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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125화 (126/141)

125화 - 버리다 (2)

-왜 그냥 마시려고 했어?

그의 귓가에 죄책감이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던 그날.

-네가 원하던 거였잖아, 에스티아.

-…….

-네가 원하는 게 날 죽이는 거. 아니야?

에스티아가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 자세로 울음을 쏟아 냈다.

-미안…… 미안해…….

-그냥 마시게 놔둬. 더 살고 싶지 않아졌으니까.

-안 돼!

에스티아가 벌떡 일어나 에버하르트 손에서 찻잔을 낚아챘다.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음을 뱉어냈다. 에버하르트가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마시게 두지 그랬어, 에스티아.

에스티아는 그저 울기만 했다. 용서를 비듯이 손을 뻗긴 했지만 에버하르트는 외면했다.

-미…… 미안…….

-사과 한마디로 다 되는 거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다면 지옥에 처박힌 듯한 기분은 느끼지 않았을 텐데.

에버하르트의 얼굴이 웃는 듯 우는 듯 일그러졌다. 에버하르트가 벌게진 눈으로 에스티아를 바라보았다.

-그냥 지금 날 죽여, 에스티아. 안 그러면 내가 널 평생 괴롭힐지도 모르니까.

-내가…… 어…… 어떻게.

-못할 게 뭐 있어. 지금 하려고 했잖아.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를 죽일 듯이 다가왔다.

-나한테 말할 생각은 없었어? 날 의지하고 함께 방법을 찾아보면 되잖아! 왜! 왜 그딴 새끼한테…….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눈에 뭔가가 차오르면서 에스티아가 점점 흐려졌다.

-왜…… 내가 아니라 그놈이랑…….

-에버…….

-널 용서하지 못할 거 같아.

-…….

-널 평생 지옥 속에서 살게 할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에버하르트는 에스티아의 방에서 나왔다. 등 뒤로 마음을 찢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에버하르트는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면 다시 그 방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껴안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괜찮다고. 그게 네 진심이 아니었다는 거 안다고. 그 악마가 온갖 감언이설로 널 꾀어냈다는 거 안다고. 분명 자신이 대마법사임을 내세워 널 현혹했을 거라고.

그러나 그때는 이상하게 그 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아무리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서라지만 어떻게 자신을 죽이려고 할 수가 있을까.

난 너 없이 살 수 없는데 너는 날 죽이려고 했구나.

그 사실이 2년 동안 질기게 그를 쫓아다녔다.

진작 에스티아를 용서했더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잠깐 정신을 잃은 그 짧은 순간 동안 꿈속에서 끊임없이 자책했다. 뺨에 옅은 바람이 느껴지기 전까지는.

“윽.”

머리에 바늘 수십 개는 내리꽂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에버하르트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아래로 부드러운 침대 시트가 바스락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이안에게 당한 이후 잠시 의식을 잃었었나 보다.

‘에스티아.’

현실 감각이 돌아오면서 에버하르트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는 자신의 옆에 있는 이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창백한 안색의 메리가 서 있었다. 메리는 에버하르트가 몸을 일으키는 와중에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기만 했다.

“메리, 에스티아는.”

에버하르트는 본능적으로 에스티아의 위치를 알기 위해서는 메리를 다그쳐서는 안 된다는 걸 눈치챘다. 그만큼 메리는 거의 쓰러지기 직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에버하르트는 메리의 어깨에 살짝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여 그녀와 눈을 맞췄다. 메리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했다.

“전…… 전하…….”

“응, 괜찮아, 말해요.”

에버하르트는 메리가 말을 다시 이을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그러자 메리가 눈물을 닦고 입을 열었다.

“저도 자세히는 못 들었어요. 다만 파란색 장미 꽃밭이 있는 곳으로 간다고 하셨어요. 전…… 전하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 메리의 눈에 눈물이 다시 차올랐다. 메리가 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아가씨한테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거 같아요, 전하. 어떡하죠. 저 아가씨와 남작님의 표정이 그렇게 좋지 않은 걸 본 적이 없어요.”

메리에게는 에스티아와 이안 다음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이가 에버하르트였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본능이 그는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메리. 여기 꼼짝 말고 있어요. 알겠죠?”

“네.”

메리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에버하르트는 빠른 속도로 방을 뛰쳐나갔다.

파란 장미 꽃밭.

에스티아가 갔다는 그 빌어먹을 꽃밭이 어디인지 알 거 같았다.

