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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123화 (124/141)

123화 - 미안해

궁은 들뜬 분위기로 술렁거렸다. 반란이 예상보다 훨씬 빨리 진압되어 모두가 들떠 있었다. 궁인들은 회장과 복도를 바삐 오가고 있었다. 이미 연주자들은 악기를 켰고, 몇몇 귀족들이 입장한 상태였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깔끔하게 머리를 넘긴 이안이 에스티아를 향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에스티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적어도 에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히 예상은 가니까.”

이제 이안은 에스티아의 비밀을 전부 알고 있었다. 그녀가 다른 세계에 있다 왔다는 것도, 그 이유가 죽음이라는 사실도.

이안의 눈에는 에스티아가 한없이 위태로워 보였다. 이안도 오스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만약 당신이 대공을 제대로 버리고 오면 대공만큼은 저주에서 벗어나게 해 주겠습니다.

에스티아가 오스카에 그저 순응하는 것은 아니었다. 반격을 하려면 일단 장단에 맞춰 줘야 했다.

“이안.”

“네, 아가씨.”

이안이 에스티아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는 장갑을 낀 손으로 작은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오스카를 어떻게 제압하더라도, 만약에 정말로…… 에버와 내가 악연이면 어떡하지.”

“……에스티아.”

이안이 옛날처럼 그녀를 ‘아가씨’가 아닌 ‘에스티아’라고 불렀다. 그녀가 울 때마다 나오는 이안의 버릇이었다. 그녀의 눈가에 가득 눈물이 고였다.

“그렇잖아, 우리는 서로를 죽이려고 했고, 죽였어. 에버는 방관한 것뿐이겠지만 그렇다고 크게 달라지진 않아.”

에스티아가 한 손을 들어 눈물을 살짝 찍어 냈다. 곧 사교회장에 입장하는데 울 수는 없었다.

“물론 내가 먼저 에버를 배신했어. 그건 부정할 수 없어. 근데 도저히 괜찮을 거라고 합리화를 할 수가 없어. 모든 비극이 내 죄악에서 시작한 걸지라도.”

“아가씨에게서 시작한 게 아닙니다. 아가씨의 마음이 약해진 틈을 타 끔찍한 제안을 한 그 빌어먹을 놈이 잘못한 거예요.”

이안이 곧바로 에스티아의 말을 정정했다.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에스티아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가씨, 잘 들으세요. 아가씨의 잘못이 없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다만 아가씨가 그런 결심을 하게 만든 그놈이 정말 쳐 죽일 놈이라는 겁니다.”

이안의 위로는 에스티아에게 진정제가 되어 주었다. 마음이 썩는 느낌이 조금 잦아들었다.

“아가씨, 힘든 고비가 남아 있지만 어느 순간이든 제가 옆에 있겠습니다. 아시겠죠? 괜찮을 겁니다.”

이안이 에스티아의 손등을 다정하게 두드렸다. 에스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그럼 가실까요?”

몸을 일으킨 이안이 에스티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스티아가 그 손을 잡았다.

* * *

잘 갖춰 입은 시녀가 두 사람을 회장으로 인도했다. 회장이 점점 가까워지자 음악 소리와 사람들이 이야기 나누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렸다.

“아가씨.”

“응, 준비됐어.”

에스티아가 작게 속삭였다. 심장이 콩콩 뛰었다. 이안은 그런 에스티아를 잠시 바라본 뒤 문 옆에 서 있는 기사에게 눈짓했다. 두 기사가 신호를 주고받았다.

“글레멘드 공작 영애와 웬트워스 남작님께서 드십니다.”

회장 문이 활짝 열렸다. 음악 소리가 파도처럼 두 사람을 덮쳤다.

동시에 회장에 있는 모든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 에스티아는 그 시선에 위축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악녀, 약혼, 가문 간의 불화, 부상 등등 그녀에게 여러 가지 소문이 떠돌았다. 하지만 더는 그거에 기죽지 않을 만큼 강해졌다. 에스티아는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귀족들은 차마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한 채 숙덕거렸다. 어디서는 아직 그녀의 팔에 감겨 있는 붕대를 얘기하기도 하고, 그녀가 입고 있는 흰색 드레스에 대해 떠들기도 했다.

“다 개소리라는 거 아시죠?”

이안이 허리를 숙여 에스티아에게 속삭였다. 그제야 에스티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나타났다.

“응, 알아.”

에스티아의 눈에 입을 가리고 그녀를 훑어보는 귀족 남성들, 부채를 팔락거리며 그녀를 곁눈질하는 여성들이 보였다.

악사들은 귀족들을 다른 세상 보듯 신경 쓰지 않고 열심히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에스티아와 이안은 일부러 문가에 섰다. 이곳에 온 목적은 다른 귀족들처럼 가식을 떨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곧 기사단이 들어올 겁니다.”

“응.”

에스티아가 두 입술을 꾹 다문 채 대답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물이라도 드시겠습니까, 아가씨?”

“아니, 괜찮아.”

