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 같은 증상
에스티아가 그 소식을 들은 건 앓아누운 지 딱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로셸은 틈만 나면 그녀를 만나려고 시도했지만 태후 레이첼에 막혀 번번이 실패했다. 궁이 제일 안전할 거라던 레이븐과 에버하르트의 말이 맞았다.
전쟁은 다행히 원작과 달리 몬터레이 제국에게 승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에스티아가 미리 대비한 덕분에 바뀐 미래였다. 레이첼은 아마 2주도 되지 않아 몬터레이 군대가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에스티아를 안심시켰다.
다행히 에스티아는 몸이 살짝 나아졌고, 레이첼은 병문안 겸 에스티아의 방으로 찾아온 참이었다.
“태후 폐하.”
아마 갑자기 시녀가 다급히 레이첼을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에스티아는 방심했을지도 모른다. 오스카가 아무리 비겁한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그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니 잠시 쉬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고.
“에스티아.”
하지만 레이첼의 가라앉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에스티아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눈치챘다. 레이첼이 주변 시녀들과 호위 기사들을 물리고 에스티아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무슨 일인가요, 폐하.”
에스티아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불길한 가정을 지우려고 애썼다. 미래가 바뀌었는데 그녀가 걱정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었다.
“대공의 상태가 좀 이상하다더군요.”
쿵. 에스티아의 심장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왜…… 왜요? 어디가 안 좋은데요? 부상이라도 당한 건가요?”
아직도 원망스러웠다. 사무칠 정도로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기억이 돌아오면서 사랑했던 마음까지 기억날 거라던 에버하르트의 말이 맞았다. 어머니가 아팠을 때 항상 옆에 있어 주던 기억까지 생각나 버렸으니까.
“다행히 부상을 당한 건 아닌데, 갑자기 쓰러졌대요.”
에스티아는 어깨에 두른 담요를 움켜쥐었다. 레이첼이 그런 에스티아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흑마법에 걸렸다고 해서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에스티아의 방으로 온 참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상태가 안 좋아질까 염려가 되었다.
“이유도 들으셨나요……?”
에스티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레이첼이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겨우 입술을 열었다.
“에스티아와…… 같은 증상을 보였다고 해요.”
에스티아가 벌떡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이안이 그녀 곁으로 달려왔다.
“아가씨! 갑자기 일어나시면…….”
“확실한 정보인 것이지요, 폐하?”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한 것이었지만 에스티아는 그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다행히 레이첼도 불쾌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 쪽 사람이 전한 정보이니 확실해요.”
“……아.”
에스티아가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안이 한쪽 무릎을 꿇고 에스티아의 안색을 살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반란이 거의 진압되어서 지금 처소에서 쉬고 계시다고 하는군요.”
에스티아가 두 주먹을 쥐었다. 오스카의 짓이다. 그 남자 말고는 다른 누구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에스티아, 뭔가를 알고 있는 거예요?”
레이첼이 에스티아의 반응을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
에스티아는 잠시 고민했다. 그동안 주변 사람이 위험할까 오직 에버하르트하고만 정보를 공유해 왔다. 그런데 처음으로 그것이 옳은 걸까 의심이 들었다. 에버하르트가 그녀와 단둘이서만 알고 있자고 말한 건 아니었지만 차마 다른 사람한테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폐하.”
“말해요.”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비밀로 한다고 좋을 게 없었다.
“폐하, 지금은 상황이 급박해 자세히 설명을 못 드리지만, 아무래도 오스카 후작의 짓인 거 같습니다.”
“오스카 후작이요?”
레이첼은 물론 이안도 놀라고 말았다. 다만 레이첼은 황족으로서 들은 정보가 있어 이안보다는 덜 놀란 편이었다.
“오스카 후작이 흑마법에 손을 댄 거 같다는 건 들으셔서 아실 겁니다.”
“알아요.”
레이첼이 차분히 답했다. 레이첼이 경청하자 에스티아가 더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
“오스카 후작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저에게 집착하고 있습니다. 이 저주는 오스카 후작이 건 게 분명해요. 이제는 에버까지…… 해치려는 거 같습니다.”
“…….”
레이첼은 잠시 에스티아의 말을 곱씹는 듯했다. 이안은 아연한 듯 그저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제 말이 허황된 것처럼 들린다는 걸 압니다. 근데 정말로…….”
“에스티아.”
레이첼이 흥분한 에스티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몸을 떨던 에스티아가 단숨에 잠잠해졌다.
“믿어요. 흑마법이라고 해서 무조건 오스카 후작이라는 건 아니지만, 현재 가장 유력한 자가 후작인 것도 사실이에요.”
에스티아가 고개를 숙였다. 이 순간에 자신의 말을 믿어 주는 어른이 있다는 사실이 큰 위안으로 다가왔다.
“자, 그래서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어요.”
레이첼이 에스티아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싱긋 웃었다. 마치 할머니처럼 따스한 손길이었다.
“……고위 마법사 한 분만 저에게 붙여 주세요. 같이 전장에 가 봐야겠습니다.”
“에스티아.”
“아가씨!”
레이첼과 이안이 동시에 펄쩍 뛰었다. 특히 이안이 기함하며 몸을 일으켰다.
“아가씨, 이성적으로 생각하세요. 지금 아가씨가 가셔 봤자 괜히 아가씨까지 위험해지실 뿐입니다.”
“나 그 어느 때보다도 이성적이야.”
에스티아가 이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같은 저주에 걸린 게 분명해. 그렇다면 당연히 내가 동행해야 그 저주가 뭔지 알 거 아냐.”
“하지만…….”
“걱정하지 마. 너도 데려갈 거니까.”