에버하르트의 심장이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 * *

에스티아는 소파에 기댄 채 악마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악마는 그의 저주를 풀어 주는 조건으로 그의 정혼자가 될 것과,

오늘 밤 그와 같이 있는 걸 조건으로 내걸었다.

물론 오늘 밤만은 아닐 것이다. 정혼자가 된다는 것은 곧 결혼한다는 거였고, 에버하르트를 살리기 위해서는 평생 이 악마의 곁을 떠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에스티아는 이 상황에서조차 자신의 가능성과 힘을 믿었다.

‘방법은, 찾으면 돼.’

에스티아는 오스카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로 향하고 입술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에스티아는 무너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차가운 손이 드레스 안으로 파고들었다. 곧 어깨에 서늘한 공기가 와닿았다.

이곳이 침실도 아니고 응접실이라는 사실은 에스티아를 수치로 몰아갔다. 그러나 에스티아는 절대 움츠리거나 더러운 유혹에 떨지 않기로 결심했다.

“자만하지 마요, 에스티아. 이제 시작이니까.”

오스카는 점점 이성이 끊어지고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드레스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녀의 굴곡이 더 도드라진다는 점이었고, 두 번째는 옷에 숨겨져 있던 하얀 피부 위에 붉은 자국이 셀 수 없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끝내고 왔다고 하지 않았나? 이 빌어먹을 자국들은 뭐지?”

드레스가 딱 가슴 위까지 끌려 내려왔을 때 오스카의 동작이 뚝 멈췄다. 그의 눈빛은 검은 질투로 일렁이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피식 웃었다.

“이미 다 끝내고 온 마당에 그게 중요한가요? 내가 어떤 남자와 어떻게 했든 말든 무슨 상관이라고.”

“그 빌어먹을 대공을 살리고 싶으면 고분고분하게 구는 게 좋을 거야, 에스티아.”

“당신도 내가 혀 깨물고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신사답게 구는 게 좋을 거야.”

에스티아는 매서운 눈빛을 한 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순간 오스카는 자신도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 그동안 잘만 참아 오다가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는 대공이 그녀의 구석구석을 탐하고 닿았다는 게 견딜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빨리 에스티아를 궁지로 몰았어야 했나 하는 자책마저 들었다.

에스티아는 큰 손에 목덜미를 꽉 잡힌 채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신음을 참았다. 그에게 조금의 약한 모습도 보이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오스카는 그녀의 목을 틀어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에스티아의 손톱이 오스카의 손등에 박혔다.

“네가 나처럼, 처음부터 날 사랑했다면 일이 이 지경까지 되지 않았을 거야.”

손등에 상처가 생기고 피가 맺히고 있었지만 고통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스카는 에스티아가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그녀에게 고통을 주고 있었다.

“그것참……로……맨틱……하네…….”

숨통이 꽉 쥐어진 와중에도 에스티아는 주눅 들지 않고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정말…… 멋진 사랑…… 법이야.”

에스티아는 두려웠지만 빌지 않고 오히려 그를 비웃어 주었다.

그 모습에 오스카는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여 버릴까 생각했다. 그도 아니면 입을 틀어막고 억지로 눕힐까도 생각했다.

그는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오스카는 에스티아를 움켜쥔 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에스티아가 힘없이 쓰러졌다.

옷이 흐트러진 채로 엎어져 있는 모습은 오스카의 본능을 일깨웠다. 오스카는 그녀의 위로 무릎을 굽혀 앉았다. 에스티아가 오스카 가운데에 갇힌 채로 그를 맹렬히 노려보았다.

“이제부터 말 잘 듣는 게 좋을 거야. 그럼 혹시 몰라? 침대 위에서만큼은 신사가 되어 줄지.”

“너같이 천박한 신사는 필요 없어.”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에스티아의 눈빛은 여전히 선명하게 반짝였다.

오스카는 이제 더 참을 수 없을 거 같았다. 그가 거칠게 커프스단추를 풀었다. 그리고 아래로 손을 뻗었다,

“후작님!”

아마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실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뭐야.”

오스카가 짜증 난다는 듯이 작게 속삭였지만, 안셀은 어떻게 들었는지 다시 다급하게 외쳐왔다.

“윽! 지금 당장 영애를 데리고 몸을 숨기셔야…….”

오스카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저주에 걸렸고, 에스티아보다 더 강한 저주일지라도, 그 남자라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만큼, 아니면 자신보다도 더 이 여자에게 미쳐 있는 남자였으니까.

문이 쾅 부서졌다.

허무하게 쓰러진 문틈 사이로 오스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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