음악과 사람들의 말소리가 쉬지 않고 들렸지만 하나도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에스티아는 숨을 고르며 1부터 10까지 세는 과정을 반복했다.

-당신의 정혼 상대는 이제 대공이 아니라 내가 될 겁니다.

중간중간 끔찍한 목소리가 생각났지만 에스티아는 애써 그 목소리를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그렇게 되새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행히 그녀에게 말을 걸어 오는 귀족은 없었고 에스티아는 누구의 방해도 없이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황제 폐하와 기사단 드시옵니다!”

하지만 미약한 노력은 기사의 한 마디로 와장창 깨져 버렸다.

이번 승전식은 이례적으로 황제와 황실 기사단이 함께 입장했다. 문이 활짝 열리고 화려한 제복을 입은 황제와 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굳이 시선을 헤맬 필요도 없었다. 에버하르트는 황제 레이븐 바로 뒤에 있었으니까.

에버하르트의 시선이 곧장 에스티아에게로 향했다. 마치 그녀가 거기 있을 거라는 걸 미리 알았던 것처럼.

귀족들의 박수 소리가 쏟아졌지만 에스티아는 미동도 없이 에버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건 에버하르트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이리 반겨 주어서 기쁩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이들이니 많은 축하의 말 부탁드립니다.”

호탕하게 말한 레이븐이 옆으로 비켜섰다. 귀족들이 다시 한번 짝짝하고 손뼉을 쳤다. 악사들이 더 신나고 빠른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레이븐이 단상 위로 몸을 옮기자 귀족들이 벌떼처럼 기사단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 순간조차도 에버하르트의 시선은 에스티아에게 박혀 있었다. 워낙 키가 큰 사람이라 그가 이쪽을 보고 있음은 더욱 모를 수가 없었다.

이안의 예상과는 달리 에버하르트는 바로 에스티아에게 오지 않았다. 그건 에스티아의 예상대로이기도 했다. 지금의 에버하르트라면 그녀에게 미움받을까 두려워 함부로 다가오지 않을 거라는걸.

“어후, 귀족 영애라는 사람이 머리 짧은 것 좀 봐요…….”

뒤에서 어떤 여자가 궁시렁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에스티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시선은 오직 에버하르트에게만 꽂혀 있었다.

사람들이 조금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곡이 점점 클라이맥스로 향했다. 사람들이 무리에 따라 각자 흩어지기 시작했다.

에버하르트 주변에도 사람이 있었다. 딱 봐도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 알랑거리는 이들이었다. 에버하르트는 그들에게 시선 한 자락 주지 않았다.

‘오지 마, 오지 마, 에버.’

에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빌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외면해 주길 바랐다. 이제 곧 잔인한 짓을 할 그녀를 지나쳐 가길 바랐다.

하지만 그의 걸음은 에스티아에게로 움직였다.

에스티아는 절망했다. 그녀는 이제 무조건 저 마음에 단도를 꽂아 넣어야 했다.

“어머, 대공 전하가 글레멘드 영애한테 가네요.”

“설마 전하가 영애를 따라다닌다는 소문이 사실은 아니겠죠.”

“설마요…….”

승전식인 만큼 주변에 고위 귀족들이 많았다. 귀족 사회에 널리 널리 소문을 퍼트려 줄 그런 사람들.

‘미안해. 미안해, 에버.’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를 끌고 나가 사실은 오스카가 이런저런 말을 했다고, 당신 지금 위험하다고 알려 주고 싶었다. 우리가 잠시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도.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만큼 에스티아는 두려웠다. 저 남자가,

죽을까 봐.

“글레멘드 영애.”

에스티아가 숨을 들이마시었다. 어느새 에버하르트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

에스티아는 알고 있었다. 그가 쏟아 내고 싶은 수많은 말을 삼키고 내뱉은 말이라는걸.

그래, 지켜야지. 이제 더는 자신으로 인해 그가 위험해지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설령 그가 자신의 죽음을 방관했을지라도.

“네,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에스티아는 차분해졌다. 반면에 에버하르트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의 한쪽 눈썹이 꿈틀했다.

“그간 제가 전하께 민폐를 많이 끼쳤음에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게 무슨…….”

‘미안해, 미안해.’

에스티아는 그 짧은 순간조차 수십 번은 참아야 했다. 저 남자를 안아 주지 않기 위해.

“말씀 그대로입니다. 감사의 말씀을 드리려고요. 덧붙여 약속을 지키겠다는 제 의지도 다시 드러내고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에버하르트는 역시 금세 눈치챘다. 그의 눈빛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에스티아는 억지로 입꼬리를 위로 끌어 올렸다.

“전하와 셰린포드 영애를 지지하겠다는 약속이요.”

한순간에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귀족들은 대화를 멈추고, 음악 소리도 사라졌다.

“전하께서 원하셨던 대로, 저는 전하의 약혼녀는 하지 않겠습니다.”

“에스티아,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에버하르트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결국 에스티아의 눈에도 눈물이 차올랐다.

“대신 메르헨 셰린포드를 약혼자로 삼으세요.”

미안해.

“그게 제가 전하한테 하고 싶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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