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 비극의 씨앗
오랜만에 방문한 오스카 저택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흐드러지게 펴 있는 장미 꽃밭. 정문은 마치 그녀가 올 걸 안 것처럼 열려 있었다.
현관 앞에는 집사 안셀이 고요한 얼굴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안이 말을 멈춰 세웠다.
“아가씨, 정말 다른 방법이 없겠습니까?”
“이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야.”
에스티아가 이번에는 이안의 도움을 받지 않고 말에서 내렸다. 이안이 말을 어디에 묶어 둘 생각도 하지 못하고 에스티아를 따라왔다. 안셀이 현관 계단을 내려왔다.
“후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에스티아는 대답하지 않고 안셀을 지나쳐 갔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자 현관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안셀이 따로 어디로 가라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에스티아는 자연스럽게 응접실로 향했다. 그러고는 문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아당겼다. 큰 힘을 들이지 않았는데도 문은 쉽게 열렸다.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의 등이 보였다. 오늘은 차도, 디저트도 없었다. 그저 오만하게 다리를 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남자만 있을 뿐이었다.
에스티아가 걸음을 옮겨 오스카 앞에 섰다. 오스카가 천천히 고개를 위로 올렸다.
“오셨습니까?”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뻔뻔한 얼굴을 한 대 치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당신 짓이죠. 우리한테 끔찍한 저주를 건 사람. 당신이죠?”
“‘우리’?”
오스카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우리’에는 누가 포함된 겁니까?”
“우리 엄마랑 나, 그리고…… 에버하르트.”
“아 기억을 못 찾는 게 더 다루기 쉬울 거 같았는데. 역시 기억을 찾으셨나 보군요.”
오스카가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찼다. 마치 연극을 하는 것처럼 과장된 움직이었다.
“수작질을 걸긴 했죠. 많은 희생이야 따랐지만.”
“희생?”
“저주가 그냥 나오는 건 아니죠, 에스티아.”
에스티아가 흠칫 몸을 떨었다. 이안이 살기를 품고 보호하듯 에스티아 옆에 섰다.
“희생이라니 무슨 말이에요.”
“저주는 마력이나 생명력을 대가로 합니다. 물체를 통해 서서히 저주를 주입하는 형식이죠.”
물건?
에스티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무슨 물건을 갖고 왔었…….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에스티아의 머릿속에 한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 꽃이 무슨 꽃인지 아십니까.
-튤립이네요…….
-맞습니다.
“설마 꽃?”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물었다. 그리 멍청하게 당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맞습니다.”
하지만 오스카는 그때와 똑같은 대답을 했다. 에스티아가 두 손을 불끈 쥔 채로 경악했다.
“당신 목적이 뭐야. 나야?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당신이 나한테 청혼했었다고 들었어. 목표가 나야?”
이 남자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과거의 기억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에스티아는 이안을 통해 그가 그녀에게 청혼을 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목표가 나면, 나 하나만 괴롭게 하면 되지, 왜 에버를 건드려!”
“이야, 대공이 하나는 맞췄군요. 기억이 돌아오면 마음도 돌아온다.”
에스티아의 분노에도 오스카는 태연했다. 오히려 기분 좋아 보이기도 했다.
“꽃이 기억의 기폭제라는 걸 알고 있었죠.”
“우리 엄마가 봉인한 거니까?”
더는 정중하게 대할 필요가 없었다. 에스티아가 오스카를 맹렬히 노려보았다.
“기억 못 하면 기억 못 하는 대로 대공과 멀어질 거라 생각했고, 하면 하는 대로 멀어질 거라 생각했죠. 사실 모든 게 도박이었습니다. 혈육의 봉인이니 그것의 영향으로 과거가 떠오를 수가 있겠구나 짐작만 했을 뿐이죠.”
“설마, 다른 도박이 저주야?”
에스티아가 허탈하게 물었다. 오스카가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가 알아채서 기쁜 것처럼.
“그럼에도 당신들의 인연이 질기니까 저주 하나 걸어 놓았죠.”
“그게 병들어 죽어 가는 건가?”
나름 확신을 갖고 물은 건데도 오스카는 답이 없었다. 그러다 불현듯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이안이 본능적으로 에스티아 앞을 살짝 가로막았다.
“착각하지 마세요, 에스티아. 겨우 그런 저주를 걸진 않아요.”
겨우.
그 단어가 화살촉처럼 심장을 파고드는 거 같았다. 에스티아는 잠잠히 오스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겨우 그런 게 아니에요. 저주도 얼마든지 전염병이 될 수 있답니다.”
“아…….”
에스티아의 심장이 아래로 쿵 떨어졌다. 전염병.
“저주가 옮는 거라고?”
나름 침착하게 말하려고 한 건데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오스카가 더 바짝 다가왔다. 이안이 그를 죽일 듯이 쳐다보았다.
“에스티아, 난 당신을 죽은 시체로라도 가지려고 해요. 그러려면 ‘사랑하면 불치병에 걸려 죽는 저주’, ‘사랑하면 할수록 상대에게 그 저주가 옮는 저주’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요?”
“라 빅터 오스카!”
이안이 참지 못하고 사납게 외쳤다. 그걸로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결국 오스카의 멱살까지 잡았다.
“이 미친 새끼. 네놈 정체를 알았을 때 바로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당신 주인이 살이 썩어 죽었을걸?”
“이 개새끼가!”
