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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124화 (125/141)

124화 - 버리다 (1)

승전식은 아수라장이 됐다. 뭐가 엎어지거나 부서진 건 아니었지만 말 그대로 차갑게 얼어붙었다.

에스티아는 모두에게 미안했다. 다른 이들이 주인공인 파티를 제대로 망쳐 놓았다.

하지만 이기적이게도 그녀의 마음을 가장 괴롭게 하는 건 그녀가 에버하르트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는 사실이었다.

에스티아는 곧바로 사교회장을 뛰쳐나왔다. 1초라도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에버하르트가 충격에 빠져 있는 틈을 타 에스티아와 이안은 재빨리 마차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공작가로 돌아가는 내내 에스티아는 울었다. 시간이 흐르고 비가 더 쏟아졌지만 에스티아의 눈은 꼭 감겨 있었다. 그 틈으로 눈물이 비처럼 흘러내렸다.

“아가씨!”

에스티아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을 때는 벼락처럼 쏟아지는 비도 아니었다. 마차에서 내리고 나서 들린 메리의 다급한 외침이었다.

메리는 에스티아에게로 달려가 그녀를 꽉 껴안았다. 이안은 굳이 그걸 말리지 않았다.

“메리, 내가 에버를 버리고 왔어…….”

메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떨리는 몸을 조용히 다독일 뿐이었다. 그들 옆으로 비가 쉬지 않고 떨어졌다.

공작가로 돌아온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로셸 글레멘드가 자리를 비워서이기도 했지만, 황궁 안에 있는다는 건 곧 에버하르트의 보호 아래 있겠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곳에서 나온 건 오스카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다. 아닌데도 에스티아는 곧 기절할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아가씨, 일단 들어가요. 밖이 추워요.”

메리와 이안이 양옆에서 에스티아를 부축했다. 에스티아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저택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무수한 빗방울이 맺히고 있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사이로 이곳으로 달려올 누군가를 생각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메리의 질문에 뭐라 답한 거 같은데, 에스티아 스스로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서서히 메리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은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니 들어가자고 하는 듯했다.

그래, 차라리 걸리는 게 낫겠어. 그래서 잠시만이라도 쉴 수 있으면 좋겠어.

이 모든 일이 끝나면, 마무리되면,

“나 아무래도 시간이 좀 필요할 거 같아.”

상처를 치유하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만 같아.

어깨 위로 담요가 내려앉는 게 느껴졌지만 에스티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메리는 아마 얼마든지 쉬라고, 언제나 옆에 있겠다고 덧붙인 거 같았다. 카린이 부축하려고 자신 곁으로 다가오려는 것도 같았다.

“아가씨.”

메리의 얼어붙은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에스티아는 인형처럼 서 있었다.

에스티아의 시선이 부서질 듯 울리고 있는 저택 문으로 향했다. 다른 이들은 다 아연실색했지만 에스티아만큼은 놀라지 않았다. 에버하르트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쫓아올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아가씨.”

메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에스티아를 돌아보았다.

“열어, 어차피 언젠가 올 순간이야.”

에스티아는 담담했다. 이안이 굳은 얼굴로 문 쪽으로 다가갔다. 시간이 길게 늘어진 거 같았다. 이안이 문을 열고, 그 사이로 사랑하는 연인이 보이는 순간이.

“에스티아…….”

고통에 긁힌 목소리가 에스티아의 마음에 날카롭게 꽂혔다.

에버하르트는 큰 보폭으로 단숨에 에스티아 코앞까지 다가왔다. 조금의 머뭇거림이 없는 걸음이었다.

“전하, 이 늦은 시간에는 어쩐 일이신가요?”

에스티아가 벌게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일부러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워 보았지만 소용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어쩐 일?”

에버하르트의 얼굴 근육이 눈에 띌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이 시간에 오는 건 결례라는 걸 모르십니까? 급한 건이 있으시면 기사나 시종을 통해…….”

“에스티아!”

에스티아는 움찔하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 절규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결례? 기사나 시종?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도대체!”

평소 같았으면 말렸을 이안도 그저 옆에서 그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만큼 에버하르트는 위협적인 게 아니라 위태로워 보였다.

“네가…… 네가 날…… 사랑했다면 그곳에서 그렇게 날 버릴 순 없었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에스티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초연한 모습이 에버하르트를 점점 극한으로 몰아갔다.

“에스티아, 무슨 말이라도 해 봐, 제발! 우리 둘만 있는 게 아니라서 그런 거야? 다들…… 잠깐 물러…….”

“다들 잠시만 자리 좀 비켜 줘.”

에버하르트에게 다시 ‘증상’이 나타날 듯하자 에스티아가 대신 말을 끝맺었다.

이안이 잠시 머뭇거렸지만 곧 로비에는 그들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사용인들이 사라지마자 에버하르트는 다시 절박하게 매달려 왔다.

“왜, 도대체 뭐야, 에스티아.”

빙의 후 그가 썼던 가면은 이제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직 절망, 두려움이 가득한 민낯이 드러났다.

“나한테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해결할 수 있을 거라며 나보고 걱정하지 말라고! 나중에 만날 수 있으니…… 괜찮다고 했잖아…….”

에스티아는 도저히 수려한 얼굴 아래로 떨어지는 눈물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닦아 줄 수도 없어서 그저 보고만 있었다.

