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 기나긴 밤의 시작
숨이 찼다. 하지만 물속에서처럼 괴롭진 않았다.
오히려 지금은 그 감옥에서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그토록 갈망하던 이와 끌어안고 있어 안심이 되기까지 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때가 진짜로 있었던 일이라고 믿기 싫었지만 마음속에 남은 짙은 두려움이 그 기억이 사실이라고 말해 주었다.
“무서워.”
이를 증명하듯 에스티아는 몸을 떨었다. 에버하르트는 그녀의 입술을 핥으며 작은 등을 쓰다듬었다. 이제 더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얘기하듯 그녀의 얼굴 구석구석에 입을 맞추었다.
떨림은 잦아들었지만 에스티아의 얼굴에는 그 기억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에버하르트는 에스티아를 부드럽게 안아 들며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기억을 잃은 후 에스티아는 편한 옷만 입고 다녔다. 드레스라도 화려한 게 아닌 갈아입기 편한 걸로 입었다. 그러니 그걸 다른 곳으로 치워 버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에버하르트는 그녀의 입술을 놓지 않으며 부드럽게 그녀를 다독였다.
이성을 끊기게 만드는, 어떻게든 부여잡고 싶은 아름다움이 거기에 있었다.
에버하르트의 뜨거운 입김이 에스티아의 목에 닿았다. 혹시라도 놓치는 곳이 있을까 붉은 흔적이 목에서부터 아래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에버, 잠깐…….”
에스티아가 에버하르트에게 손을 뻗었지만 그는 이미 손이 닿는 위치에서 벗어나 있었다. 붓이 종이 위를 살포시 걷는 것처럼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에스티아는 막고 싶었다. 이런 쾌락은 아직 낯설었다.
머릿속이 순식간에 하얘진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에스티아가 풀린 눈으로 달뜬 숨을 내뱉었다.
에버하르트가 다시 입을 맞춰 왔다. 가뿐히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온 혀가 탐닉하듯 안을 휘저었다. 에스티아가 에버하르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에스티아의 윗입술을 핥고 빠는 와중에도 에버하르트는 틈틈이 그녀의 애칭을 불렀다. 에스티아의 머릿속에 방금 전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제 내가 증명할게.
“괜찮아?”
에버하르트가 그녀의 턱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에스티아가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입술 사이로 소리만 흘렸다.
“티아, 티아.”
에스티아의 몸 위로 형언할 수 없는 쾌락이 휩쓸었다.
운동장 한복판을 돈 듯 에스티아의 얼굴을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있었다.
곧 천이 쓸려 침대 밖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티아.”
그녀를 따라 나신이 된 에버하르트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에스티아는 왜 부르냐고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곧 몸을 관통하는 엄청난 고통에 에스티아는 질문은커녕 짧은 비명밖에 뱉을 수 없었다.
“아!”
에스티아의 눈가에 눈물이 가득 맺혔다. 에버하르트가 눈물을 핥으며 천천히 몸을 밀어붙였다.
에버하르트의 목을 안고 있는 팔이 덜덜 떨렸다. 그는 아직 움직이지도 않았다. 움직이기 위해 고통스러운 침입을 아직도 하고 있었다.
“아…….”
“티아.”
에버하르트도 땀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자신의 갈망과 열망을 조금이라도 빨리 보여 주고 싶었지만 그 자신도 지금이 너무 낯설었다. 그녀 이외에 누구하고도 겪을 수 없는 것이라 여기며 누구에게도 허용하지 않은 탓이었다. 그라고 지금 같은 상황이 익숙한 건 아니었다.
다만 그는 자신이 지옥에 작게 마련된 헛된 천국 속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아래에서 올라오는 이 낯선 느낌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마치 퍼즐처럼 모양을 맞춰 가며 움직이던 몸은 점차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더 좋은 곳을 찾아가기 위해 단단한 승모근과 복부 근육이 꿈틀거렸다.
점점 머릿속이 점멸해 가고 낯선 느낌이 육체를 점령해 갔다. 에버하르트가 상체를 숙여 그녀의 귀를 잘근잘근 씹었다.
“티아, 내 티아…….”
에스티아가 아까보다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마저 미치도록 사랑스러워서 에버하르트는 그녀의 슬픈 울음마저 삼켰다. 말랑한 입술이 혀끝에 닿자 어떻게 해서도 가까워질 수 없을 거 같던 그녀가 더 선명히 느껴졌다.
