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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112화 (113/141)

112화 - 폭풍전야 (2)

아침 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에스티아는 멍한 정신으로 눈을 깜빡였다. 사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한숨도 못 잔 참이었다. 그러다 보니 새 소리마저 불길하게 들려왔다.

에스티아가 부스스한 머리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잠을 못 자서 몸이 무거웠다. 가위가 눌린 것처럼 끝도 없이 땅속으로 꺼지는 느낌이었다.

“후.”

에스티아가 숨을 내뱉었다. 벌써부터 그 후작을 만날 생각하니 긴장이 되었다. 그래도 에스티아는 노부인 엘라가 차려 준 아침을 열심히 먹었다. 적을 만나러 가는데 빈속으로 갈 순 없었다.

묽은 수프와 딱딱한 빵이었지만 속을 채우기에는 충분했다. 에스티아는 이안과 함께 엘라에게 인사를 하고는 마차로 향했다.

다행히 비는 조금씩 오고 있었다. 얼른 그에게 가라며 재촉하는 것처럼.

“저는 오늘도 밖에 있어야 합니까?”

마차가 출발하자 이안이 바로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에스티아가 후작과 단둘이서만 응접실에 있는 게 불안한 모양이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돼.”

에스티아가 미소 지으며 이안을 살살 달랬다.

“도대체 뭘 그리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시기에…….”

이안이 못마땅한 듯 연신 투덜거렸다.

“지난번에 그분이 저택으로 아가씨를 찾아왔을 때 쓰러지셨던 거 기억 안 나십니까? 솔직히 바일 전하를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전하가 그분을 그렇게 경계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평소에 그 남자라면 질색하는 이안이 저렇게 얘기할 정도면 오스카 후작이 얼마나 수상해 보이는지는 알 만하다.

“걱정하지 마. 혹여나 내가 너무 오랜 시간 나오지 않으면 쳐들어와도 좋아.”

“정말이죠? 약속하신 겁니다.”

이안이 허리를 숙이며 에스티아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 에스티아는 웃으면서도 미간을 찌푸렸다.

“알겠다고! 어째 내 주변 남자들은 나한테 이렇게 집착하는지 몰라.”

“예? 집착이라뇨. 아니, 애초에 전하와 같은 취급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안이 펄쩍 뛰었다. 그 모습이 웃겨 에스티아는 요 며칠 처음으로 밝게 웃었다.

내심 웃고 싶었던 거 같다. 오스카 후작저가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불안해졌으니까.

-빨리 돌아와야 해요, 에스티아.

그때 에버하르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지금 왜 그 남자의 목소리가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마음이 힘들어질수록 절대적인 사랑이 그리워지는 거 같았다. 분하게도 그 사랑 곁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어졌다.

“이안.”

“네, 아가씨.”

오스카 후작저가 이제 바로 창밖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빨리 하고 돌아오자. 최대한, 빨리.”

알아낼 것만 제대로 알아 오고 돌아오자. 그 말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안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가, 오스카 후작 저택 앞에 도착하자 정문이 천천히 열렸다. 화려한 장미꽃밭을 활짝 펼쳐 보이면서.

* * *

집사 안셀은 지난번과 한 톨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에스티아와 이안을 반겼다. 그는 마차 문을 열고 정중하게 에스티아를 에스코트했다. 그 모습을 이안이 초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안셀은 군더더기 없는 몸짓으로 둘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 뒤로 이안이 작게 속삭였다.

“이렇게 분위기가 미묘하니 메리가 놀랄 만도 하겠네요. 다시 와도 왠지 스산한 곳입니다.”

“응, 오래 시간 끌지 않을게.”

에스티아가 그렇게 답하자마자 안셀이 걸음을 멈추었다. 에스티아가 흠칫했지만 다행히 안셀은 그녀를 보지 않은 채 눈앞의 문에 노크했다.

“가주님, 글레멘드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이번에도 이안은 쏙 빠진 채였다. 이안이 불만스럽다는 듯이 안셀을 노려봤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후작의 답을 기다렸다.

“들어오라고 하게.”

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안셀이 응접실 문을 열었다. 문은 초조한 이안의 눈빛을 뒤로한 채 소리 없이 닫혔다.

“어서 오세요, 영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렸다는 말이 이렇게 소름이 끼칠 수 있는 거였구나. 에스티아는 손을 들어 두 팔을 쓱쓱 문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죄송해요, 어제 비가 많이 와서 늦었습니다.”

하지만 에스티아는 티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인사했다. 오스카가 미소를 지으며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전혀 죄송하실 필요 없습니다. 영애만 무사하셨으면 됐죠.”

에스티아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가 말할 때마다 마음속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에스티아가 글레멘드 저택에서 그 일을 겪은 이후, 그가 상단에 찾아왔었다는 말이 떠올라서 그런 거 같았다.

