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 무죄
그쳤다고 생각할 만큼 땅으로 내려오는 비가 적어지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터덕터덕 흙길을 걷고 있었다. 이안은 그 뒤로 말고삐를 쥐고 따라오고 있었다.
차라리 지독히도 뻔뻔하거나 멍청했더라면 좋았을까. 그랬다면 자신이 그랬을 리 없다고 아득바득 우기거나 그런 일 기억나지 않는다고 회피할 수 있었을까.
“이안.”
에스티아의 걸음이 멈췄다. 이안이 말고삐를 잡은 채로 옆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에스티아가 무슨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 에스티아는 그동안 감추어 왔던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나 사실 빙의한 거야. 한 번 죽어서 다른 세계에 갔다가 다시 이 몸에 빙의한 거야.”
에스티아는 마치 고해 성사를 하듯 말을 이어 갔다.
“엄마가 오스카의 마력을 봉인한 꽃 때문에 기억이 드문드문 돌아오긴 했지만, 그전에는 그마저도 없었어.”
이안은 너무 놀란 나머지 반응을 하지 못했다. 에스티아의 눈가에 슬픔이 가득 차올랐다.
“오스카가 시간을 되돌려서 다른 세계에 있던 내가…… 다시 돌아왔는데…… 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볼을 타고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에스티아의 몸이 점차 떨리기 시작했다. 에스티아가 몸을 돌려 이안의 팔을 꼭 붙잡았다.
“내가 엄마를 살리겠다고 그 사람을 죽이려고 했대.”
“……오스카가 거짓말하는 걸 수…….”
“기억이 났어. 아까 암스테르담을 오스카에게 건넬 때, 다른 기억이 흘러들어왔어.”
“…….”
에스티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까 암스테르담이 들려준 기억이 다시 생각났다.
-에버, 내가…… 내가 그게…… 차를 선물받아서, 같이 먹고 싶어서 가져왔어.
그 기억 속의 에스티아는 몸을 떨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에스티아는 에버하르트에게 독이 든 차를 내밀면서도 내심 그가 알아차려 주길 바랐다. 그래서 그녀에게 욕을 하더라도 마시지 않았으면 했다.
에스티아가 이안의 품에 몸을 기댔다. 흐느낌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내가 에버하르트에게 독을 내밀었어.”
“…….”
“그게 기억이 나 버렸어.”
숨이 차고 몸이 떨렸다. 에스티아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이안은 그저 에스티아를 꼭 안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작은 등을 토닥토닥 다독였다.
“그걸 그냥 마시려고 하는 거…… 내가…… 막았어……. 에버는 알고도…….”
에스티아가 아이처럼 울음을 쏟아 냈다. 이안은 더 힘을 줘 에스티아를 안아 주었다.
유추하기 어렵지 않았다. 눈치채고도 당해 주려던 그를 그녀가 막았다. 그는 자신을 지금 죽게 하려는 게 아니라면, 평생 자신의 원망을 받아 줄 수 있느냐고도 물었다.
근처 나무에서 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새의 지저귐은 낭만적으로 묘사되곤 했다. 귀족 영식이 영애에게 바치는 상투적인 시에 흔히 등장하듯이.
상황이 비극적이면 달라지는 걸까. 우리 아가씨의 삶은 행복하기만 한 그 시들처럼 상투적일 수는 없는 걸까.
이안은 그런 슬픈 마음이 들었다.
* * *
반란은 허무하게 진압되었다. 폰스탄 왕국과 소규모 왕국들은 승기가 제국 쪽으로 기울자 바로 항복했다. 제국은 왕국들의 왕족들을 전부 다 폐위시켰다. 폰스탄 왕국을 제외하고 기타 작은 왕국들은 제국의 지방 지역으로 편입될 예정이었다.
유일한 기회는 진압이 거의 마무리될 쯤에 기사단장이 갑자기 말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주변 병사들과 기사들은 다 아연실색했다.
하지만 다행히 에버하르트는 무사했다. 정확히는 반란군들에게 당한 것이 아니었다.
“전하.”
에이커가 에버하르트 근처로 다가왔다. 에버하르트는 황궁에서 제공해 준 손님방 창가에 서 있었다. 시선에 초점이 없었다.
“남작님 말대로 영애께서는 그저 쉬고 싶은 걸 겁니다.”
에이커가 옆에서 애써 그를 달랬지만 에버하르트는 미동도 없었다.
에버하르트는 궁으로 복귀하자마자 에스티아에게로 달려갔다. 다만 그 전에 어떻게 알았는지 레이븐의 호위 기사가 다가와 황제 폐하를 먼저 알현해야 한다 일렀다.
그마저도 지나칠 생각이었다. 어떤 벌을 받더라도 에스티아의 얼굴을 봐야 했다.
만약 이안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기사단과 병사들이 황궁으로 복귀한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이안이 에버하르트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안의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예리한 에버하르트마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가씨께서 지금은 피곤하시다고 혼자 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전하께서 오시거든 걱정하지 마시라는 말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단가?”
“네.”
