 게 더 쉬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더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묻는다면 마법 주문처럼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 * *
그는 모든 게 이전과는 다르게 들렸고 다르게 보였다. 평소처럼 들려오던 빗소리도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자장가 같고, 땅에 톡톡 떨어지는 빗방울은 그 하나하나가 다 이슬처럼 보였다.
갓 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그의 심장은 계속해서 세차게 뛰고 있었다. 훈련할 때는 눈앞에 있는 훈련 지휘에 집중했지만 혼자 서류를 볼 때나 부단장과 식사를 할 때는 자연스럽게 에스티아를 생각하곤 했다.
“단장님 지금 근무 시간입니다.”
그걸 눈치챈 아이비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근무 시간이 아니라 점심 시간이에요.”
괜히 뜨끔한 에버하르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이비가 비웃듯이 피식 웃었다.
“일하는 내내 계속 생각하고 계시는 거 제가 모를 줄 알고요?”
“지휘할 때는 생각 안…….”
발끈해서 말하던 에버하르트가 말려든 걸 알고 입을 다물었다. 에스티아가 조금씩 다정하게 그를 대해 준 이래로 그는 감정을 제어하기가 어려웠다.
“그 외에는 내내 생각하고 계시나 봐요. 아, 사랑이 이런 걸까?”
“에스티아 만나고 난 이후로 말이 많아졌네요, 부단장.”
“어휴, 이제 아예 이름 부르기로 합의 보셨나 봐요?”
“…….”
아이비가 정곡을 찌르자 에버하르트가 다시 할 말을 잃었다. 승권을 잡은 아이비가 신나서 말을 이었다.
“전 반대입니다. 에스티아같이 멋진 분은 단장님보다 더 어른스럽고 성숙한 사람을 만나셔야 해요.”
“뭐?”
포크를 쥔 에버하르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다 곧 에스티아도 저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솟아났다.
“나도 충분히 어른스럽…….”
울컥해서 저도 모르게 말을 꺼냈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구차해서 에버하르트가 말을 멈췄다.
“어른스럽긴요. 옆에서 보면 완전 개처럼 졸졸 쫓아다니시더구먼.”
“…….”
에버하르트는 그제야 아이비의 성격을 새삼 다시 떠올렸다. 그녀가 말할 때는 결코 돌려 말하는 법이 없다는 것을.
“……앞으로는 더 든든한 사람이 되어 줄 거예요.”
결국 에버하르트가 백기를 들었다. 아이비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에버하르트를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저한테는 두 분 다 소중하니까. 두 분이 행복하면 그걸로 그만이죠. 그런 의미로 단장님, 괜찮으신 거예요?”
“……뭐가요?”
다정한 말에 마음이 차분해진 에버하르트가 그녀에게 물었다.
“설레 보이면서도 뭔가 걱정하고 계시는 거 같아서요.”
역시 아이비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하기야 그녀하고 알고 지낸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게다가 전쟁에 함께 참전한 전우이기까지 했다. 어차피 식당에 둘밖에 없겠다, 에버하르트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에스티아가…… 지금 조금 위험한 곳으로 갔어요. 혹여나 안 좋은 일이 있지 않을까 걱정돼요.”
“에스티아가 어련히 알아서 하려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비는 더 캐묻지 않고 담담한 목소리로 그를 위로했다.
“돌아오시면 어떻게 잘해 드릴까만 생각하세요. 워낙 매력적인 분이라 잔뜩 긴장하셔야 할 텐데.”
에버하르트가 저절로 끄응 하고 신음을 흘렸다. 활발한 성격과 귀여운 외모 덕에 남녀 가리지 않고 인기가 많았던 건 그가 제일 잘 알았다. 그리고 그 애정과 관심을 사라지게 만든 것도, 에스티아가 밝음과 총명함을 잃어버린 것도 전부 그 때문이었다.
에버하르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생각하니 도저히 계속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러세요.”
새삼스럽지 않다는 듯 아이비가 가볍게 인사했다. 에버하르트가 빠른 걸음으로 식당을 벗어나 자신의 사무실로 걸어갔다.
책상 앞에 앉아 낡은 수첩을 펼쳐 놓고 생각에 잠겼다.
-다시 말하지만 용서했다는 건 아니에요. 다만, 내가 무사히 갔다가 당신 옆으로 돌아오겠다는 소리예요.
에버하르트가 맑은 음성을 떠올렸다. 에스티아가 돌아오면 완전히 그녀의 마음을 포섭할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뭐가 있을까. 단순한 것부터 생각하면 하얀 생크림 위에 딸기가 올라간 케이크를 좋아했고, 밝은색보다는 진한 색을 좋아하고, 쓴 레드 와인보다는 톡 쏘는 화이트 와인을 좋아했다.
로셸이 눈에 불을 켜고 에스티아를 찾아다니고 있지만, 잘 변장시켜서 아담한 디저트 가게로 데려갈 수 있을 것이다. 산책을 좋아하기도 하니 비가 적게 오는 날, 궁 안에 있는 예쁜 산책길로 그녀를 안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에버하르트는 설레면서도 조마조마했다. 어찌 되었든 지금 그녀는 오스카 후작저로 가고 있었다. 설상가상 비까지 많이 와서 아마 오늘은 못 가고 내일 갈 수도 있었다. 그러면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더 길어진다.
그녀가 기억이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어쭙잖은 신사 연기를 하고 있을 터였다. 손끝 하나 대지 못할 걸 알지만 불안했다. 마법사이니 충분히 그녀를 곤경에 처하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믿어야지. 그 방법밖에 없어.’
에버하르트는 애써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가 펜촉에 잉크를 묻혀 하얀 종이에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와 함께할 새로운 앞날을.
빨리,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