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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126화 (127/141)

126화 - 버리다 (3)

몸이 부서질 듯 아팠지만 에버하르트는 쉬지 않고 달렸다. 가까워질수록 꽃향기가 진해지고 바람이 더 세게 불었다.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것에 비해 공기는 탁했다. 에버하르트는 그 냄새가 악마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 에스티아와 그를 삼켜 버렸던 어둠.

“전하!”

거의 오스카 후작저에 도착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에버하르트는 바로 말을 멈추었다.

“이안.”

이안의 안색은 역시나 안 좋았다. 이안이 말을 끌고 급하게 다가왔다.

“아가씨가 지금 오스카 후작을 혼자 만나러 가셨습니다. 저보고 여기 기다리시라고 했는데 도저히…….”

“그럼 나와 같이 가. 자네는 그 빌어먹을 집사 한 명 잡고 있어. 난 바로 에스티아에게 갈 테니까.”

에버하르트는 집사 안셀을 떠올렸다. 소문에 따르면 전혀 늙지 않는다던 남자. 에스티아와 사이가 틀어져 후작저에 찾아왔을 때 본 남자는, 인간적인 매력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남자였다.

여전히 몸에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느껴졌지만 에버하르트는 멈추지 않았다. 이안과 함께 빠르게 말을 몰아 후작저에 도착했다. 마법으로 굳게 잠겨 있는 걸 에버하르트가 풀고, 이안이 먼저 앞서 달렸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집사 안셀이 현관문을 거칠게 열었다. 이안이 재빠르게 말에서 내려 검을 빼 들었다. 그걸 본 안셀이 총을 꺼냈지만 코앞에 다가온 이안에 총을 쏘지 못하고 겨우 검만 막아섰다.

“후작님! 지금 당장 영애를……!”

에버하르트는 가면 같던 남자의 얼굴이 무너지는 걸 보았다.

에스티아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달려가 검으로 단숨에 문을 부쉈다.

눈앞에 먼지가 날렸지만 에버하르트는 바로 에스티아를 발견했다.

“에스티……!”

에버하르트의 목소리가 뚝 멎었다. 그의 눈동자 안에 가슴 위까지 드레스가 끌어 내려진 에스티아가 있었다.

에스티아의 안색은 창백했다. 목이 졸린 듯 벌겠고 몸은 바닥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에버…….”

그녀의 눈빛은 말하고 있었다. 어서 도망가라고. 여기에 있으면 위험하다고.

하지만 에버하르트는 그녀의 말을 들어줄 수 없었다. 이미 몸은 검을 빼 들고 후작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다.

“윽!”

오스카가 본능적으로 보호 마법을 걸어 자신을 보호했지만 예리한 칼날에 균형을 잃었다.

“에버!”

에스티아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지만 에버하르트는 쉬지 않고 다시 칼을 휘둘렀다. 보호 마법에 쨍 하고 금이 갔다.

“대공, 미쳤습니까?”

오스카는 에버하르트를 비웃었지만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절대 깨지지 않으리라고 자부했던 마법에 상처가 생긴 탓이었다.

에버하르트는 다시 검을 내리쳤다. 오스카의 얼굴이 고통스럽다는 듯 일그러졌다.

“에버! 잠깐……!”

에스티아의 다급하게 외쳤지만 에버하르트에게 닿지 못했다. 그만큼 에버하르트는 이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에스티아가 이 더러운 남자한테 범해질 뻔했다. 그 사실이 에버하르트를 광기로 몰아갔다.

“윽! 대공……! 이럴수록 에스티아만 괴로워질 뿐입니다!”

과거보다 오스카의 힘이 약해진 건 맞는지 그는 수세에 밀리고 있었다. 본인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얼굴은 당혹감으로 물들여져 있었다.

‘에스티아’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음에도 에버하르트는 물러서지 않았다.

‘네놈을 죽여야 에스티아가 살 거야.’

그녀만 살 수 있다면, 무사할 수 있다면 자신은 죽어도 상관없었다. 에버하르트는 그 생각만으로 칼을 휘둘렀다.

“이러면 난 또 치사한 수를 써야만 해요.”

오스카가 일그러진 미소를 지어 보았다.

에스티아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저 말이 뭘 의미하는지 알 거 같았기 때문이다.

“에버! 멈춰!”

“으윽…….”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리자 에스티아는 언제 쓰러졌냐는 듯 몸을 일으켰다. 큰 몸이 다시 무너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오스카가 에스티아에게 다가올까 끝까지 그에게 검을 겨눈 상태였다.

“에버!”

에스티아가 정신을 잃어 가는 에버하르트를 뒤에서 안았다.

“이봐, 내가 이럴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주를 아주 독하게 걸어 놓았지요.”

“입 닥쳐…….”

에버하르트가 흐려지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검을 다잡았다.

입 안에서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에버하르트는 목 뒤에서부터 선혈이 흐르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러나 에버하르트에게 그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너 때문에 난 또 에스티아를…….”