이안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반면에 에버하르트는 체통이고 뭐고 에스티아를 보고 싶었다.
다만 억지로 방문을 열면 더 미움을 받을까 봐 두려웠다. 저주고 뭐고 그 모든 걸 견디고 돌아온 이유는 전부 에스티아 때문이었다. 그녀가 없으면 안 됐다.
궁으로 돌아오니 그녀가 자신을 외면한다는 것만큼 끔찍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바로 에스티아와 오스카가 곧 정혼하게 될 거라는 소문이었다. 에버하르트는 그 소문을 외면하듯 방으로 향했다.
그렇게 방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내일이면 황궁에서 승전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궁은 한껏 들떠 있는 분위기였다. 한없이 내려앉는 그의 마음과 달리.
“전하, 전할……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뭔데.”
혹시라도 에스티아와 관련된 것일까 봐 에버하르트의 입술이 겨우 움직였다.
“글레멘드 공작이 저택을 비웠다고 합니다. 집사와 기사들을 데리고요. 아무래도 덜미를 잡힌 게 불안했나 봅니다.”
“셰린포드 공작과 어디서 바쁘게 머리를 굴리고 있겠지. 승전식에는 안 오겠어.”
에버하르트의 시선이 여전히 창밖을 향했다. 분명 황궁으로 에스티아를 찾으러 온 날 자신이 한 말 때문일 것이다. 보나 마나 칼 셰린포드와 서로 숨긴 게 없는지 다투고 있을 것이다. 당분간은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에스티아에게도 전해 줘. 당분간 안심해도 된다고.”
“전하.”
“…….”
말을 끝맺자마자 에버하르트는 다시 상념에 빠져들었다. 온통 에스티아가 가득 찬 상념이었다.
“……승전식…….”
“네?”
에이커가 알겠다 답하며 물러가려 할 때, 에버하르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승전식에도…… 오냐고 물어봐 줘.”
에이커의 마음도 깊게 가라앉았다.
슬펐다. 그의 주군은 항상 당당했다. 저렇게 무언가를 부탁하듯이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왠지 감히 위로해 줄 수 있는 슬픔이 아닌 거 같았다. 에이커는 그저 허리를 숙이고는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손님방에는 이제 에버하르트 혼자만 남았다.
에버하르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에스티아는 지금 그를 피하고 있었다. 그때 어디 가냐고 물어보지 않은 게 실수였다.
꼭 불지옥만이 지옥은 아닌 모양이다. 어찌 되었든 전쟁에서 사지 멀쩡하게 돌아왔는데도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유령이 되어 떠돌더라도 에스티아가 그를 버리지 않는다면, 잊지 않는다면 차라리 그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마음에는 불안이 가득했다.
‘왜 이러지.’
에버하르트가 가슴 위로 손을 올려 보았다.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고 있었다. 마치 눈앞에 있는 비극을 경고하듯이.
-오스카가 시간을 되돌린 게 맞았어. ……당신이 날 죽였어.
숨이 가빠져 왔다. 눈앞이 흐려졌다. 뭔가가 차올라서 그런 건지 어지러워서 그런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에버하르트의 몸이 통유리를 타고 아래로 서서히 무너졌다.
다리에 차가운 대리석이 느껴졌다. 에버하르트가 창에 머리를 기댔다.
에스티아는 그와 멀어지는 게 오스카가 원하는 바라며 그를 쳐내진 않았지만 에버하르트는 안심할 수 없었다.
증명해야 했다. 자신이 그녀를 죽였을 리 없다는걸.
‘하지만 어떻게.’
짙은 절망이 파도처럼 마음에 들이닥쳤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에 ‘일어났던’ 일을, 그 미래에서 ‘저질렀던’ 일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무죄를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
에버하르트는 입을 틀어막고 숨을 천천히 쉬려고 애썼다. 에스티아가 알려 준 대로 ‘후, 하, 후, 하’ 하고 숨을 쉬려고 노력했다.
“전하.”
다행히 에이커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어느 정도 숨이 진정되어 있었다.
“들어와.”
열린 문틈으로 경악한 에이커의 얼굴이 보였다. 에버하르트는 괜찮다는 듯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에이커가 안절부절못하며 몇 번이고 괜찮다고 묻다가 겨우 진정하고 본론을 꺼냈다.
“내일…… 승전식에 오신다고 합니다. 파트너는…… 남작님하고 오신다고…….”
“그래…….”
그 와중에도 마음속에서 질투의 불씨가 솟았지만 그보다도 안심이 되는 게 더 컸다. 내일이면 드디어 에스티아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글레멘드 공작의 정보도 전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외에는?”
에버하르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속안에는 깊은 애절함이 묻어 있었다. 에이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없었습니다.”
“…….”
에버하르트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에스티아의 방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리고 왜 자신을 피하냐, 당신이 보고 싶다 외치고 싶었다.
“그래, 알겠어. 나가 봐.”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참을 수밖에 없었다. 에스티아를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에이커가 나가고 난 뒤에도 에버하르트는 한동안 창가에 앉아 있었다.
내일이면, 내일이면.
끊임없이 되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