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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120화 (121/141)

120화 - 언제나

몸이 묵직했다. 그의 마지막 기억은 반란을 거의 제압할 때쯤 몸에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죽을힘을 다해 버텼지만 막사에 도착할 때쯤 말에서 떨어졌다. 그걸로 기억은 끝이었다.

“전하!”

에버하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눈을 살짝 떴을 뿐인데도 옆에서 째지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에이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쓰러져 있었지?”

에버하르트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예상대로 에이커가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꼬박 하루 누워 계셨습니다. 나머지 잔챙이들은 다른 병사들이 알아서 처리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한번…….”

그래도 명백이 기사단장이었다. 에버하르트가 침상에서 일어나려는데 에이커 말고 다른 인기척이 느껴졌다.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그대는…….”

“젠입니다, 전하.”

젠? 이 제국에서 이 막사를 찾는 ‘젠’이라면 딱 한 명밖에 없었다. 황궁 소속의 고위 마법사였다. 근데 그가 왜 여기에 왔다는 말인가?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젠의 표정이 영 어색했다는 것이다. 자세히 보니 어쩔 줄 모르는 거 같았다.

“그대가 여긴 웬일이지? 황궁에서 무슨 일이 있나?”

“아뇨, 무슨 일은 없습니다만…….”

젠이 에이커를 한 번 쳐다보더니 말끝을 흐렸다. 에버하르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에이커를 바라보았다.

“에이커, 똑바로 말해.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 있었나?”

“그게…….”

이번에는 에이커가 젠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등줄기를 타고 싸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뭔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음이 분명했다.

“에이커.”

에버하르트가 다시 한번 에이커를 불렀다. 왠지 그의 상식선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 거 같았다. 에이커가 잠시 혀로 입술을 적시더니 숨을 훅 내뱉었다.

“그게, ……께서 다녀가셨습니다.”

“누가 다녀가?”

아직 현기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에버하르트는 그 고통마저 잊어버렸다. 에이커가 특정 부분에서 목소리가 작아지긴 했지만 분명히 들었다. 제대로 들은 게 맞다면,

“글레멘드 영애께서 다녀가셨습니다.”

“에스티아가?”

왠지 심장이 얼어붙는 거 같았다. 에버하르트의 고개가 젠 쪽으로 돌아갔다.

“자네를 데려온 게 에스티아인가?”

“……네, 그렇습니다. 전하의 상태가 영애의 상태와 유사하시다 전해 듣고 서는 태후 폐하께 저를 동행하게 해 달라고 부탁…….”

에버하르트는 끝까지 듣지 못했다.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뒤에서 젠과 에이커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에버하르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전속력으로 달려 그의 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에스티아가 왔다. 그리고 말도 없이 돌아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에버하르트는 큰 보폭으로 단숨에 말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 에이커가 그를 뒤쫓아 달려왔다.

“안 됩니다, 전하! 전하께서는 몸이 아직 회복…….”

“에스티아가 왔어.”

에버하르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에스티아가 있는 곳으로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금방 다녀올 테니, 대기해.”

에버하르트는 그 말만 남기고 말을 몰았다. 에이커는 황망하게 뒤에서 그가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행히 전쟁은 제국의 승리로 완벽하게 끝났다. 하지만 에이커는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될 거라는,

불길함을 느꼈다.

* * *

에스티아는 말의 움직임에 그저 몸을 맡겼다. 이안이 빠르게 말을 몰고 있었다.

어느새 말을 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잊었다. 지금 이 순간은 그녀가 타는 말에 총을 쏘는 기사도 없었다. 에스티아는 어쩌면 총처럼 실체가 있는 것보다도 보이지 않는 게 더 무서울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과 에버하르트의 관계에 오스카가 끼어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악마와의 지긋지긋한 인연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에버하르트를 끌어들인 게 아닐까.

그는 전생에 그녀의 죽음을 내버려 뒀다. 조롱했고, 경멸했다.

그 처음에는 그녀와 오스카가 있었다. 에스티아는 그 사실만 떠올리면 마음이 미어지는 걸 느꼈다. 기억은 잘 나지 않았다. 다만 에버하르트는 말했다. 그와 그녀의 사이가 틀어진 건 오스카 때문이라고.

‘만약 2년 전에 내가 그냥 에버를 놔줬더라면.’

왠지 모를 죄책감이 마음속에서 솟아났다. 에스티아는 그걸 누르려고 애썼다. 지금은 사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에스티아는 앞을 향해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

“……? 아가씨.”

그때 에스티아의 귓가에 이안의 목소리가 꽂혔다. 왜 불렀는지 의아하던 차에 그녀의 시선에 한 움직임이 잡혔다. 에스티아의 고개가 그쪽으로 움직였다.

‘에버?’

에스티아의 시선이 말을 타고 달려오는 남자에게 고정되었다. 이안이 에스티아가 놀라지 않게 조심히 말을 멈췄다.

“에스티아.”

에버하르트가 맞았다. 그들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는 누가 봐도 에버하르트였다.

“어떻게…… 당신은 지금 쉬고 있어야…….”

에버하르트가 훌쩍 말에서 내렸다. 그가 에스티아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어디 가는 거지?”