그 눈물을 보며 무슨 말을 내뱉었지만 역시 이번에도 그녀의 의지는 들어 있지 않은 메마른 말이었다. 그 안에는 당신이 아닌 오스카를 선택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절대…… 절대 당신, 그 악마 같은 놈한테 안 보내. 내 목숨을 걸고 절대 안 돼!”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의 어깨를 부서질 듯 움켜쥐었다. 아팠지만 에스티아는 신음 소리 한 번 흘리지 않았다.

에스티아가 반응이 없자 에버하르트는 동아줄에 매달리듯 에스티아를 껴안았다. 하얀 목에 얼굴을 파묻고 그 체향을 공기인 양 들이마시었다.

“나……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했잖아. 그날 밤, 그래서 날 허락한 거였잖아. 나랑 떨어지는 게 그놈이 원하는 거라고…… 내 옆에 있겠다고 했잖아.”

목을 적시는 게 머리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에스티아도 같이 울고 싶어졌다.

“근데 왜…… 말도 안 되는 염문설을 뿌리고 날 외면해 왜!”

에버하르트는 자신의 모든 감정을 토해 내고 있었다. 꽉 껴안은 단단한 팔에서, 심장에서 심장으로 전해져 오는 떨림으로 알 수 있었다.

“에스티아…… 이제 너에게 정말 낭만을 보여 주고 싶었어. 상처 준 만큼 더 사랑해 주려고 했어.”

“이제…… 필요 없어.”

에버하르트가 숨을 삼키는 게 느껴졌다. 에스티아는 멈추고 싶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당신은 이제 내 낭만이 아니야.”

에스티아가 떨리는 몸을 밀어냈다.

“더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그뿐이야.”

에버하르트는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려고 하지조차 않았다.

“거짓말.”

“…….”

“내가 같은 저주에 걸렸다는 걸 보고 난 뒤부터 이상했던 거 내가 모를 거 같아?”

에버하르트의 눈동자가 광기로 번뜩였다. 다른 이가 그랬다면 무서웠겠지만, 이 남자는 무섭지 않았다. 그 광기의 뿌리가 사랑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날부터였어. 같은 저주에 걸렸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당신은 날 피했지. 미칠 정도로 두려웠는데도 난 참고 기다렸어. 근데 그 대가가 이거야? 이거냐고, 에스티아!”

너무 끔찍해서 에스티아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에버하르트가 그녀의 뺨에 두 손을 올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좋아. 당신은 당신 방식대로 해. 나는…… 내 방식대로 할 거야.”

그의 감정이 삼킬 듯이 에스티아에게 와닿았다.

“오스카만 미쳤다고 생각하지 마. 난 당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을 내 옆에 둘 거니까. 절대로…… 당신 안 보내.”

“메리!”

이대로 그가 말하게 놔두면 압도될 것만 같았다. 에스티아는 다급하게 메리를 외쳤고, 곧 메리는 물론 카린과 이안까지 달려왔다.

“오스카 후작한테 가야겠어. 이 멍청한 남자한테 내 정혼자는 당신이 아니라 다른 남자라는 걸 알려 줘야겠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날 죽인다 해도 못 가.”

에버하르트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에스티아는 다시 한번 그를 다독이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보내줄 수밖에 없을걸. 만약 보내 주지 않으면 황제 폐하께 당신을 막아 달라고 할 테니까.”

“뭐?”

“당신이 사랑에 미쳐서 무덤 속으로 들어가려고 한다고.”

이 말에서 에스티아는 잠시 흔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에버하르트에게 유일하게 내보이는 그녀의 진심이었기 때문이었다.

에버하르트가 오스카 때문에, 그녀 때문에 위험해질지도 모르니 황제 레이븐이 그를 막게 할 거라고 말한 거였다.

에버하르트가 이를 눈치 못 챌 리가 없었다.

“아…… 안 돼…….”

레이븐은 에버하르트를 가족처럼 여긴다. 그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모든 걸 동원할 사람이었다.

에스티아의 눈가에 결국 눈물이 고였다. 적어도 메르헨 옆에 있으면 셰린포드 가의 악행도 밝혀내고, 저주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그럼 적어도 그만은 안전해질 수 있었다.

“도대체…… 언제 이렇게까지 한 거야.”

“난 당신과 메르헨 셰린포드를 약혼시켜야 해요.”

그래야 당신을 살릴 수 있어.

“안 돼, 에스티아. 내가…… 내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모든 그렇게 혼자…….”

“행복하세요, 전하.”

어쩌면 나중에 다시 행복해질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못할 수도 있으니 떠나야 했다.

에스티아는 에버하르트를 지나치기 위해 걸음을 뗐다. 에버하르트는 곧바로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절대 안…….”

“이안.”

검을 부른 에스티아가 고개를 돌렸다.

“윽!”

곧바로 손목에서 그의 손이 사라지고, 그의 몸이 무너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기절시키기 위해 한 공격에도 에버하르트는 기어코 쓰러지지 않았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눈을 부릅뜨며 에스티아를 시선으로 쫓고 있었다.

그가 다시 일어나서 그녀를 잡기 전에 에스티아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그래도 에스티아는 오스카 후작저로 가기 전 이곳에 들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함이 가득한 그곳보다는,

당신이 날 구해 주러 왔던 이 집이 낫겠지.

그렇지? 에버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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