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 괴물을 찾아
“헛소리 집어치우고, ‘그 상태’는 흑마법의 부작용인가?”
에버하르트가 조금의 온기도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메르헨의 모습은 방 안 광경보다 처참했다. 오른쪽 손은 악마의 것처럼 온통 까매졌고, 그 ‘증상’은 메르헨의 목덜미까지 잠식하고 있었다.
“분명…… 자신의 영혼으로…… 먼저 대가를 치르겠다고…… 했는데…….”
“영혼이 돈처럼 미리 빌릴 수 있는 거였던가? 그 악마의 말을 믿었어?”
이제 경멸스럽지도 않았다. 그저 눈앞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눈살만 찌푸려질 뿐이었다.
메르헨은 에버하르트에게 손을 뻗었지만 에버하르트는 한쪽 발을 뒤로 물리며 거부했다.
“마지막 기회를 주지. 네 발로 걸어가서 오스카와 흑마법에 손을 댔다고 자백해. 어차피 이 상태로는 들키는 것도 금방이겠지만.”
“하하……하…….”
메르헨은 고통에 신음을 흘리면서도 괴기한 웃음을 뱉어 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난 그저…… 함정에 빠진 거야. 증거 있어?”
“있지.”
에버하르트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저기에 뭐가 있는지 대충 알 거 같거든.”
“으…… 뭐……?”
에버하르트가 다시 무심하게 아래로 눈을 깔았다.
“아이비.”
“네, 전하.”
아이비가 에버하르트 옆에 바싹 다가왔다.
“이거, 잡고 있어.”
에버하르트가 메르헨 쪽을 눈짓하고는 방 오른쪽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 돼!”
그가 예상했던 대로 메르헨은 언제 쓰러졌냐는 듯 벌떡 일어섰다. 그 앞을 아이비가 민첩하게 막아섰다.
“비켜 미친년아!”
메르헨은 소리를 꽥 지르며 아이비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흑마법에 몸이 썩고 있는 이가 무술로 단련된 기사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이비는 가볍게 메르헨의 무게 중심을 무너뜨렸다.
메르헨은 아이비에 발에 걸려 철퍼덕 엎어졌다. 그 위로 아이비가 올라타 온몸의 힘을 이용해 내리눌렀다.
“이 그지 같은 년! 놓으라니까!”
안 돼애!
메르헨이 아이비에게 깔린 채로 발버둥을 쳤다.
에버하르트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벽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벽이 반응하더니 위로 마법 문양이 떠올랐다.
에버하르트가 조용히 검을 빼 들었다. 이 술식에는 흑마법이 섞여 있어 풀고 나면 다시 기절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그녀가 하라고 했으니까.
메르헨을 통해 오스카를 막는 건 역시 불가능했다. 대신 이 뒤에 숨어 있는 증거를 갖다 바치고 에스티아를 구하러 갈 생각이었다.
그동안은 혹시라도 에스티아가 위험할까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메르헨의 힘이 약해진 지금, 오스카가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지금이 기회였다.
‘네가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게 해 줄게.’
에버하르트가 속으로 수식을 외우고 검을 휘둘렀다.
뒤에서는 비명 소리가, 앞에서는 마법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저주에, 앞을 가로막고 있는 마법에, 에버하르트는 죽을 거 같았지만 버텼다.
마법이 부서졌다. 동시에 어떤 소리가 그의 귓가를 자극했다.
에버하르트는 검을 쥔 채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안에서 어린 소년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 *
에스티아는 마음도 실체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속에서 뭔가가 도려내지는 듯한 느낌이 들 리가 없었다.
에스티아는 현명하게 대처하기로 했다. 굳이 무리하게 도망쳐서 안셀을 자극하는 행위는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안셀은 지나치게 여유로웠다. 표정이나 행동으로 오만함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두 걸음 뒤에서 에스티아를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다. 이렇게 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는 것처럼.
‘저 사람의 정체가 대체 뭘까.’
로브를 걸치고 있음에도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드레스 위쪽이 찢겨서 그런 건지 뒤에서 따라오는 남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에스티아는 그저 오스카를 막아 에버하르트를 지키고 싶었다.
