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 ‘과거’ 속으로
몸이 무거웠다. 온몸이 철 덩어리가 된 것처럼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의식만 깨어 있는 느낌이었다.
“저거 또 자네.”
굵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 옆으로 얇은 남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곧 뒈지니까 현실 도피라도 하나 보지. 내버려 둬.”
두 남자가 비웃는 소리가 에스티아의 귓가를 찔렀다.
에스티아의 눈썹이 꿈틀했다. 곧 그녀의 눈이 떠지고 흐린 시야 끝에서 두 인영이 보였다.
“아구, 우리 공작 영애님께서 많이 시끄러우셨나 봅니다? 엉?”
쾅쾅! 얇은 갑옷을 입은 사내가 들고 있는 몽둥이로 쇠창살을 쳤다. 에스티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린 채로 벌벌 떨었다.
“하! 무섭긴 한가 봐?”
“그러게. 근데 이를 어쩌나? 이제 곧 고기밥이 되실 텐데.”
두 남자는 깔깔 웃으며 에스티아를 스쳐 지나갔다. 와중에도 몽둥이로 창살을 치고 가는 건 잊지 않았다.
‘뭐지.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마치 한두 번 겪은 게 아니라는 것처럼 몸은 뻣뻣하게 굳은 채 풀릴 줄 몰랐다. 에스티아는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이게 뭐야…….”
그렇게 중얼거린 에스티아는 곧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잔뜩 갈라진 목소리는 거의 노인의 것처럼 들렸다.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옷은 거의 거적때기 하나만 걸치고 있는 데다가 팔과 다리는 채찍이라도 맞은 것처럼 긴 자상들이 무수히 새겨져 있었다.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본 에스티아는 그 상처가 누구에게 맞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낸 상처라는 걸 눈치챘다.
가장 충격적인 건 손목과 발목에 두꺼운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는 것이다. 마치 죄수를 취급하듯이.
죄수?
에스티아가 힘이 없는 몸을 겨우 오른쪽으로 틀었다. 그러자 아까 남자들이 치고 갔던 창살이 보였다. 혹여나 사람이 빠져나갈까 가로세로로 촘촘히 짜인 창살이.
‘죄수가, 맞구나.’
그 사실을 깨닫자 걷잡을 수 없이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에스티아 스스로도 왜 자신이 이토록 두려워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환상의 끝이 결코 좋지 않으리라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에스티아가 일어서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었지만 다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에스티아는 다리를 질질 끄며 오로지 팔 힘으로 창살로 가까이 다가갔다.
“저기요…… 저기요…… 아무도 없어요?”
창살을 내리치는 에스티아의 손에는 하도 힘이 없어서 창살이 울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한참을 부르던 에스티아는 결국 포기하고 창살에 기댔다. 아무래도 간수였을 두 남자는 이미 다른 데로 가 버린 듯했다.
‘도대체 여기에 얼마나 있었던 거야.’
에스티아는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감옥 안은 몸이 시릴 정도로 추웠고 그녀가 입고 있는 죄수복은 손바닥만 한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었다.
에스티아는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이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이 감옥에서 살아서 나갈 수 있을지.
생각을 해야 했는데 머릿속이 딱딱하게 굳은 듯 생각이 흐르지 않았다. 뭔가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거 같았는데 생각나지 않았다. 뭐지, 뭘 잊고 있는 거지.
-난 널 가문에서 파문하기로 했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기억이 맞다면 이 목소리는 로셸 글레멘드의 것이었다.
난 널 가문에서 파문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에스티아에 빙의된 이래로 로셸이 에스티아에게 그런 말을 한 걸 들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내 진심을 증명할 증거로, 널 사형해 달라 폐하께 청원하기로 했다. 여기에는…….
청원?
에스티아가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로 목소리에 집중했다. 이 내용을 어디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
에스티아가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자 냉정한 로셸의 말이 이어졌다.
-여기에는…….
뭔가를 직감한 에스티아가 눈을 번쩍 떴다.
-여기에는, 바일 대공 전하께서도 힘을 보태시기로 하셨다.
에스티아의 입술 사이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당연히 빙의된 이후가 아니었다. 이 기억은, 이 환상은 바로 ‘원작의 내용’이었다. 에스티아는 지금 ‘원래 에스티아’가 되어 원작 속에 들어온 것이다.
근데 그렇다면 한 가지가 이상하다. 그녀는 분명 꽃에게 그녀가 잊고 있는 기억을 알려 달라고 했다.
“이 멍청아 일어나!”
그때 아까 봤던 간수가 그녀가 기댄 창살을 쾅쾅 쳤다. 그 덕에 에스티아는 경기를 일으키며 몸을 피해야 했다.
“꼴에 사람이라고 졸리긴 한가 보지? 아, 하기야 짐승 새끼도 잠은 잔다만.”
간수는 제가 말하고 혼자 웃었다.
“근데 넌 짐승보단 못한 년이잖아. 왜 잠을 자고 지랄이야.”
