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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114화 (115/141)

114화 - 당신 말이 맞았어

“괜찮으십니까?”

한동안 에스티아는 자신이 무슨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정신이 몽롱할 뿐이었다.

“쉬고 가시겠습니까?”

다정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음성이 에스티아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찾아와서 대뜸 하는 말이 자신이 흑마법을 써서 시간을 되돌렸고…….

정신이 맑아지면서 에스티아의 숨도 점점 더 거칠어졌다.

-……그 부작용으로 영애가 기억을 잃었을 거라고 했습니다.

“손 치워.”

에스티아의 뺨을 쓸던 손이 멈칫했다. 기운이 없었지만 에스티아는 매섭게 오스카의 손을 쳐냈다. 그리고 온몸의 기운을 끌어모아 몸을 일으켰다. 이 흑마법사가 자신의 얼굴을 만지고 있었던 것뿐만 아니라 그의 무릎에 그녀를 뉘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많이 어지러우실 텐데.”

오스카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에스티아는 덜덜 떨리는 몸을 벽에 기댔다.

“에버하르트의 말이 사실이었네.”

“‘에버하르트’라뇨. 이름을 부를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이제 아실 텐데요.”

에스티아는 여전히 실실거리며 웃는 저 후작을 없애 버리고 싶었다. 오스카가 그녀를 향해 가까이 다가왔다.

“기억하셨잖습니까. 대공은 당신을 죽인 사람입니다. 불쌍하기도 하지.”

오스카가 장난치듯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에스티아는 떨리는 몸을 벽에서 떼며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내가 원래 세상에서 여기로 오게 만든 것도 당신이지?”

“원래 세상은…….”

오스카가 에스티아의 머리카락으로 손을 뻗었다.

“그 이상한 곳이 아니라 여기인걸요.”

“……이상한 곳이라니. 그럼 그 세상이 가짜 세상이라도 된다는 거예요?”

에스티아가 그를 노려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오스카가 태연한 표정을 한 채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그저 ‘흑마법’의 힘을 빌린 것뿐입니다. ‘안셀’에게 당신이 혹시 다른 세상에서 환생했다면 이 세상으로 다시 되돌려 달라고 그랬죠. 그런데 그렇게 되면 기억이 뒤죽박죽되거나 혹은…….”

오스카가 진득하게 에스티아와 눈을 맞췄다.

“기억이 아예 사라질지도 모른다더군요.”

“그러면 내가 봤던 소설은? 그 소설의 주인공은 에버하르트와 메르헨…….”

급하게 말을 하던 에스티아가 돌연 뚝 말을 멈췄다. 에스티아의 눈빛에 경악스러운 기색이 가득 찼다. 오스카가 무슨 말인지 안다는 듯 빙긋 웃었다.

“그것마저도 당신 짓이었구나. ‘안셀’은 흑마법에 통달한 사람이고?”

“그저 부탁했을 뿐입니다. 당신이 완전히 속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에스티아는 고통이 깃든 한숨을 내쉬었다. 환각, 아니 과거를 보았을 때 내면의 소리를 들었었다. 이 기억은 바로 너의 것이라는.

그 말이 맞았다.

‘내가 에스티아였구나.’

‘진짜 에스티아’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에스티아였다. 이 세상에서 죽었던 자신은 환생해서 다른 세상에 있다가, 이자의 흑마법으로 원래 세상으로 돌아온 거였다. 그녀가 봤던 로판은 이 작자의 어쭙잖은 수작질이었다. 자신은 거기에 아무것도 모른 채 놀아난 거였다.

“아무튼 그게 뭐 중요합니까? 내가 당신을 살려냈습니다.”

오스카가 에스티아의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살포시 잡았다. 그러고는 검지와 엄지로 만지작거렸다.

“시간을 되돌려서 당신이 다시 살아날 수 있었지요.”

오스카가 거의 한 뼘의 거리만 두고 에스티아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전 당신 편이에요. 대공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습니까? 당신을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죽게 만든, 그 작자에게.”

머리카락을 잡던 오스카의 손이 에스티아의 뺨으로 향했다.

“내가 당신을…….”

“내가 말했지.”

에스티아가 눈물이 고인 눈으로 오스카를 노려보았다.

“이 손 치우라고.”

“…….”

여유가 흐르던 오스카의 표정에 미세한 금이 갔다. 힘은 티끌만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에스티아는 이번에도 그의 손을 냉정하게 쳐냈다.

이것이 이 흑마법사가 원하던 거였다. 그 남자와 그녀 사이를 이간질하고 그녀를 독차지하려고 했었던 것이다.

마음이 분노로 부글부글 끓었지만 에스티아는 말을 아꼈다. 모든 게 다 기억이 난 건 아니었다. 드문드문 기억이 비어 있는 곳이 있었다. 이런 시점에서 말을 많이 해 봤자 좋을 건 없었다.

뜨거웠던 머릿속의 열기가 가라앉으면서 이성이 돌아왔다. 에스티아는 지금은 분노를 표출할 때가 아니라 일단은 후퇴를 해야 할 때라고 확신했다.

“죄송해요, 제가 혼란스러워서 저도 모르게 후작님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해도 될까요.”

에스티아가 일부러 눈을 내리깔고 더욱 몸을 떨었다. 방금 화냈던 것이 고의가 아닌 것처럼.

그녀의 예상대로 얼어붙었던 공기가 느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오스카가 에스티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구역질이 났지만 에스티아는 참았다.

“그럼요. 웬트워스 남작한테 모셔다드리지요. 아니면 쉬고 가셔도…….”

“아뇨, 혼자 생각할…… 편하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그럼 궁으로 돌아가실 겁니까?”

