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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119화 (120/141)

119화 - 구원의 존재

에스티아가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이안이 에스티아를 위로하듯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을 짜야 했는데 오히려 그럴수록 머릿속이 하얘졌다. 바람이 천막을 세게 칠 때까지 에스티아는 이안의 품에 안겨 있었다.

튼튼한 천막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비야 계속 오고 있었지만 근래 들어서 이렇게 바람이 분 적은 처음이었다.

“뭔 바람이…….”

에이커가 당황해서 펄럭거리는 천막 문을 잠그려고 했지만 엄청난 강풍에 소용이 없었다. 그가 잡으려고 할수록 천은 그의 손에서 계속 빠져나갔다.

바람에는 꽃잎이 실려 있었다. 파란색 꽃잎과 빨간색 꽃잎이 섞여 천막 안으로 날아들었다.

“아가씨, 잠시만 이렇게 계셔 주십시오.”

에스티아는 대답 대신 이안의 팔을 꼭 쥐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계속 에버하르트에게로 향해 있었다.

바람은 한동안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다가 에버하르트의 눈썹이 움찔했을 때 갑자기 멈추었다. 그가 곧 깨어날 걸 아는 것처럼.

“하, 이제 문 좀 잠그…… 응?”

안도하던 에이커의 말이 뚝 멈췄다. 그의 시선이 문에서 아래로 향했다.

“왜 그러십니까?”

이안이 몸의 힘을 풀며 물었다. 에이커가 꽃잎이 흐드러진 바닥에서 무언가를 주었다.

“무슨 편지 봉투 같은 게…….”

별생각 없이 봉투를 주워 들던 에이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안이 몇 번이나 그를 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이안은 에스티아를 품에서 부드럽게 떼어 내고 에이커에게 다가갔다.

이안은 뭐에 그리 놀랐냐고 물으려고 했다. 밀랍에 찍힌 가문 문양을 보기 전까지는.

“아가씨.”

이안이 에이커에게서 편지 봉투를 뺏었다. 에스티아는 뭔가 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걸 직감했다.

“인장을 봐 주세요.”

이안이 작은 편지 봉투를 에스티아에게 내밀었다. 에스티아가 이안의 말대로 시선을 내려 편지 봉투를 바라봤다.

에스티아의 표정도 이안과 에이커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 인장은,’

“알아보시겠습니까?”

이안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물은 것이 아니었다. 차마 그가 먼저 그 이름을 꺼낼 수가 없어서였다.

“오스카 가의 문양이네.”

에스티아가 헛웃음 흘렸다. 이제는 하다하다 마법을 써서 자신을 미행하는 건가 싶었다. 젠은 이 상황이 당혹스러운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었다. 고위 마법사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술법이었다.

에스티아는 편지 윗부분을 그냥 손으로 찢어 버렸다. 흑마법을 쓰는 작자의 편지를 곱게 열어 볼 생각 없었다.

손이 떨렸다. 하지만 저주가 두 사람을 옭아매는 현실에서 이 편지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수려한 글씨체가 눈앞에 펼쳐졌다.

‘친애하는 에스티아에게.

결국 굴욕적인 사랑을 택하셨나 봅니다. 제 마지막 수가 먹혀든 것을 보면.

반란이 일어난 숲 근처에 제가 찾는 꽃 ‘암스테르담’이 있습니다.

암스테르담을 저에게 전해 주세요. 어차피 우리는 할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의 빅터가.’

에스티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편지는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꽃은 온 힘을 다해 짓밟고 싶었다.

그러나 꽃이 기억을 들려준 것처럼 어쩌면 이번에도 꽃에게서 얘기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더군다나 오스카 후작이 그녀를 통해서만 꽃을 찾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먼저 꽃을 찾아 거래를 해야 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질긴 연이 있는 거라면 저 남자는 좀 내버려 두라고.

“이안, 갈 데가 있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편지에 뭔가가 적혀 있는 겁니까?”

“빨리, 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까.”

에스티아가 편지지를 움켜쥔 채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안이 그녀 앞을 막아서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네, 알겠습니다. 일단 아가씨 숨 좀 고르시고요. 괜찮을 겁니다. 아시겠죠?”

에스티아는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이끌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젠과 에이커가 동시에 그들을 붙잡았다. 에스티아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안하고…… 잠시 뭔가를 찾을 게 있어요. 곧 돌아올게요.”

에스티아는 그 말만 남긴 채 이안과 막사를 나왔다. 그들은 곧바로 말을 올라탔다. 그리고 인근 숲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암스테르담.

에스티아는 그 꽃을 통해 오스카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겠다고 다짐했다. 이안은 능숙하게 말을 몰았다. 어느새 숲 입구에 도착했다. 비가 더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이안이 에스티아의 로브를 잘 여며 주었다.

