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 그 여자한테 미쳐 있거든.
오늘 에버하르트의 심장은 하루 새에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밤새 절박하게 에스티아에게 매달리며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잠시나마 안식이 찾아왔었다. 옷을 갈아입고 시녀들을 데려왔을 때 쓰러진 에스티아를 보기 전까지.
그때 그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죽을 거 같은 공포만이 느껴졌다고 하는 게 맞았다.
-에스티아!
거의 비명을 질렀던 것도 같다. 에스티아의 온몸에 푸른 반점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양이 뒤덮여져 있었다.
‘오스카다, 오스카의 짓이야.’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한시도 떨어져 있기 싫었다. 그런데 때마침 반란 소식이 들렸다. 국경지대 요새 함락됐다는 건 심각한 문제였고, 전쟁에서 밀리게 되면 에스티아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다.
-글레멘드 양은 내가 무슨 수를 써서 회복하게 할 테니, 넌 빨리 전쟁을 끝나고 와.
레이븐이 부드럽게 에버하르트를 달랬다. 다행히 이번 전쟁은 초반에 승기만 잡으면 금방 진압할 수 있는 반란이었다.
“에버하르트……?”
에버하르트의 생각은 미려한 음색에 금방 깨졌다. 에버하르트가 황급히 한쪽 무릎을 꿇고 에스티아의 손을 잡았다.
“티아, 몸은. 몸은 어때. 어지러워? 아파? 의원을 부를까?”
“진정해.”
에스티아가 잠긴 목소리로 그를 진정시켰다. 기억을 되찾은 이후로 둘은 편하게 말을 놓고 있었다. 에버하르트는 그 사실이 기쁘면서도 고통스러웠다. 이 순간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분했다.
“티아, 고위 마법사들의 말로는 흑마법인 거 같대. 무슨 저주가 걸려 있는 거 같다고.”
에버하르트가 괴롭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야. 금방 찾을게. 조금만 기다려 줘. 그럴 수 있지?”
“기다릴 테니까, 진정 좀 해.”
에스티아가 에버하르트의 손을 톡톡 쳤다. 그 다정한 손길에 에버하르트가 다시 한번 무너졌다. 에버하르트가 작은 손에 얼굴을 묻었다.
“나 때문이야. 미안해. 다 빌어먹을 나 때문이야.”
“…….”
에스티아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에버하르트를 바라만 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에버하르트는 그녀에게 고마워 죽을 거 같았다.
“티아, 폰스탄 왕국에서 다른 소규모 왕국들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켰어. 기사단장으로서 전쟁에는 무조건 참전해야 해. 그래야지 너를 지킬 수 있어.”
“전쟁?”
에스티아의 마음이 철렁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원작의 내용이 스쳐 지나갔다. 원작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건 알지만 혹시나 원작처럼 전쟁에서 패배할까 두려웠다.
“약초는? 약초는 충분하지?”
“누구 덕분에, 넉넉해.”
하아. 에스티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여기서 자신과 풀어야 할 게 더 남지 않았냐고 책망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오히려 상황을 이겨 나가는 데 별로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에스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얼마나 걸릴 거 같아?”
‘빨리 올 거지?’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왠지 비굴해지는 거 같았다. 과거처럼.
“길어야 2주야. 폰스탄 왕국은 그렇게 군사력이 강하지 않아. 그러니 지금 막아야 해. 기다려 줄 거지?”
그런 에스티아의 마음을 눈치챈 듯 에버하르트가 죄책감 어린 표정으로 그녀의 머리를 넘겨주었다.
에스티아는 그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버하르트가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로 몸을 숙였다.
“키스해도 돼?”
에스티아가 몸을 움찔했다. 에버하르트가 한 뼘 사이만 두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스티아가 시선을 피했다.
“나 감기도 걸린 거 같아. 감기 옮아.”
“그깟 감기는 상관없어. 키스해 줘.”
에스티아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직도 뭐라 비유할 말을 찾지 못할 정도로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 외로웠다. 지금도 무서웠다. 따스한 온기가 필요했다.
에스티아가 한 손을 들어 그의 뒷목을 잡아당겼다.
두 입술이 진득하게 맞부딪혔다. 두 사람은 한동안 뜨거운 숨결을 나누었다.
에버하르트는 그러고서도 한참을 더 있다가 방을 나섰다.
그때까지만 해도 에스티아도, 에버하르트도 몰랐다.
그의 몸에도 똑같은 푸른 반점이 생겨나고 문양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에버하르트의 목숨이 위험해졌다는 것도.
* * *
궁 안의 분위기는 삼엄했다. 평소보다 싸늘하게 얼어붙은 듯했다.
로셸은 궁인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향했다.
“거기로 가면 내 딸을 볼 수 있는 건가?”
로셸이 거만하게 고개를 쳐들며 궁인에게 물었다. 그 궁인도 엄연히 백작가의 영식이었지만 상대가 감히 공작이라 아무런 대항도 할 수 없었다.
“전 그저 응접실로 각하를 모시라는 하명을 받았을 뿐입니다.”
“정말 그게 다란 건가?”
로셸이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궁인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어찌 폐하의 명을 거짓으로 전하겠습니까.”
“…….”
로셸은 궁인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한테 거짓을 고할 수 없다고 말한 게 아니었다.
로셸은 아무래도 궁인의 태도를 단단히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로셸은 궁인에게 손을 뻗었다.
“전하, 글레멘드 공작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하지만 궁인은 그 손을 교묘히 피해 응접실 문 앞에 당도했다. 그러고는 안에 있는 이에게 로셸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전하?’