‘라 빅터’는 오스카 가문의 영지 안에 있었다. 그간 라 빅터 말고 다른 꽃을 먼저 찾으라 한 건 아직 그녀가 자신의 손아귀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서인 듯했다.
‘개자식.’
에스티아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음속에 죄책감이 퍼져 나갔다. 괜히 자신의 불행 속으로 그를 끌고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너무 힘들었잖아. 그래서 그랬던 거뿐이야. 난 다 이해해. 괜찮아, 에스티아.
그나마 에스티아는 에버하트르가 해 줬던 말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돌아가야 해. 미안해서라도 돌아가야 해.’
에스티아는 다시금 의지를 다졌다. 에버하르트를 불행 속에서 꺼내고 그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은 해내야 했다.
에스티아는 안셀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계속 걸음을 옮겼다.
* * *
에버하르트는 또 쓰러졌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메르헨은 살이 썩는 고통에 기절한 지 오래였고, 숨겨진 방 안에서는 로셸이 칼 셰린포드에게 팔아넘긴 소년들이 살려 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 이후로 속전속결이었다. 칼 셰린포드와 로셸 글레멘드 수배령이 떨어졌고, 메르헨은 수갑이 채워진 채로 황궁으로 실려 갔다.
소년들은 거의 가사 상태였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물과 음식을 준 것이 분명했다. 아이비는 소년들을 곧바로 의원들에게 데려갔고, 그들이 글레멘드 영지인 노베이에서 온 것을 확인했다.
-전하 쉬셔야 해요.
아이비가 곧바로 전쟁을 준비하는 에버하르트를 만류했다. 저주에다가 이제 막 반란 진압을 마친 데다, 추가로 부상까지 당한 참이었다.
-에스티아가 그 개자식이랑 있어. 귀족 간의 전쟁은 폐하도 끼어들 수 없으니 이번 기회에 에스티아도 구하고 그놈을 짓밟을 거야.
아이비는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에 초점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에스티아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이비.
둘은 황실 기사단장과 부단장이 아닌 오래 알고 지내온 동료였다. 하지만 에버하르트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럼 저도 돕겠습니다. 에스티아는 제 친구이기도 해요.
에버하르트도 지키고, 에스티아도 구해야 했다. 아이비는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에버하르트로서는 그 마음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곧 사병들과 합류했다. 에이커가 빠르게 다가와 안색을 살피기에 에버하르트는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제 전쟁을 시작할 때였다.
“젠, 상대는 흑마법을 쓰는 사람입니다. 조심해야 해요.”
에버하르트는 젠에게 작게 속삭였다. 황제 레이븐이 은밀하게 보낸 젠은 일반 사병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오스카 후작저에 진입하면 흑마법 증거를 찾을 생각입니다. 그것만 찾으면 끝납니다.”
젠의 목소리도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에버하르트는 젠과 한 번 더 눈을 마주치고는 말에 올랐다.
머릿속에서 후작저 응접실에서 보았던 에스티아의 모습이 계속 맴돌았다. 만약 저주로 인해 중간에 죽게 된다면 귀신이라도 돼서 에스티아를 찾을 생각이었다.
넓은 공터에서 에버하르트가 선두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사병들이 소리를 지르며 그 뒤를 따랐다.
* * *
에버하르트는 사병들과 함께 컬스 영지에 진입했다. 유령이 사는 마을처럼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건 여전했다.
‘하기야 그놈 영지인데 정상적일 리가.’
에버하르트는 주변을 가만히 둘러보았다.
사병들도 퍽 당황한 눈치였다. 호기롭게 돌격했더니 거의 무너져 가는 폐가들만 연이어 있을 뿐이었다.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전하.”
아이비가 에버하르트 쪽으로 말을 가까이 몰았다.
“알아. 이미 컬스 영지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걸로 유명하다지.”
에버하르트의 눈빛이 날카롭게 마을을 훑었다.
“하지만 사람만 없는 거지, 다른 게 없다는 보장은 없어.”
“……?”
아이비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소리 한 번 크게 내지 않고 텅 빈 마을을 지나쳐 갔다.
“전하!”
