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 고해 성사
에버하르트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에버하르트의 눈빛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누가…… 누굴 죽였다고요?”
에버하르트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에스티아는 더욱 뒤로 물러설 뿐이었다. 에버하르트는 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걸 느꼈다.
“당신이 날 죽였다고요. 그리고 오스카 후작이 흑마법을 써서 시간을 되돌렸어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제야 에버하르트는 상황이 엉망으로 흐르고 있다는 걸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아닐 거예요. 제가 당신을 왜…… 그자가 분명 거짓말을…….”
“거짓말이요?”
에스티아의 큰 눈에서 눈물이 다시 한번 흘러내렸다. 에스티아는 이제 모든 걸 포기한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게 에버하르트를 미치게 했다.
“거짓말이라고 하기에는 내가…… 다…… 기억을 했어요, 에버하르트.”
에스티아가 결국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작은 두 손 사이에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도대체 날 왜 그렇게 버렸어요? 뭐가 그렇게 내가 미워서.”
에스티아가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는 그를 원망스럽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얼마나 내가 경멸스럽고 혐오스러웠으면, 날 그 끔찍한 감옥에 내버려 둘 수 있어요. 어떻게 날 그 깊은 물 속으로…….”
에스티아는 울음을 멈추고 싶었다. 그런데 말을 하면 할수록 그 기억이 그녀의 것이라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현대의 세상이 아니라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원래 그녀의 세상이었던 것이다.
말을 하면 할수록 가슴이 썩어 들어갔다. 이제야 믿어 보려고 했는데 그 모든 것이 처참하게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아니야, 아니야……. 뭔가 오해가 있었을 거예요.”
“오해?”
에스티아가 헛웃음을 흘렸다. 명백한 불신의 표시에 에버하르트는 심장이 타들어 가는 걸 느꼈다.
“당신이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
“‘명복은 빌어 주지. 기운 있으면 호송 마차 바닥이라도 내리쳐 보든가. 혹시 몰라? 마차가 툭, 하고 부서질지.’”
“아냐.”
에버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진실이어도 믿지 않을 것처럼 절박한 몸짓이었다.
“내가 메르헨 셰린포드를 독으로 죽이려고 했다고, 내 ‘아버지’란 작자가 사형을 청원했고 당신이 그걸 지지했대.”
에스티아가 손으로 뺨에 들러붙은 눈물 자국을 지웠다.
“미련도 없이 떠나더라, 당신.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아냐, 안 믿어.”
에버하르트가 광기가 느껴질 정도로 간절한 눈빛을 하며 부정했다.
“뭘 안 믿어. 내가 기억한다고, 에버하르트.”
그랬다. 원래는 그에게 편히 말을 놓았었다. 에스티아는 조금씩 그녀가 ‘에스티아’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걸 에버하르트도 눈치챈 듯 눈동자에 공포가 감돌았다. 그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돌아왔다’는 것을.
게다가 시간을 되돌리기 이전에 그가 그녀의 죽음을 방관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끔찍한데, 이제 곧 에스티아가 그를 버릴지도 모른다고는 공포감이 에버하르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당신이 날 죽였어.”
“아니야!”
에버하르트의 눈은 벌게지다 못해 실핏줄까지 터져 있었다. 잠깐 동안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은 탓이었다. 에스티아는 그가 안쓰러우면서도 너무 미웠다.
“다 기억한 건 아니야. 구멍이 난 기억들이 많아. 내가 기억하는 건 당신이 내 죽음을 방관한 거랑…… 어렸을 때 추억 몇 개, 지난 2년 동안 당신이 내게 한 모진 말 몇 개…….”
에스티아가 지친다는 듯이 이마를 쓸었다.
“근데 그런 기억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런 게 중요…….”
에스티아는 이제 쓸데없는 감정 소모전은 그만두고 싶었다. 오스카의 수작질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대로 된 대책을 짜고 싶었다.
마음은 아직도 울렁거리고 아예 그에게 소리를 질러대고 싶었지만 에스티아는 참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자고, 마차 안에서 끊임없이 되새겼었다.
에스티아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돌렸다. 이제 감정적으로 얘기하는 게 아닌, 침착하게 논의할 차례였다.
“지금 뭐 하는……!”
하지만 에스티아의 생각은 곧 멈추고 말았다. 그녀의 눈앞에서 거대한 몸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뭔가 오해가 있었을 거예요.”
“일어나, 빨리!”
에버하르트가 무릎을 꿇었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그 오만한 남자가 처참하게 부서졌다.
“당신이 거짓말했을 거라는 게 아니에요. 아닌데…… 오해가, 착오가 있었을 거예요.”
에버하르트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허리춤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죄인이 사제에게 고해 성사를 하듯 허물을 숨김없이 내보이며.
“에스티아, 우습겠지만. 내 말을 들어줘요. 내가…… 내가 그럴 리가 없어요. 내가 어떻게 당신을!”
에버하르트가 고개를 번뜩 들었다. 그는 우는 정도가 아니었다. 절규하고 있었다.