에스티아는 이안의 도움을 받아 말에서 내리자마자 걸음을 옮겼다. 이안은 그런 에스티아가 쓰러질까 말을 나뭇가지에 매고 에스티아를 쫓아갔다.

오스카는 자신에게 기이할 정도로 집착한다. 그리고 거기에 꽃을 이용했다. 에스티아는 왠지 그 답을 암스테르담이 들려줄 거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또 브릴리언트와 핑크스를 찾았을 때처럼, 아주 금방, 찾을 거 같다는 예감도 들었다.

에스티아와 이안은 점점 더 깊이 숲으로 들어갔다.

“아가씨, 도대체 뭘 찾고 계신 겁니까.”

“꽃.”

“꽃이요?”

이안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물었다. 에스티아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응, 꽃.”

꽃 색은 아마 브릴리언트처럼 푸른색이지 않을까 싶어.

에스티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잠깐.’

에스티아의 시선이 문득 한곳에 고정되었다. 그곳에 정신을 집중하자 왜 같은 색이라고 생각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저거다.’

에스티아가 걸음을 빨리하다가 결국 뛰기 시작했다. 이안이 황급히 그녀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에스티아는 딱 푸른 기운을 뿜어내는 꽃 앞에 멈추어 섰다. 에스티아는 바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기억을 되찾은 이후로 에스티아의 머릿속엔 항상 에버하르트가 있었다. 지금 이 행동이 어쩌면 그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별로 두렵지 않았다.

‘부탁이야, 부탁이니까, 제발 쓸모 있는 기억을 나에게 들려줘.’

이안은 왠지 막아야 한다는 직감이 들어 몸을 굽혔다. 하지만 그의 손이 에스티아에게 닿기 전에 에스티아가 꽃을 움켜쥐었다.

꽃에 손이 닿기가 무섭게 전에도 꽃을 만졌을 때 들렸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에스티아, 이 병에는 ‘저주’가 들어 있어요.

-저주요?

-응, 그러니 이 저주를 잘 기억해 둬야 해요. 아무리 나라도 강한 저주를 오랜 시간 동안 병에 봉인해 둘 순 없어요. 어딘가에 봉인하려면 내 목숨을 걸어야 하거든. 그래야 내가 죽고 나서도 계속 봉인해 둘 수 있어요.

-안 돼요, 엄마. 죽지 마요.

“아가씨, 괜찮으세요!?”

이안이 다급한 몸짓으로 에스티아의 어깨를 흔들었다.

-무서워할 필요 없어요. 우리 티아는 저주에 죽지 않을 거야. 내가 널 지킬 거거든. 죽어서도…….

“아가씨!”

-만약 악마가 봉인을 풀면 어떡해요?

어린아이가 엄마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어 칭얼거렸다. 온화한 여인이 아이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악마는 찾지 못할 거야. 내 봉인은…….

여인이 사랑이 담긴 눈빛으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오로지 귀여운 천사만 찾을 수 있거든.

“난 괜찮아, 이안.”

“…….”

에스티아가 뺨에 흐른 눈물을 손으로 훔쳤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땅에서 꽃을 뽑았다.

“오스카 후작이…… 나에게 부탁했었어. 누군가에게 공격당해 마력이 꽃에 봉인되었고 자신은 그걸 찾을 수 없으니 나에게 찾아 달라고.”

“네? 그걸 왜 아가씨에게…….”

“나는 믿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 당연히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계속 찾아다녔어. 근데 이제 그 이유를 알 거 같아.”

에스티아가 꽃을 조심스레 품으로 안았다. 이안이 흘러내린 그녀의 옆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 사람의 마력을 봉인한 게 내 엄마였어, 이안. 우리 엄마가 ‘이조르’였어.”

“……그게 무슨…….”

이안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오스카 후작의 나이가 몇 살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고 했지? 아마 그때부터 흑마법을 썼던 거야. 이조르인 우리 엄마는 그걸 막으려고 했고, 그리고 저주는…….”

그때 어머니가 보여 줬던 저주의 기운. 그건 이 꽃 안에 들어 있는 기운과 같은 것이었다. 정말로 오스카가 그들에게 저주를 건 것이었다.

“이 꽃을…… 그 남자에게 주어서는 안 돼. 절대 안 돼, 이안.”

오로지 나로만 거래를 해야 해. 꽃을 주면 그자의 힘만 세질 뿐이야.

“이안, 더 말을 탈 수 있겠어?”

“네? 어디로 가시게요.”

에스티아가 시선을 내려 꽃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함정에 빠트린 존재이자, 구원의 존재가 될지도 모르는 꽃을.

“오스카 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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