잃을 뻔했어.

에버하르트가 이를 으드득 갈았다. 에스티아가 진심으로 자신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는 거에 안심이 되면서도, 저 악마가 그녀에게 손을 댔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솟았다.

죽일 것이다. 이 자리에서 죽는다고 할지라도 저 자식을 죽일 것이다.

“에버, 제발…….”

에버하르트의 마음을 눈치챈 에스티아가 간절하게 속삭였다.

“내가 말했잖아. 내가 해결할 수 있다고…….”

“같이 해.”

에버하르트가 떨리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해결해, 에스티아.”

에스티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더 치밀하게 계획을 짰어야 했다. 에버하르트가 찾지 못할 만큼 깊은 곳에 숨어야 했다.

“하, 둘이 아주 세기의 로맨스를 찍으시는군요.”

오스카가 비릿하게 웃었다. 다만 여유로운 미소와는 달리 눈빛에는 질투심이 일렁였다.

“살이 타는 느낌일 텐데요, 대공?”

오스카가 에스티아의 어깨를 잡아 뒤로 밀쳤다.

“티아!”

에버하르트가 본능적으로 그녀를 향해 몸을 틀었다. 그 뒤를 오스카가 발로 차고는 부서져라 짓이겼다.

“아윽!”

“안 돼!”

언제 밀쳐졌냐는 듯 에스티아가 한걸음에 다가와 온몸으로 오스카를 밀쳤다. 오스카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한 채 뒤로 물러섰다.

“미친 새끼! 한 번만 더 손대 봐! 그러면 내 시체도 못 가질 테니까!”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질렀는지 목에서 피 맛이 났다. 하지만 그 또한 에스티아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에스티아가 떨리는 몸으로 에버하르트를 자신의 다리에 눕혔다. 입가에서는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자신과는 달리 저주 때문이 분명했다.

“그만해……. 죄 없는 사람은 끌어들이지 마!”

에스티아가 에버하르트를 보호하듯 몸에 팔을 둘렀다.

에버하르트는 잠시나마 행복했다. 에스티아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너도 죄 없는 건 마찬가지잖아.’

그러나 에스티아의 말 한마디가 가슴을 아프게 찔러왔다. 에버하르트는 어서 몸을 일으켜서 너도 죄가 없다고, 이제는 다 이해한다고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죄가 없다고요? 그럼 당신을 죽인 건 누구지?”

“날 죽인 건 내 ‘아버지’야. 에버하르트가 아니라.”

“그렇다고 한들 죽음을 방치했다는 건 달라지지 않습니다.”

오스카가 그녀가 우습다는 듯 혀를 찼다.

“그건 네놈도 마찬가지잖아.”

“…….”

“정말로 날 순수하게 사랑했다면 날 구했겠지. 내가 죽어서 시간 되돌릴 궁리를 하는 게 아니라!”

오스카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다른 말을 맹렬하게 내뱉기 시작했다.

“그래도 당신이 나 때문에 살아났다는 건 변하지 않아요. 저 남자는 알고 있습니까? 당신이 한 번 죽었고 내가 시간을 되돌려서 다시 살아난 거라는걸? 당신이 본래 ‘에스티아’가 아니라는 건 압니까?”

에버하르트의 손끝이 움직였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솟아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자신이 그녀를 죽였었다는 공포감.

“아니, 난 ‘에스티아’가 맞고 다른 세계의 나 또한 내 일부야. 그대로 죽는 게 내 운명이었다면 그런 거겠지. 너 같은 새끼한테 고마워할 이유 없어.”

에스티아는 충혈된 눈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진심이었다. 그대로 죽었었다면 그것 또한 그녀의 운명이었다. 지금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서 너의 원래 운명대로 돌아가라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에버하르트가 그녀를 계속 사랑할 수 있다는,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주 제대로 미친 연놈들이구먼.”

오스카의 얼굴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에스티아는 지지 않고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미친 건 너겠지. 적어도 나와 이 사람은 너처럼 불쌍하게 살진 않거든.”

“입 다물어, 에스티아.”

오스카의 안면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후작님!”

한 번 더 에버하르트를 짓밟으려던 오스카가 동작을 멈췄다. 집사 안셀이 응접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옷은 여기저기가 찢어져 있었고 피가 베어 나오고 있었다. 이안과의 결투가 쉽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이안은 무릎을 꿇은 채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오스카는 네 ‘진짜 정체’를 드러내고 흑마법까지 써야만 남작을 이길 수 있었냐고 묻고 싶은 걸 참았다. 오스카가 에스티아와 에버하르트 쪽을 고갯짓했다.

“이 두 연놈들, 어따 집어넣고 가둬. 남작은 다른 방에다 넣어 놓고 죽게 놔둬.”

“미친놈.”

에스티아가 에버하르트를 바싹 껴안았다. 그런 그녀를 안셀이 거칠게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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