“내가 그럴 리가 없어요! 어떻게 내가…… 내가 당신을 죽여! 어떻게!”
“…….”
에스티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도 믿고 싶었다. 이 남자가 자신을 죽이지 않았다고. 방관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감옥에서 보인 그 모진 태도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비참해서 다른 사정이 있었을 거라 합리화할 수도 없었다.
“증명…… 내가 증명할게요. 절대 내가 그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할게요.”
“무슨 수로. 미래에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당신이 증명해. 게다가 이미 많은 것이 달라졌는데, 당신이 무슨 수로…….”
에스티아는 사실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다. 만약 그녀가 다른 세계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에버하르트가 그녀를 죽였을 거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할게요. 내 모든 걸 동원해서, 아니, 필요하다면 내 목숨을 걸고 증명할게요. 그러니, 제발…….”
에버하르트가 긴 팔로 에스티아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혹시라도 갑자기 신기루처럼 사라질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제발…… 나 버리지 마. 나, 그럼, 진짜 안 돼, 에스티아…….”
에스티아의 드레스가 점점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에버하르트의 몸은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그를 향해 말했다. 당신을 버리러 온 게 아니다. 오스카 후작에 어떻게 대항할지 논의하러 왔다. 아무래도 오스카의 흑마법이 우리 둘을 강하게 옥죄고 있는 거 같다.
그리고 이것까지 말하려 했다. 지금 당장 우리가 멀어지는 건 오스카 후작이 원하는 거라고.
하지만 에버하르트는 듣지 못했다. 정확히는 들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흐…… 헉…….”
에버하르트가 목을 부여잡고 상체를 움츠렸다. 에스티아는 경악하며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상태로 에버하르트의 큰 몸을 끌어안았다.
“에버! 숨, 숨 쉬어, 천천히.”
“에스…… 에스티아…….”
에버하르트가 다급한 몸짓으로 에스티아의 몸을 당겼다. 작은 몸이 에버하르트의 몸에 완전히 파묻혔다.
에스티아는 벗어나고 싶었다. 너무 미워서, 밀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에스티아는 가만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다른 게 아니었다. 감옥 안에서 미치도록 그리웠던 것이 이 남자의 따뜻한 품속이었기 때문이었다.
설령 그때 조롱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날 안아만 줬었어도, 그렇게 끔찍한 기분 속에서 죽지 않았을 거야.
“다시 믿을 수가 없어졌어. 당신이 날 사랑한다는걸. 근데 그렇다고 도망가 버릴 수가 없더라. 그게 바로 그 악마가 원하는 걸까 봐.”
꽃을 통해 기억이 돌아오니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오스카 후작은 그녀가 기억을 되찾는 것까지 고려해 흑마법으로 시간을 되돌린 거였다. 굳이 에스티아가 처형을 당할 때까지 기다린 게 아니었던 것이다.
오스카는 ‘에버하르트가 결국에는 당신의 죽음을 방관했다’는 걸 에스티아가 인식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혹시라도 그에게 다시 끌리게 될까 봐.
에스티아의 심장이 점점 차가워졌다. 그걸 느낀 듯 에버하르트가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줬다.
“내가…… 증명할게. 이제 내가 증명할게.”
“뭘?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
에스티아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온 후, 그가 처음에 요청했던 증명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라는 거였으니까.
“아니.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증명할게. 내 자신보다 당신을 훨씬, 아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한다는 거.”
에스티아는 슬펐다. 사랑한다는 말을 이렇게 그의 사랑을 포기해 버리는 순간에 듣고 싶은 게 아니었다.
“어떻게 증명하게.”
에스티아가 나지막이 내뱉었다. 그와 동시에 그가 에스티아의 몸을 살짝 떨어트렸다. 물론 여전히 그녀의 팔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였다.
“네가 원하는 대로.”
“…….”
“아니, 그 이상으로 열렬하게, 증명할게.”
에스티아가 그의 얼굴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느새 이 남자의 얼굴도 눈물투성이었다.
묻고 싶었다. 2년 동안 주었던 상처가 있는데 가능하냐고. 웬만한 열의와 열망으로는 증명하기 힘들 거라고도 말하고 싶었다.
동시에 2년 전에 자신이 그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도 묻고 싶었다. 뭘 했기에 끔찍한 감옥에 자신을 버려둔 건지.
하지만 아직 선명했다. 그 감옥 안에서의 지독한 외로움이 너무 선명했다. 게다가 지금 그것까지 들으면 마음이 견디지 못할 거 같았다. 지금 당장은 그때의 자신에게, 어쩌면 상황만 조금만 더 나았어도 미래가 달라졌을 거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지금 그녀가 되돌아와 현재를 바꿔 나간 것처럼.
“그럼 표현해 봐. 아직도 당신 마음을 믿을 수가 없거든. 그러니까, 어디 한번, 해 봐.”
에스티아가 지친 듯한 얼굴로 벽에 기댔다. 동시에 그녀의 입술에 붉은 입술이 닿았다.
다시 절박하게 매달리듯 에버하르트는 그녀의 입술을 집요하게 머금었다. 에스티아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기나긴 밤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