로셸이 픽 웃었다. 굳이 안 들어도 어떻게 된 건지 그림이 그려졌다.
곧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 봐도 서늘한 얼굴. 여전히 로셸을 증오하고 혐오하는 눈빛은 기본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 안에 짙은 초조함과 두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로셸은 그걸 공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에버하르트 바일은 단 한 순간도 쉬운 상대였던 적이 없으니.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우리 사이에 쓸데없는 인사는 생략합시다.”
에버하르트가 싸늘하게 로셸의 인사를 거절했다. 그가 큰 보폭으로 로셸에게 다가왔다.
“각설하고 본론부터 얘기합시다, 공작. 에스티아를 잡아 가려고 온 겁니까?”
에버하르트의 눈동자에 살기가 감돌았다. 젊고, 강인하고, 사랑에 미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눈빛이었다. 로셸은 그 눈빛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잡아가다니요! 누군가가 ‘뺏어’ 간 제 딸을 찾으러 온 겁니다.”
“뺏어 가다니.”
에버하르트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언뜻 들으면 그저 웃는 거 같았지만 로셸은 온몸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대공이 딱 광인이 되기 직전인 거 같았기 때문이다.
“공작, 내가 그간 공작을 살려 둔 건 오로지 에스티아 때문이었습니다.”
에버하르트의 서늘한 목소리가 로셸의 마음을 압박하듯이 옥죄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그나저나 ‘제 딸’과 다시 사이가 좋아지셨나 봅니다?”
로셸은 ‘제 딸’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러지 않으면 뭔가가 잘못될 거 같았다. 자신보다 몇십 살이나 어린 대공에게 말린 게 굴욕적이었지만, 대공의 기세가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정말 자신을 죽일 거 같았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의 살기란 원래 이런 것일까. 분하지만 로셸은 대공의 기에 한없이 짓눌리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알 수 있었다. 저 남자가 저 정도로 마음을 통제 못 한다는 건 에스티아 상태가 그만큼 안 좋다는 걸 의미했다.
“전하, 에스티아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아이와 제가 무슨 일이 있었든, 제 아이입니다. 그러니 저는 제 딸을 찾으러 가 봐야겠습니다!”
“에스티아는…… 당신이 손가락 하나 건들지 못하게 할 겁니다.”
움찔. 로셸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에버하르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은 채.
“글레멘드 공작, 잘 들으세요. 당신이 2년 전, 전쟁 때 셰린포드 가문과 손잡은 걸 알고 있습니다. 인신매매를 하고, 죄 없는 병사들을 방패로 썼었지요.”
“…….”
로셸의 몸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대공이 길게 얘기하진 않았지만 그 짧은 말에 모든 것이 잘 요약되어 있었다.
명확한 증거가 없지 않냐 따지고 싶었지만 입을 열 수 없었다. 자신에게 그 행적을 알고 있다고 알린 건 그만한 증거가 있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이걸 본격적으로 공론화하게 되면 당신 딸을 데려오는 게 문제가 아닐 거라는 건 아시겠죠.”
“증…… 증거가…….”
“있다면요.”
에버하르트가 피식 웃었다. 증거라면 메르헨의 방과 연결된 창고에 있었다. 거기에 로셸이 인신매매로 셰린포드 공작에게 판 죄 없는 소년들이 갇혀 있었다. 그간 메르헨의 애인 행세를 하며 겨우겨우 알아낸 것들이었다. 이제 그 소년들을 찾기만 하면 됐다. 전쟁 때 방패로 희생된 생존자 병사를 찾는다면 더없이 좋았다.
“공작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내가 지금 에스티아에게 아주 미쳐 있다는 겁니다.”
차마 사이가 좋아졌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에스티아는 아직 그를 온전히 용서하지 않았다. 다만 그 말을 아예 부정하고 싶진 않았다. 어떻게든 좋아지게 만들고 싶었으니까.
“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더 빨리 패망의 길로 가시겠다면 굳이 막진 않겠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에스티아를 데려갈 순 없겠지만요.”
도대체 언제 이렇게까지 알아낸 걸까. 로셸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렸다.
“그리고 정부의 딸을 데려왔던데, 소용없는 짓은 하지 마세요. 글레멘드 가문은 이제 공작의 것이 아니게 될 테니까.”
에버하르트가 그 말을 끝으로 로셸을 지나치려고 했다. 로셸이 극비 정보를 입에 담으며 거들먹거리지 않았다면.
“……오늘은 이만 물러가지요. 어차피 전하께서는 곧 있을 전쟁에 나가실 테니, 에스티아는 제가 돌보게 되겠죠.”
으득. 에버하르트의 아래턱에 힘이 들어갔다.
폰스탄 왕국이 반기를 들었다. 어제 제 4국경지대 요새를 공격했고 이 사실은 차사를 통해 은밀히 극소수에게만 전달되었다.
“말했습니다, 공작. 에스티아에게 손끝 하나라도 댔다가는 가만두지 않겠다고. 원한다면 지금 그 말을 증명할 수도 있어요.”
에버하르트의 눈동자가 광기로 번뜩였다. 이러다 진짜 목이 날아갈 듯하여 로셸은 한발 물러섰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살, 살펴 가십시오, 전하.”
에버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문을 쾅 닫고 나왔다. 문을 닫으려던 궁인은 이도 저도 못하며 그 옆에 서 있었다.
‘개자식.’
에버하르트가 이를 악 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사지를 망가트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급한 게 있었다.
에버하르트의 발걸음이 어딘가로 다급히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