이안이 한 손은 여전히 멱살을 쥔 채로 주먹을 쳐들었다. 주먹은 그대로 하얀 얼굴에 처박혔다.
오스카의 몸이 홱 돌아갔다. 살인적인 강도였는데도 오스카는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이안이 칼을 빼들려는 걸 에스티아가 막았다. 이안은 지금 이성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아마 그녀가 말리지 않았다면 바로 목을 벴을 것이다.
“라 빅터 오스카.”
에스티아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는 오스카에게로 다가섰다.
“우리 엄마가 당신을 봉인한 건 그때부터 더러운 마법에 손을 댔기 때문이겠지. 그러니 이제 각설하고 원하는 걸 말해. 괜히 애꿎은 사람 끌어들이지 말고.”
“말 잘했습니다. ‘애꿎은 사람’, 그게 에버하르트 바일이지요.”
“그 이름…….”
“좋죠. 거래를 합시다.”
오스카는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말라는 에스티아의 말을 가볍게 끊었다.
“첫째, 저주의 존재를 대공에게 말하면 저주는 완전히 그 작자에게 옮겨 갑니다. 둘째, 저주는 붙어 있을수록 사랑하는 상대에게 옮겨 갑니다.”
에스티아와 이안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오스카가 그런 그들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많은 대가가 필요했습니다. 누군가의 마력, 다른 누군가의 생명력. 이 영광을 셰린포드 영애에게 돌립니다.”
“설마 메르헨의 몸이 약해진 게…….”
에스티아의 마음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이미 그녀가 흑마법에 손을 댔다는 걸 에버하르트에게 들었지만 막상 오스카와 손을 잡았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하지만 에스티아는 곧 다음 이어지는 생각에 더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설마 메르헨이 영애들을 납치한 것도.’
에스티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몰려오는 충격적인 진실들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참 그런 거 보면, 2년 전만 해도 영애가 이렇게 바보 같아질 줄은 몰랐죠.”
‘2년 전’. 그 단어에 에스티아의 고개가 번뜩 움직였다.
“그때…… 내가 당신하고 그 사람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당신은 알지.”
에스티아가 다급하게 물었다. 이제는 알아야 했다. 이 악마 같은 남자를 통해서라도 알아야 했다.
“그럼요, 알죠. 에스티아.”
오스카가 허리를 숙였다. 겨우 한 뼘의 거리만 두고 그의 시선과 높이가 같아졌다.
“2년 전, 난 당신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어요. 당신 어머니를…… 살려 주겠다고.”
“뭐?”
되물은 목소리는 에스티아가 아니었다. 이안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꺼낸 말이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든 병든 당신 어머니를 살리고 싶었고, 난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당신 어머니를 살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흑마법으로. 당신은 승낙했죠.”
“내 어머니는, 그냥 평범하게 병든 게 아니었지?”
“뭐, 제 영향이 아예 없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오스카가 여전히 여유를 부리며 대답했다. 에스티아는 그 말이 곧 ‘긍정’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아마 당신 어머니에게 더 힘이 남아 있었다면 제 힘을 더 봉인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전 이 자리에 없었겠죠.”
이제는 아예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회포 푸는 것처럼 오스카는 즐겁게 얘기했다.
“어머니가 아주 오래전에 검은 기운을 보여 준 적이 있었어. 그게 당신의 것이라는 걸 내가 알았다면…….”
“알았으면 뭐요? 아버지의 학대, 사랑하는 사람의 버림. 당신은 그저 사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어요.”
오스카가 다 안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대공도 참 속이 좁아요. 결국 당신은 내 제안을 거절했는데도 당신을 외면하더니.”
오스카가 일부러 얼굴을 찌푸렸다. 에스티아는 그 표정이 너무나도 혐오스러웠다.
“……당신은 뭘 제안했는데?”
에스티아의 목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악마였다. 어머니가 막으려고 한 악마가, 그녀의 딸에게 가서 어머니를 살려 주겠다고 지껄인 것이다.
에스티아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있었다. 에버하르트는 말했다. 그녀가 오스카 후작과 손을 잡고 그의 뒤통수를 쳤다고.
‘제발.’
에스티아가 속으로 속삭였다. 제발, 끔찍한 짓이 아니어야 한다. 아니어야 한다.
“당신은 승낙했죠. 꽤 어려운 제안이었는데.”
오스카 후작이 소름 끼치는 웃음을 토해 냈다.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오스카 후작의 입이 다시 서서히 벌어졌다. 그녀가 믿을 수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어머니를 살리고 싶으면,”
오스카의 입술이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에버하르트 바일을 죽일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
“순진한 소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렇게 하겠다고 답해 버렸답니다. 누가 듣고 있는 줄도 모르고!”
하하하!
오스카 후작이 허리를 숙여 가며 광기 어린 웃음을 토했다. 에스티아도, 이안도 그 웃음을 멈추게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누가 듣고 있었는지는 말 안 해도 알 거 같았으니까.
“자, 에스티아.”
오스카가 눈가의 눈물을 닦으며 다시 몸을 폈다. 아직 웃음의 잔재가 사라지지 않은 듯 여전히 웃는 상이었다.
“당장 당신 개가 갖고 있는 내 꽃 내놓고, 에버하르트 바일을 버리고 오세요. 죄책감으로 다시 그 남자 받아 줄 생각하지 말고.”
이게 내 조건입니다.
오스카가 나지막이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