에스티아가 이안의 항변을 가볍게 막았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레이첼을 향해 섰다.
“도와주시겠습니까, 폐하?”
뒤에서 이안의 깊은 한숨이 들렸지만 에스티아는 모른 척했다. 레이첼이 에스티아의 작은 손을 꼭 잡았다.
“말했잖아요, 조이의 딸이 부탁하는 거라면 다 들어주겠다고.”
레이첼이 따스하게 웃었다. 에스티아는 다짐했다. 모든 일이 끝나면 레이첼에게 꼭 보답을 해야겠다고.
* * *
에스티아와 이안, 그리고 고위 마법사 젠은 두꺼운 우비를 두르고 빠르게 말을 몰았다. 고위 마법 덕분에 셋은 눈에 띄지 않고 금방 전장 근처로 올 수 있었다.
다만 이안은 쉬지 않고 에스티아를 살폈다. 겉보기엔 괜찮아 보여도 흑마법에 걸린 데다가 몸도 훨씬 약해진 게 티가 났다. 살도 며칠 사이에 확 빠졌고 안색도 곧 쓰러질 것처럼 창백했다.
이안은 몇 번 쉬고 가자고 했지만 에스티아는 고개를 저었다.
“쉬는 건 다녀와서도 충분해.”
단호한 음성에 이안의 제안은 번번이 거절당했다. 결국 최대한 빨리 다녀올 수밖에 없었다.
전장이 가까워질수록 에스티아의 마음은 초조해졌다.
주변은 전쟁의 끝이 다가오는 듯 기묘한 공허함과 고요함이 가득했다. 죽음으로 사라진 자리를 공백이 메꾼 듯한 느낌이었다.
“아가씨, 거의 다 왔습니다.”
젠이 말의 속도를 늦추며 에스티아에게 보고했다. 이안과 에스티아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젠은 고위 마법으로 숨겨진 막사를 찾아냈다.
젠은 섬광탄을 하늘로 쏘아 올랐다. 섬광탄은 파란빛을 뿜으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아군이 궁에서 뭔가를 전달하러 왔을 때 쏘아 올리는 섬광탄이었다.
곧 결계 한 곳이 흐려졌다. 그제야 이안과 에스티아의 눈에도 큰 막사가 보였다.
“저곳입니다.”
젠이 먼저 말을 몰아 앞장섰다. 그 뒤를 에스티아와 이안이 따랐다.
‘심각한 건 아니겠지.’
에스티아의 심장이 울렁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오스카에게 찾아가 저주를 풀어 달라 애걸하고 싶었다. 기억을 어느 정도 되찾아 온 이후로 에버하르트가 조금이라도 아픈 거 같으면 에스티아는 괴롭고 초조했다.
‘일단 에버를 만나야 해.’
에스티아는 떨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느새 셋은 결계를 통과하고 있었다.
“글레멘드 영애!”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붕대를 푸른 에이커가 그들에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에버는요.”
에스티아는 에이커를 보자마자 에버하르트의 안위에 대해 물었다. 잠시 당황하던 에이커는 바로 보이는 큰 막사를 가리켰다.
에스티아는 이안의 도움으로 내리자마자 막사로 달려갔다. 뒤에서 이안이 천천히 가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에스티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에버!”
에스티아가 천을 옆으로 젖히며 막사로 들어갔다.
“에버하르트…….”
에스티아의 눈동자가 촉촉해졌다. 에버하르트는 제복 겉옷만 벗은 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 근처에 기사 한 명과 의원 한 명이 그를 보살피고 있었다. 둘은 갑자기 영애가 들어오자 당황했지만 곧 에이커가 그녀를 소개하자 자리를 피해 주었다.
“에버 상태는요. 고위 마법사는 뭐라던가요?”
“고위 마법사는 아직 전선에 있습니다. 원래 전하께서는 전선 선두에 계셨지만 갑자기 쓰러지시는 바람에…….”
에이커가 침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에스티아가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에버하르트의 손을 잡으며 젠에게 부탁했다.
“젠, 전하의 상태 좀 봐 주실래요? 내가 걸린 저주와 같은지.”
“예, 알겠습니다.”
젠이 에버하르트의 머리맡에 섰다. 그러고는 한 손은 그를 향해, 한 손은 에스티아를 향해 뻗었다.
“좀 아프실 수 있습니다. 남작과 백작께서는 조금만 뒤로 물러가 계십시오.”
이안과 에이커가 잠시 머뭇거렸지만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바로 젠이 마력을 밖으로 뿜어냈다.
“윽!”
“아가씨!”
에스티아의 고통 어린 신음에 이안이 자동으로 반응했다. 그걸 에이커가 겨우겨우 뜯어말렸다. 물론 에이커도 에버하르트 옆에 딱 붙어 있고 싶었다. 에버하르트도 고통을 느끼는 듯 미간에 주름이 졌으니까.
온몸을 송곳으로 찌르는 느낌이었지만 에스티아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에버하르트는 그녀를 죽게 만들었지만, 그녀는 에버하르트를 죽게 하고 싶진 않았다. 아무리 원망스럽다 한들 똑같은 공포를 그가 겪지 않았으면 했다.
“……끝났습니다.”
얼마나 참았을까 눈부신 빛이 잦아들었다. 옆으로 쓰러지려는 에스티아를 이안이 받쳤다.
“……어때요? 같은 저주인가요.”
이안이 동생을 안듯이 에스티아를 껴안았다. 에스티아는 이안의 팔에 손을 올렸다. 왠지 젠이 무슨 대답을 할지 알 거 같았기 때문이다.
“아가씨만큼 심하진 않습니다. 다만…….”
젠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같은 저주가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