“다행히 금방 꽃을 찾았습니다. 찾아 달라 요청하신 ‘퀸 오브 핑크스’를요.”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오스카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에스티아가 내민 상자를 받아 들었다. 상자를 내민 에스티아는 바로 손을 내려 티 나지 않게 치마에 문질렀다. 언뜻 손끝이 닿았던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퀸 오브 핑크스 맞네요.”

오스카가 상자를 열어 보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뿌리까지 그대로 가져온 꽃에서는 영롱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후작님.”

에스티아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예, 영애.”

에스티아의 눈에 비치는 오스카 후작은 지나치게 평화로워 보였다. 분명 상단까지 찾아왔었다는 걸 보면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을 텐데도. 지금만 봐도 다 알고 있음에도 여유롭게 그녀를 마주하고 있었다.

잠시 고민이 됐다. 지금이라도 왜 상단에 찾아왔냐고 캐물을지, 아니면 본래 목적대로 움직일지.

“요청할 게 있습니다.”

잠깐의 고민 끝에 에스티아는 후자를 택했다. 지금은 빙빙 돌려가며 그를 떠보기보다 맨몸으로 부딪혀야 할 때였다.

“혹시 전에 찾아 드렸던 ‘펄 브릴리언트’를 다시 볼 수 있을까요?”

“……그 꽃을 다시…….”

착각이 아니라면 오스카의 눈빛이 반짝인 것도 같았다. 도대체 왜? 에스티아는 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네, 그 꽃과 핑크스를 자세히 보고 싶어요.”

이해가 가지 않는 부탁이라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에스티아는 나름의 핑곗거리를 몇 가지 들고 온 참이었다.

“네, 그러시죠.”

“네?”

“꽃 보러 가시죠.”

하지만 오스카는 이유를 묻지도 않고 바로 승낙했다. 이제 에스티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어쩌면 후작이 이 순간조차 예상했으리라는 것을.

“감사합니다.”

그런다고 도망가야 할까. 에스티아는 인사를 하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두려웠지만 겁을 낼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함정이라면 당당하게 헤쳐 나가고 싶었다.

“따라오시죠.”

오스카 후작이 가뿐하게 몸을 일으키며 문을 열었다. 그 모습이 사뭇 신나 보이기까지 해서 더 소름이 끼쳤다.

에스티아가 본능적으로 복도를 두리번거렸다. 안셀과 이안은 다른 장소로 갔는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이 남자는 어디까지 예상을 하고 있는 걸까.

“설레는군요. 영애와 ‘함께’ 꽃들을 보는 날이 오다니.”

그가 유독 한 단어에 강세를 두며 말했다. 에스티아가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어느새 후작은 대놓고 수상한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영애와 함께 꽃을 보는 순간을 꿈꿨죠. 그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도대체 무슨…….”

결국 에스티아가 참지 못하고 물으려던 차에 오스카가 등을 돌렸다.

“바로 여기입니다. 여기에 영애가 보고 싶어 하는 펄 브릴리언트가 있지요.”

에스티아는 그의 말투가 묘하게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

“자, 어서 들어오시죠.”

오스카가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작은 방 가운데 협탁이 있었고 그 협탁 위에 펄 브릴리언트가 꽂혀 있었다.

한 가지 이상했던 점은 협탁 뒤에 또 문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에스티아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오스카가 문 쪽을 손짓했다.

“아, 저쪽 방에는 ‘다른’ 꽃이 있습니다.”

“‘다른’ 꽃이요?”

“네, 정말 힘들게 찾은 꽃들이죠.”

여전히 오스카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거미줄 안에 들어온 먹이를 보는 것처럼.

“자, 그럼 브릴리언트와 핑크스를 자세히 들여다보시죠.”

그가 핑크스가 든 상자를 브릴리어트가 든 꽃병 옆에 놓았다.

“전 옆에서 조용히 서 있겠습니다.”

“……함께 보는 건 나중에 하고 잠시 혼자 있을 수 있을까요?”

왠지 그 미소가 꼴 보기 싫어 에스티아가 날카롭게 내뱉었다. 오스카가 과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시군요. 그럼요. 전 한 10분, 이따가 오겠습니다. 천천히 보세요.”

마치 광대 같은 몸짓이었다. 오스카가 밝게 웃으며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빨리 돌아와야 해요, 에스티아.

다시 에버하르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래, 빨리 확인하고 나가자. 에스타가 속으로 다짐하며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브릴리어트와 핑크스는 어서 말하라는 듯이 옅은 빛을 뿜어냈다.

“나한테, 이야기를 들려줘. 내가 잊고 있었던 기억들을.”

그리고 마치 에스티아의 말이 주문이라도 된 것처럼 꽃은 점점 강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점점 숨이 가빠왔다. 심장이 두근두근하고 몸의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기억 속에서 눈을 뜨니 그곳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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