에이커가 말을 빠르게 몰아 에버하르트에게로 다가왔다.
에이커가 더 말하지 않아도 에버하르트는 그가 왜 급하게 불렀는지 알 수 있었다.
“병사들이다.”
에버하르트가 앞을 주시한 채 사병들한테 일렀다.
“다들 조심하도록. 저들은…….”
에버하르트가 멀리 선 오스카 병사들을 훑었다.
“사람이 아닌 거 같으니까.”
“네?”
에이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에이커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걸 눈치챈 에버하르트가 에이커 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렸다.
“상대는 흑마법을 쓰는 자고, 저기서 사람의 기운이란 느껴지지 않아. 뭘 거 같아, 에이커.”
에이커의 시선이 천천히 반대편 적군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검은 투구를 써서 얼굴을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다만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그들의 눈은 검게 뻥 뚫려 있었다. 눈이라는 게 없는 것처럼. 흡사 유령을 보는 거 같아 에이커는 간담이 서늘했다.
“다 죽여라, 한 놈도 살려 두지 말고.”
에버하르트가 큰 소리로 얘기한 건 아니었지만 모든 병사가 듣기에는 충분했다. 그만큼 고요하고 서늘한 공기가 그들 사이를 맴돌고 있었다.
에버하르트가 검을 높게 들었다. 병사들은 말고삐를 꽉 잡았다.
“돌격!”
에버하르트가 선두로 달려 나갔다. 병사들의 고함 소리가 땅을 덮었다.
마치 까마귀 떼 같은 적군들도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처럼 승리를 위한 함성이나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마치 태엽을 한껏 돌린 인형처럼 그저 무감하게 달려올 뿐이었다.
에버하르트의 검이 단숨에 선봉에 선 병사의 목을 내리쳤다. 보통이라면 당연히 허무하게 바닥으로 떨어질 머리였다.
‘이건…….’
에버하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목이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는 병사를 바라보았다.
목의 절반이 잘려 나갔음에도 병사는 에버하르트에게 계속 칼을 휘둘렀다.
“모두들 잊지 마라! 이것들은 사람이 아니다!”
에버하르트처럼 눈치챈 아이비가 병사들에게 외쳤다. 당황해서 진열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에버하르트는 대롱대롱 몸에 매달린 목 위로 한 번 더 칼을 휘둘렀다.
목이 떨어졌지만 몸은 몇 분 동안을 더 칼을 휘젓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병사가 죽자 그가 타고 있던 말도 검은 연기로 사라졌다.
‘하.’
에버하르트는 바로 다음 적군에게 칼을 움직이면서도 속으로 한탄했다.
이것들은 흑마법으로 만들어 낸 꼭두각시들일 것이다.
사람이 아닌 탓에 쉽게 죽지 않았다. 한 병사를 처단할 때 2~3배는 더 많은 힘이 들어갔다.
‘에스티아.’
지금도 몸 구석구석이 불에 타는 듯한 느낌이 그를 끔찍한 고통으로 몰아갔다. 발아래 누군가 불을 지펴 발끝부터 불의 열기에 데는 기분이었다.
이 상태로 ‘괴물’들을 상대하는 건 아무리 황실 기사단장이라도 버거웠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에버하르트는 오로지 에스티아의 이름만 되새기며 앞으로 진격했다.
지도자가 거침없으니 병사들도 기죽지 않고 괴물들을 내리쳤다. 칼과 칼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에버하르트는 이 괴물들을 다 처리하고 나면 끝으로 그자의 목을 칠 생각이었다. 다시는 에스티아를 건들지 못하도록.
“전하! 적군…… 시체들이 살아납니다.”
에버하르트가 말고삐를 틀어 뒤를 돌았다. 에이커가 시선으로 심장이 관통 당한 적군을 가리키고 있었다.
에버하르트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모든 시체가 다 그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죽었다고 확신한 시체들이 꿈틀대는 게 눈에 보였다.
“살려 두지 마라. 다시 죽여라.”
“예!”
병사들이 즉시 에버하르트의 명령에 답했다.
에버하르트는 다시 앞을 향했다. 그러고는 달려오는 괴물들을 향해 칼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