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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128화 (129/141)

128화 - 버리다 (5)

“에스티아!”

“……?”

초점이 없던 에스티아의 눈에 다시 빛이 들어왔다. 에버하르트는 그 빛에 절박하게 매달렸다.

“괜찮아? 괜찮은 거지…… 대답 좀 해 봐!”

에스티아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에버.”

에스티아는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있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사이에 어떻게 몸을 일으켰는지 에버하르트는 그녀를 꽉 쥐고 있었다.

“티아, 내 말에 대답할 수 있겠어?”

그의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맺혀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에스티아의 마음속에서도 울컥 뭔가가 치솟아 올랐다.

“에버.”

“응, 말해.”

에버하르트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짧은 시간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실핏줄까지 나 있었다.

“에버, 나…… 나 당신한테 꼭 얘기할 게 있어.”

에스티아가 그녀의 어깨를 쥔 에버하르트의 손을 내려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에버하르트는 가만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당신이 날 죽인 게 아니야.”

“뭐?”

“당신은 날 죽게 만들지 않았다고. 당신은…… 날 구하려 했어.”

에스티아가 죄책감에 고개를 푹 숙였다.

“당신은 언제나 날 지켜 주었는데 나는 당신을 죽이려 하고…….”

“티아.”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의 얼굴을 부드럽게 잡고는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우린 너무 힘들었잖아. 그래서 그랬던 거뿐이야. 난 다 이해해. 괜찮아, 에스티아.”

에스티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데도 울음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에버하르트는 에스티아를 꼭 껴안았다.

에스티아는 너무 작았다. 이 작은 몸으로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견뎠는지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다. 거기에 자신도 일조했다는 걸 생각하면 스스로를 갈기갈기 찢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궁금한 건.”

“응?”

에버하르트가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당신은 뒤늦게나마 날 구하려고 했어. 죄수 호송 마차에 바닥을 뚫어 가면서까지.”

“더 빨리 구했어야 했어. 미안해.”

“아냐.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

에스티아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의 머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변명을 하자면, 결국 난 널 버리지 못하고 뒤늦게 조치를 취했겠지. 그리고 아마 널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겼을 거야. 일이 다 마무리되고 나면 네가 있는 곳으로 갔겠지.”

에버하르트는 본인답지 않게 말을 길게 늘어놓았다. 에스티아는 가만히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살리기로 했다는 걸 알아차린 이상 ‘그러지 않았을 거’라 의심하고 싶진 않았다.

“꽃을…….”

“응?”

잠시 꽃이 들려준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던 에스티아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혹시라도 누가 들을까 염려하는 것처럼 작게 속삭였다.

“남은 꽃을 찾아야 해. 그 남자의 손이 아직 닿지 않은 꽃.”

에스티아는 조이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당신은 메르헨을 상대해. 메르헨의 악행을 밝혀내고, 거기에 셰린포드 공작과 로셸 글레맨드의 죄도 밝혀 줘.”

“그게 무슨…….”

뭔가 싸함을 감지한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를 떼어 냈다.

“이건 합동 작전이야, 에버. 당신만 할 수 있는 일이야.”

“그게 무슨 소리냐고, 에스티아. 당신은?”

“난 나만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해.”

에스티아의 남색 눈이 조용히 에버하르트를 바라보았다.

“할 수 있지, 에버?”

에버하르트의 눈에 에스티아는 무척 초연하고 침착해 보였다. 그게 에버하르트의 불안감에 불을 붙였다.

“싫어.”

“애처럼 굴지 마.”

“당신 목에 난 상처를 보고도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에버하르트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검붉은 멍과 어깨 부분이 찢긴 드레스를 볼 때마다 그는 정말 미칠 거 같았다.

“나 좀 도와줘. 그래야 당신하고 이안을 구할 수 있다고.”

“싫다니까!”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의 손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지금 고통에 제정신이 아닐 텐데도 에버하르트는 에스티아가 뭔 짓을 할까 눈빛을 번뜩였다.

“당신 지금 아파. 좀 쉬고 나면 날 도와줄 거라고 믿어.”