“버리지 마. 나…… 버리지 마, 티아, 제발.”
마치 그곳에 닿지 못하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그가 남은 힘을 끌어모았다. 거친 숨이 귓가에 흩어지고 에스티아의 의식도 저 끝을 향했다.
곧 이 세상의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느낌이 두 남녀를 휘감았다. 에스티아의 몸이 축 처졌다.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의 머리를 넘기며 그녀의 얼굴, 쇄골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놓칠 세라 품에 소중히 껴안았다.
* * *
온몸에 고통이 느껴졌다. 일어서려던 에스티아는 도로 드러누울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긴 팔이 허리를 감고 있어 일어날 수 없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움직이지 못했으리라. 특히 하체 근육이 고통스럽다는 듯 비명을 질러 댔다.
“티아……?”
그녀가 살짝 움직이자 근육으로 단단한 팔이 더 그녀를 꽉 껴안았다. 에스티아가 숨 막힌다는 듯 어깨를 치자 그제야 살짝 힘을 풀었다.
“나…… 못 움직이겠어. 다리……가 너무 아파.”
하도 소리를 질러서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에스티아가 기운 없이 중얼거리자 에버하르트가 바로 몸을 일으켰다.
“여기 누워 있어. 목욕할 수 있도록 사람을 부를게.”
에버하르트가 침대에서 벗어나 가운을 걸쳤다. 그러고는 작은 테이블에 있는 유리잔에 물을 따라 에스티아의 손에 쥐여 주었다.
“금방 올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 알겠지? 대답해 줘.”
에버하르트가 그녀의 손등에 뺨을 비비며 애걸했다. 에스티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에버하르트가 침실을 나갔다.
시원한 물을 마신 뒤에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느낌이 몸을 관통했는데도 현실 같지 않았다. 에스티아는 침대 헤드에 기댄 채 생각에 잠겼다.
에버하르트와 그녀가 갈라서는 게 오스카가 원하는 것이다. 그의 말만 들으면 오스카가 자신을 희생하고 그녀를 살려낸 것처럼 들리지만 당연히 아니었다. 그가 그 정도로 그녀에게 따뜻한 사람이라면 에스티아가 감옥에 들어간 시점부터 그녀를 구하려고 해야 정상이었다.
원작에서는 에버하르트가 먼저 그녀를 처형해 달라 청원하고 로셸이 지지했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다. 애초에 메르헨부터가 원작과 아예 달랐다.
원작에서 메르헨은 성품이 선하고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잘 돕는다고 나왔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그녀는 죄 없는 사람들을 해쳤다. 거기다가 오스카와 손을 잡고 흑마법에 손을 대기까지 했다. 에버하르트를 협박하고 에스티아를 위협했다.
흑마법을 통해 시간을 되돌렸다는 것도 찝찝한 부분이었다.
더군다나 펄 브릴리언트가 보여 준 기억 속에 그녀 어머니의 조언도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티아. 혹여나 네가 위험 속으로 뛰어들까 전부 다 얘기할 수 없지만, 그래도 꽃을…… 적색 꽃을 조심해야 해.
적색 꽃. 에스티아는 직감적으로 어머니가 오스카 후작을 조심하라고 한 거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어머니가 어떻게 오스카가 수상한 자라는 걸 알았을까. 어머니는 언제부터 오스카를 알았을까.
-살려 줘, 빅터. 우리 ……를.
그리고 왜 자신은 과거에 그 작자를 이름으로 불렀을까. 무엇보다 ‘누군가’를 살려 달라는 중대한 부탁을 그자에게 했다는 것도 에스티아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 ‘부탁’으로 인해 에버하르트와 멀어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에스티아는 그것도 에버하르트에게 확실히 물어봐야 했다. 설령 그게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진실일지라도.
알아낼 게 많았다. 그러려면 더더욱 에버하르트와 떨어져서는 안 되었다.
에스티아가 유리잔을 든 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곧 유리잔은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에스티아는 몸을 웅크렸다. 몸을 갈기갈기 찢는 듯한 고통이 그녀를 덮쳤다.
뒤통수에만 희미하게 자리 잡았던 푸른 반점이 하얀 피부를 잠식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