간수는 그러고서는 에스티아를 향해 침을 퉤 하고 뱉었다. 피할 힘도 없던 에스티아는 그저 가만히 몸을 아기처럼 말고 있었다.
“다 됐나?”
그 순간 다른 음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에스티아는 그 음성을 듣고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예! 대공 전하. 이년이 좀 굼떠서 말입니다. 대화 나누십시오.”
에스티아가 팔을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반들반들 닦인 구두가 눈에 보였다.
“꼴이 말이 아니군.”
온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였다. 에스티아가 겨우겨우 고개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열심히 반성은 하고 있었나? 하긴 사람을 죽이려고 했던 죄수 주제에 반성을 할 리는 없지만.”
마침내 에스티아의 시선이 남자의 얼굴에 닿았다. 옅은 녹색 눈동자가 냉혹한 빛을 띤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 말이라도 하지 그래?”
사람이 아니라 가면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에스티아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당신 설마 에스티아를 이대로 놔둔 거 아니죠. 구하려고 시도는 한 거죠?
그러나 그녀의 마음과는 달리 입술 사이에서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나…… 나 아니야, 에버.”
에스티아가 생채기가 가득한 두 손으로 창살을 짚었다.
“나는…… 메르헨 셰린포드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어. 정말이야.”
어느새 그녀의 두 뺨 위로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아니라고? 그럼 메르헨이 먹은 차에 독이 들어 있었을까. 그것도 네가 네 방 깊숙이 숨겨 둔 독과 똑같은.”
에버하르트가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띠웠다.
“낯이 익은 독이더군. 오래전에 네 덕분에 보았지. 그 독, 황제도 구하기 힘든 독이야. 그러다 보니 더 덜미를 잡기 쉬웠지.”
에버하르트가 한쪽 무릎을 꿇어 에스티아와 시선을 맞추었다.
“웬트워스 남작을 시켜 독을 훔쳐 오도록 시켰더군. 많이 애썼던데.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남작은 물론 너도 죽을 거야. 바로 오늘.”
“……아니라고 얘기해.”
에스티아가 창살을 잡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니라고 얘기하라고! 당신 나 사랑하잖아! 사랑하는데 왜 버려, 왜!”
에스티아가 창살을 내리치며 발악했다. 하지만 에버하르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냉혹하게 내뱉었다.
“버리긴 네가 먼저 버렸지. 그 빌어먹을 후작하고 손을 잡고 내 뒤통수를 쳤잖아.”
“아냐…… 아냐…… 그건 에버하르트, 내가 다시 설명을…….”
“그 지긋지긋한 해명은 듣기 싫다고 애저녁에 얘기했을 텐데?”
에버하르트가 그녀를 비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에스티아가 창살 틈으로 손을 밀어 넣어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가지 마! 가지 마! 에버하르트! 나 버리지 마, 제발!”
“입 다물어.”
에버하르트가 발을 앞으로 빼며 그녀의 손을 매정하게 쳐냈다.
“명복은 빌어 주지. 기운 있으면 호송 마차 바닥이라도 내리쳐 보든가. 혹시 몰라? 마차가 툭, 하고 부서질지.”
에스티아는 도저히 그를 부를 수가 없었다. 간수가 그녀에게 한 조롱과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무정한 목소리였다.
발자국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에스티아는 그저 울기만 했다. 점점 느껴졌다. 이건 단순히 어느 소설의 이야기인 게 아니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가슴속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절망이 말해 주고 있었다. ‘이건 바로 너의 기억이야’라고.
얼마큼 울었을까. 갑옷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창살문이 열렸다.
“더러운 년아, 어서 일어나.”
간수가 짐짝을 들듯 그녀를 일으켰다. 두 간수는 에스티아를 가운데에 낀 채 긴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 끝에는 큰 호송 마차가 서 있었다. 간수는 그녀 머리 위에 포대기를 씌우고 마차에 태웠다.
마차는 한참을 달렸다. 에스티아는 손끝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기운 있으면 호송 마차 바닥이라도 내리쳐 보든가.
언뜻 에버하르트의 목소리가 다시 들린 듯도 했다.
에스티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기어코 마차가 어느 지점에서 멈춰 섰다. 간수는 다시 에스티아를 일으켜 마차 밖으로 끌어냈다. 간수가 그녀가 머리에 쓰고 있던 포대기를 벗겼다.
순간적으로 빛이 쏟아지자 에스티아가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곧 가파른 절벽이 보였다. 그 아래로는 깊은 강이 보였다.
“죄인 에스티아 글레멘드.”
사형 집행장이 근엄한 목소리로 에스티아를 호명하더니 판결문을 읊었다.
판결문의 내용은 대략 대공비가 될 셰린포드 공작 영애 살인 미수 혐의로 사형에 처한다는 말이었다.
간수가 에스티아 발목에 채워진 수갑에 묵직한 쇳덩어리를 달았다.
에스티아는 발악했다. 아주 잠시.
그러나 그녀의 노력을 무시하듯 두 간수는 그녀를 절벽 아래로 밀어 버렸다.
그 이후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형언할 수 없는 지독한 고통이 덮쳐 왔다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