에버하르트가 그들 앞을 막아서듯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냈다. 에스티아는 하는 수 없이 이안의 도움을 받아 말에서 내렸다. 그 순간까지도 에버하르트의 시선은 에스티아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왜 왔어.”

“그러는 당신은 왜 왔다가 말없이 가는데.”

차분한 에스티아와 달리 에버하르트의 말투는 날이 서 있었다. 에스티아가 시선을 내렸다. 길가의 풀 사이로 작은 꽃이 피어 있었다.

“당신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어. 상태만 보고 가려고 했어.”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보러 왔는데.”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에게로 바짝 다가섰다. 그의 숨결이 에스티아에게 닿았다. 에스티아가 다시 시선을 피했다.

“아직 확실하진 않아. 내 상태랑 당신 상태가 비슷하다고 들어서, 신경 쓰여서 왔을 뿐이야.”

“대강 들었어. 저주 같다고. 에스티아, 왜 나한테 솔직하게 얘기를 안 해.”

에버하르트가 평정심을 잃고 에스티아의 어깨를 붙들었다. 에스티아가 그제야 시선을 들었다.

“내가 잘 해결하고 있을게. 당신은 어서 조금이라도 쉬고 마무리하고 와야지.”

“이대로는 못 보내겠는데.”

“그럼 나 계속 전쟁터에 있을까?”

에버하르트가 물러설 기미가 없자 에스티아가 일부러 매섭게 내뱉었다. 에버하르트의 손이 움찔했다.

“나라도 가서 사람들과 해결 방법을 찾아야지. 걱정하지 마. 위험한 짓 안 할 테니까.”

“해결 방법을 찾는다면서 왜 젠은 두고 갔는데.”

에버하르트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에스티아의 시선이 흔들렸다.

“위험한 짓 안 할 거라고? 그런 거라면서 왜 도망치듯 날 피한 건데!”

에버하르트는 이제 완전히 동요하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한숨이 나왔다.

자기도 저주에 걸린 걸지도 모른다는데 지금 그건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이러니 자꾸 바라게 된다. 에버하르트가 사실은 그때 날 구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고.

“피한 거 아니야.”

“거짓말……!”

“에버하르트.”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이려던 에버하르트가 뚝 멈췄다. 그녀가 이름을 부르니 더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어떤 마법보다 강력한 주문이었다.

“내가 해결할 수 있을 거 같아, 어쩌면.”

“어쩌면?”

에버하르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에스티아는 그가 뭔가를 더 지적하기 전에 그의 뺨에 손을 얹었다. 옅은 녹색 눈동자에 혼란이 가득 찼다.

“에버하르트, 난 아직도 많은 게 기억이 나지 않아. 여전히 난 당신이 내 죽음을 방관했다고 믿고 있어.”

그가 직접 처형을 청원했다는 원작과는 달라도 그는 그녀의 죽음을 방관했다.

“그런데도 난 당신에게 다른 사정이 있었다고 믿고 싶을 만큼, 사실은 그게 아니라고 믿고 싶기도 해.”

“…….”

에스티아의 솔직한 고백에 에버하르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왠지 지금 말을 가로막으면 안 될 거 같았다.

“당신 추측이 맞았던 거지. 기억이 돌아오니 미련과 사랑도 생각난 거지. 그러니까 내 말은 당신이 아프면 아직도 난 이성을 잃기 충분하다는 거야.”

에버하르트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토록 진실하고 담담한 고백을 듣는 건 2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기뻐해야 마땅한데 마음은 미치도록 불안했다. 그녀가 환각처럼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질 거 같았다.

“그러니까 나 좀 믿어 줄래. 당신이 전쟁에서 돌아오면 곧, 우리 만나게 될 텐데.”

시린 미소였다. 왠지 지금 당장 움켜쥐지 않으면 영원히 잃어버릴 거 같은 미소였다.

“안 믿을 거야?”

에스티아가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사실은 믿을 수 없다고 하고 싶었지만 그가 해야 할 답은 하나뿐이었다.

“믿어.”

“그러면…….”

에스티아가 까치발을 들어 에버하르트의 목을 껴안았다. 촉촉한 느낌이 그의 입술 위에 와 닿았다. 그는 그 의미를 미처 생각할 틈도 없이 갈증 난 사람처럼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쉬지 않고 여린 입술을 핥는 와중에도 혹시라도 그녀가 도망갈까 에버하르트는 그녀를 꽉 껴안았다. 그러고는 살짝이라도 떨어질라 격렬하게 입을 맞췄다.

“읍.”

에스티아가 숨이 찬 듯 소리를 흘렸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혀를 쓸어 올리고 두 입술로 빨고 머금었다. 이러다 혀를 뽑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과격했다.

에스티아는 여전히 숨이 찼지만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뜨거운 욕망이 서늘한 마음을 데워 주는 듯했다. 에스티아는 그 기분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아.”

그녀의 입 안에서 혀를 움직이는 와중에도 에버하르트가 야릇한 신음을 뱉었다. 그러자 에스티아가 그를 더 꽉 껴안았다.

“에버.”

에스티아가 그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가 많이 좋아해.”

“……티아.”

“언제나 좋아하고 있어.”

에스티아가 간절하게 에버하르트의 귓가에 고백을 속삭였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고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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