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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127화 (128/141)

127화 - 버리다 (4)

에스티아와 에버하르트는 낡은 창고 안으로 내던져졌다.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만큼 에스티아는 안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이제 진짜 마지막이니 제대로 끝내 놔요, 에스티아.

오스카는 여유로운 얼굴로 에스티아를 내려다보았다. 명백히 너네는 나를 이길 수 없다는 조롱이었다.

“에스……티아…….”

문고리를 잡아당겨 보는 에스티아의 등 뒤로 에버하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스티아는 바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의식이 희미한 와중에도 그는 에스티아를 찾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에버하르트의 얼굴을 쓰다듬던 에스티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에스티아는 급한 손짓으로 에버하르트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문양이 더…….”

에스티아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에버하르트의 몸에는 파란 멍 같은 것과 표식이 더 늘어나 있었다. 저주가 더 깊이 그를 잠식했다는 증거였다.

에스티아는 막막했다. 오스카가 별로 당황하지 않은 걸 보면 결국 이런 상황조차 예상했다는 거였다.

에스티아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보 같을지라도 당신이랑 나 둘이서 얘기하자고 소리라도 재차 질러 볼 생각이었다.

“에스티아.”

다만 그 노력은 에버하르트가 손목을 낚아챔으로써 허사로 돌아갔다.

“에버, 지금은 쉬어야…….”

“가지…… 마…….”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면서도 에버하르트는 에스티아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왜 자꾸…… 혼자서 해결하려고 해.”

그는 지금 애써 감기는 눈을 뜨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자신의 손목을 잡은 손 위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나 때문에 당신하고 이안이 죽게 놔둘 순 없어.”

“그렇다고 내가 당신을 보낼 순 없어.”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의 손목을 잡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에스티아가 막으려고 손을 들었지만 에버하르트는 그 손마저 잡아 버렸다.

“에버, 정말!”

“당신도 제발! 당신 혼자 그 새끼한테 가는 거 그놈이 원하는 거라는 걸 모르겠어?”

끔찍한 고통에도 에버하르트의 눈빛은 분노로 번뜩였다. 에스티아는 저 안의 분노를 꺼트리고 그를 쉬게 하고 싶었다.

-살이 타는 느낌일 텐데요, 대공?

오스카의 말을 떠올리자 에스티아는 불안감이 점점 짙어지는 걸 느꼈다.

“티아.”

에버하르트가 그녀를 잡아당겨 품 안에 꼭 안았다. 작은 몸이 오늘따라 더 작게 느껴졌다.

“난 괜찮아. 이 정도는 견딜 수 있어. 응? 제발.”

에스티아가 대답을 하지 않자 에버하르트가 초조하게 그녀를 독촉했다.

“나한테는 당신이 날 버리고 위험에 처하는 게, 가장 끔찍한 거라고. 티아, 그러니까 제발…… 윽!”

다급하게 말을 잇던 에버하르트가 거친 숨을 내쉬며 다시 쓰러졌다. 에스티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티아…… 안 돼…….”

혹시라도 그녀를 또 놓칠까, 에버하르트는 로비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드레스를 움켜쥐었다.

에스티아는 비참했다. 자꾸 닥쳐오는 비극에 머릿속에 빠르게 돌아가지가 않았다.

“흐윽…… 윽…… 티아…….”

에버하르트는 고통에 몸을 가만히 있지 못하면서도 시선은 에스티아에게서 떼지 않았다.

에스티아는 생명이 꺼져 가면서도 그녀를 향한 집념이 서린 눈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 날 죽였을 리가 없어. 내가 죽게 놔뒀을 리가 없어.

에스타아는 몸을 숙여 에버하르트를 껴안았다. 에버하르트도 급하게 그녀를 안아 왔다.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분명.’

-에스티아.

‘어?’

에스티아가 살짝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살랑 불어오고 있었다. 사방이 차가운 벽으로 막힌 방이건만 어디서 바람이 부는 걸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바람에는 꽃잎까지 실려 있었다.

-에스티아.

다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 목소리는…….’

조이. 어머니 조이의 목소리였다.

에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꽃잎으로 손을 뻗었다. 에버하르트가 꽉 안고 있어 높이까지 뻗진 못했지만 붉은 꽃잎은 에스티아의 손에 안착했다.

-못 들려준 이야기가 있어.

그것은 어머니의 목소리이기도 했고, 얼마 전에 오스카에게 건넨 ‘암스테르담’의 것이기도 했다.