오스카의 눈빛에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에스티아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곳에서 잠깐 쉬고 갈 거예요. 그 사람을 보긴 싫거든요.”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이제 어떻게 다시 이 세상에 돌아왔을 때처럼 굴 수 있겠는가. 에스티아는 벌써부터 아득함을 느꼈다.

단순히 빙의했다고 느꼈던 때가 아주 먼 옛날 같았다. 차라리 그저 빙의한 거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메르헨도 소설대로 선한 여주인공이고, 에버하르트도 여주인공밖에 모르는 보통 남주인공이었다면. 그녀도 이제 겨우 정신을 차린 ‘악녀’ 정도로 남아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에스티아는 모든 걸 회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소설은 완전히 잘못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무너질 순 없었다. 이럴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했다.

오스카가 어깨에 얹었던 손을 내려 그녀의 손을 잡았다. 원래는 레이디가 먼저 잡지 않으면 신사가 먼저 잡아선 안 되는 거지만 에스티아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고분고분 그의 손을 잡고 복도로 향했다.

“아가씨!”

어떻게 일이 끝났다는 걸 알았는지 복도 저편에서 집사 안셀과 이안이 오고 있었다.

이안은 하얗게 질렸다. 에스티아의 안색이 곧 죽어 가는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이안은 곧바로 오스카에게서 에스티아를 떼어 냈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안은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일단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걸.

“실례가 많았습니다, 후작님.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러세요. 영애가 많이 아프신 거 같으니…….”

오스카가 싱긋 웃었다. 이안이 본능적으로 에스티아를 품으로 끌어안으며 저택 현관으로 향했다.

문이 닫히자 이안이 에스티아를 안아 들었다. 작은 몸이 품 안에서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안이 순식간에 마차에 올라탔다. 이안이 출발 신호를 보내지 않았음에도 마부는 눈치껏 마차를 출발시켰다.

이안은 일이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이를 증명하듯 에스티아의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순간 에스티아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안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주군을, 동생을, 가족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에스티아…… 에스티아…….”

이안이 에스티아를 꽉 끌어안았다. 에스티아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슬픔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 * *

에스티아는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좋아했다. 에버하르트는 그녀가 돌아오면 변장을 하고 디저트 가게부터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상황이 안 좋은 만큼 에스티아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그간 모진 말을 많이 쏟아 냈던 만큼 그 배로 다정한 말을 많이 해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에버하르트의 펜촉은 멈출 줄을 몰랐다. 겨우 하루 가까이 보지 못했을 뿐인데 그녀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보고 싶은 만큼 하고 싶은 것도 늘어났다. 에버하르트는 시간이 흐를수록 극심한 초조함을 느꼈고 그만큼 더 열심히 움직였다. 훈련을 하고 그 쉬는 시간에 에스티아와 하고 싶은 걸 썼다.

시간이 어느새 10시를 향해 갔다. 에버하르트는 저녁도 먹지 않은 채 훈련을 빠르게 끝내고는, 에스티아와 하고 싶은 것을 100개째 쓰고 있는 중이었다. 마음속에는 설렘과 불안함이 동시에 공존했다.

“전하.”

그때 문밖에서 급하게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겨우 한 번 불렀을 뿐이지만 에버하르트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에버하르트는 한숨을 쉬며 문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건 빨리 처리해야겠다 싶었다.

“뭔가, 이 시간…….”

퉁명스럽게 대답하던 에버하르트는 곧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시종 옆에 있는 한 여인 때문이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재회하게 될 거라고는 예상 못 한.

“에스티아……?”

그녀에게 움직이던 에버하르트의 손이 움찔했다.

“잠깐 이야기할 수 있죠.”

에스티아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었다. 마치 오열이라도 한 것처럼. 게다가 눈빛은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듯 텅 비어 있었다. 에버하르트의 심장이 아래로 쿵 떨어졌다.

낯설지 않았다. 2년 동안 모진 말을 할 때마다 종종 에스티아는 지금처럼 공허한 눈빛을 하곤 했다. 그러면 그녀는 다른 때처럼 소리를 지르거나 발악하는 대신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그걸 외면하고 지나갔다.

이렇게 갑자기 기억을 하게 된다고?

각오했던 것이 무색하게 에버하르트는 짙은 불안감이 마음을 짓누르는 걸 느꼈다.

기억하면 마음도 돌아올 거라 합리화했건만 막상 그 상황이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무서웠다.

에스티아는 그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왔다. 시종이 눈치껏 문을 닫고 물러났다.

“에스티아…….”

“일단 앉아요. 오자마자 바로 온 거 맞죠? 다과라도…….”

“혹시나.”

애써 상황을 풀어 보려던 에버하르트를 에스티아가 차갑게 끊었다.

“혹시나…… 오스카 후작이 날 미행할까 봐, 길을 우회해야 했어요. 궁에도 정말 은밀하게 입궐해야 했고요.”

에버하르트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에스티아의 목소리가 너무 단조로웠다.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이 이야기하듯이.

“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런데, 그가 다가온 만큼 에스티아가 뒤로 물러섰다. 에버하르트는 지옥이 코앞에 다가온 것 같다고 느꼈다.

“당신이 전에 얘기했었죠. 라 빅터 오스카가 흑마법으로 시간을 되돌렸다고. 그 부작용으로 내가…… 기억을 잃었다고.”

에스티아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당신 말이 맞았어.”

“…….”

에스티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걸 본 에버하르트의 마음도 갈기갈기 찢어졌다.

“오스카가 시간을 되돌린 게 맞았어.”

에스티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밑으로 굵은 눈물방울이 흘렀다.

“당신이 날 죽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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