에버하르트는 알지 못했다. 알았을 때도 그녀를 막지 못했다. 지독히도 무거운 몸이 족쇄처럼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오스카, 나와 거래를 해요.”

에스티아는 문을 두드리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근처에 있었는지 곧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요?”

“이 사람과 이안은 보내 줘요.”

“뭐……?”

그제야 에버하르트는 에스티아가 홀로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걸 눈치챘다. 그의 손이 에스티아에게로 향했다.

에버, 난 당신을 믿어.

에스티아가 입 모양으로 그렇게 얘기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녀에게 손이 닿지 않았다.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를 붙잡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다리를 완전히 펴기도 전에 강력한 기운이 그를 바닥으로 끌어당겼다.

“윽!”

평소라면 가볍게 부셨을 속박 마법이 지금은 온몸을 짓누르는 돌덩이처럼 느껴졌다.

“안 돼, 안 돼…….”

에버하르트는 고성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온몸의 마력을 끌어모았지만 살이 타는 듯한 고통에 번번이 흩어졌다.

에스티아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문은 언제 잠겼었냐는 듯 활짝 열려 있었다.

에스티아가 점점 멀어졌다. 에버하르트가 바닥을 긁으며 절규했다.

“에스티아! 안 돼! 가지 마!”

손톱이 부서지고 손에 온통 피가 흘렀다. 몸 여기저기가 타는 듯 지독한 고통도 계속 느껴졌다.

하지만 에버하르트는 지금 그런 고통마저 느낄 수가 없었다.

에스티아가 떠난다. 그를 놔두고.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그 길로 사라지고 있다.

아아아아!

에버하르트가 바닥을 내리치며 절망을 토해 냈다. 그는 자신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지도, 바닥에 머리를 내리찧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에게는 오직 에스티아가 사라졌다는 사실만이, 현실처럼 마음에 박혀 들었다.

* * *

“거래를 하고 싶으시다고요?”

오스카는 응접실 의자에 앉은 채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응접실은 언제 어질러졌냐는 듯 깨끗했다.

“남은 꽃이 있죠? 아직 못 찾은.”

확신할 순 없지만 조이의 말로 에스티아는 아직 남은 꽃이 있다고 추측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딱 하나가 남긴 했죠.”

오스카는 에스티아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 꽃만 찾으면 이제 끝입니다. 내 의뢰를 받는 조건으로 먼저 대공을 풀어 주고, 꽃을 찾아오면 남작을 풀어 주도록 하죠.”

오스카는 마치 그녀가 거래를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는 식으로 얘기하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차피 에버하르트를 오래 잡아 놓으면 곤란해지는 것도 오스카였다. 에버하르트가 황제 레이븐의 친구였으니.

꽃도 마찬가지였다. 그 꽃은 오직 에스티아만 찾을 수 있었다. 조이가 일부러 자신의 딸만 발견할 수 있도록 해놓았기 때문이었다.

-꽃을 꺾어요, 에스티아.

조이의 음성이 다시 생각났다.

에스티아는 속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오스카가 무너지고 풀려날 때까지 이안이 무사히 버틸 수 있도록.

“무슨 꽃이죠?”

에스티아는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오스카가 찻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나에게 아주 중요한 꽃입니다, 에스티아. 허튼수작 부리면 대공하고 남작은 그냥 죽었다 생각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에스티아는 당신이야말로 입 닥치라고 하고 싶은 걸 참았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꽃이냐고 물었었죠. 그 꽃의 이름은…….”

오스카가 에스티아 앞에 멈춰 서며 싱긋 웃었다. 왠지 모르게 피어나는 불길한 예감을 삼키고

“‘라 빅터’입니다.”

* * *

에버하르트는 자신이 언제 정신을 잃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알 수 있는 거라고는 어느새 자신의 손에 붕대가 감겨 있다는 것뿐이었다.

“전하! 정신이 좀 드십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그에게로 날아들었다. 에버하르트가 거친 숨을 내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에스티아……는…….”