에스티아는 간절한 마음으로 꽃잎을 쥐었다. 부디, 이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열쇠를 주길. 그래서 이 남자만은 구할 수 있기를.

그 마음에 반응하듯 꽃잎에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에스티아는 그 빛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그날로 돌아갔다. 아버지 로셸이 청원하고, 에버하르트가 방관했던 죽음의 날.

에스티아는 수갑으로 묶여 있었지만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군가 철창 밖에 서 있었다.

‘에버하르트.’

차가운 표정의 에버하르트였다. 에스티아는 그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명복은 빌어 주지. 기운 있으면 호송 마차 바닥이라도 내리쳐 보든가. 혹시 몰라? 마차가 툭, 하고 부서질지.”

에버하르트는 그 말을 끝으로 매정하게 돌아섰다.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에스티아는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호송 마차 바닥이라도 쳐 보라고?’

그 말에서 유독 에버하르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작아졌다. 에스티아는 그것이 혹시라도 간수가 들을까 봐 조심한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설마.’

에스티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만약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에스티아는 그에게 미안해서 죽을지도 몰랐다.

“더러운 년아, 어서 일어나.”

익숙한 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스티아는 간수들의 손에 끌려갔지만, 지난번과는 다르게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통 회색에 어두운 감옥. 그 계단을 쭉 내려가자 마차가 보였다.

마차는 짙은 검은색에 너비가 거의 성인 남자 키만 한 크기였다. 에스티아는 머리 위에 포대기가 씌워지기 전에 예리하게 그 점을 파악했다.

“얼른 타.”

간수가 거칠게 그녀를 밀어 넣었다. 에스티아는 철퍼덕 마차 안으로 엎어졌다. 보통 때라면 아파서 신음이라도 흘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에스티아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가 넘어진 곳이 바닥 다른 부분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에스티아는 일부러 일어나기 힘든 척 서 있는 곳을 몇 번 두들겨 보았다.

얇았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눈치채기 어렵지만, 엄연히 다른 곳보다 두께가 얇았다. 몸의 무게를 이용해 내리친다면 딱 부서질 정도로.

그랬구나.

에스티아는 눈을 감았다. 그랬구나. 에버하르트는 처음부터 그녀를 죽게 놔둘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설령 마차 아래로 떨어져도 마차 너비가 넓으니 바퀴에 밟힐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가 탈출하면 재빠르게 데려올 생각이었을 것이다. 다만 계획이 어긋났을 뿐이고.

궁금한 건, 에스티아를 용서하지 못하던 에버하르트가 왜 그녀를 뒤늦게나마 구하려고 했냐는 것이다.

그 점이 걸렸지만, 이런 마음이 더 컸다.

‘미안해.’

에스티아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 속삭임과 동시에 다른 기억으로 넘어갔다. 에스티아는 어려져 있었고 그 앞에 조이가 서 있었다.

“엄마.”

에스티아가 작은 손으로 조이의 드레스를 잡았다.

“제가 한 말 기억하지요?”

조이가 허리를 숙이며 다정하게 말을 건네 왔다.

“무슨 말이요……?”

에스티아가 눈물을 흘리며 조이를 올려다보았다. 조이는 무릎을 꿇고 앉아 에스티아를 소중하다는 듯이 껴안았다.

“내 봉인은 오로지 천사만 찾을 수 있다고 말했잖아요, 우리 아기.”

조이가 에스티아의 이마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봉인. 저주를 가둔 봉인.

꽃이다. 에스티아가 고개를 들었다.

“꽃은 저만 찾을 수 있다는 거예요?”

“응, 내 딸이니까.”

조이가 부드럽게 에스티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너무 다정해서 에스티아는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괜찮아요, 우리 천사. 엄마가 계속 티아 옆에서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엄마…….”

에스티아가 계속 엉엉 울며 조이에게 안겨 들었다. 조이가 에스티아의 등을 토닥였다.

“꽃을 꺾어요, 에스티아.”

“응?”

에스티아가 훌쩍이며 대답했다. 조이가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

“꽃을 꺾어야 해요, 에스티아. 그자의 손이 닿지 않은 꽃. 그동안은 뿌리까지 파내서 건네 줬었죠?”

조이가 에스티아를 쓰다듬었다. 에스티아는 이 촉감을 잊지 않기 위해 그저 가만히 아름다운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뿌리가 뽑히지 않은 채로 꽃을 꺾어야 해요. 할 수 있어요, 에스티아.”

내가 계속 지켜 줄게요.

조이가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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