얼마나 소리를 질러댔는지 목은 완전히 쉬어 버린 상태였다. 바일 가문의 집사가 그에게로 종종 걸음으로 바짝 다가왔다.

“누가 문을 두드리기에 나가봤더니 전하 혼자만 쓰러져 계셨습니다. 손톱은 4개가 부러졌고, 머리에는 출혈이 있어서 급하게 의원을 불러 치료했습니다.”

“에스티아는 어디 있냐고.”

에버하르트에게는 집사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의 눈은 사라진 에스티아를 쫓고 있었다.

“글레멘드 양은 저희도…….”

집사가 초조한 눈빛으로 주변 사용인들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하다는 표정이었다.

“전하, 부기사단장님께서 오셨습니다. 전하의 소식을 들으신 거 같았습니다.”

에이커가 집사를 부드럽게 밀어내며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한쪽 무릎을 꿇어 에버하르트와 시선을 맞추었다.

“아이비가……?”

에버하르트가 예상치 못한 이름을 가만히 읊조렸다.

-에버, 난 당신을 믿어.

‘에스티아.’

에버하르트는 가슴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꼈다.

에스티아를 구해야 했다. 그리고 그녀가 돌아왔을 때 안전할 수 있도록 그자들을 처단해야 했다.

“당장 들라 해.”

에버하르트가 언제 아팠냐는 듯 몸을 일으켰다.

“네?”

“아이비와 함께 가야 할 곳이 있어.”

* * *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반란이 겨우 진압되었다 싶었더니 바일 대공작이 오스카 후작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귀족이 귀족에게 선전 포고하는 건 사사로운 이유 때문일 때도 많아 그 누구도 함부로 이유를 묻지 못했다.

그저 레이븐만이 그 이유를 막연하게나마 추측할 따름이었다.

레이븐은 에스티아에게 붙여 보냈었던 젠을 에버하르트에게로 보냈다. 에이커가 젠의 도움을 받아 사병들을 정비할 동안, 에버하르트는 아이비와 셰린포드 공작저로 달려갔다.

‘저 사람 괜찮은 건가.’

아이비는 말을 몰면서도 내내 에버하르트를 걱정했다. 하물며 2년 전도 저것보다 심각하진 않았었다. 그때는 차라리 독기라도 있었지 지금은 전 재산을 잃은 귀족도 저것보다는 제정신일 거 같았다.

“문을 열어라! 바일 대공작께서 오셨다.”

아이비가 큰 소리로 소리쳤다.

대문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기사들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것이 바일이라는 대공작의 살기는 감히 그들이 상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사들은 눈빛을 교환했다. 대공작이 갑자기 납시었으니 문을 열어 줘도 가주님의 질책이 덜하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직까지 대공작과 메르헨 아가씨는 연인 사이였다. 기사들은 말없이 대문을 열어젖혔다.

그 이후로는 속전속결이었다. 에버하르트와 아이비는 단숨에 메르헨의 방까지 도달했다.

원래 메르헨은 1시간 이상, 다른 사람과 동행해서 방에 오는 건 금지했다. 하지만 기사들과 사용인들은 더 제재할 수는 없었다. 명령을 내릴 가주는 저택을 비웠고 아가씨는…….

“메르헨 셰린포드.”

에버하르트가 짓씹듯이 읊조렸다. 듣지 못할 정도로 작지 않았음에도 방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에버하르트는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예상과는 다르게 방문은 열려 있었다. 평상시에는 굳게 잠겨 있던 방이었다.

“세상에.”

아이비가 방 안의 광경을 보고 조용히 경악했다.

방 안은 마치 도둑 여러 명이 다녀간 것처럼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바닥에는 유리 조각들과 찻잔 조각들이 굴러다니고, 책상 위에는 온갖 서류들이 찢겨 있었다. 옷도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메르헨은 오래 찾을 필요도 없었다. 메르헨은 주인용 소파 옆에 죽은 듯이 쓰러져 있었다.

“메르헨 셰린포드.”

“…….”

메르헨이 몸을 움찔하며 조금씩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내…… 내…… 남자 왔네…….”

메르헨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며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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