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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130화 (131/141)

130화 - 그리움

오스카의 꼭두각시들은 기술이 뛰어난 건 아니었다. 좋게 봐 줘야 보통 사람을 대강 잘 훈련시킨 것에 불과했다.

근데 죽질 않는다. 꼭두각시에 따라서는 다섯 번 목을 베도 죽지 않았다.

에버하르트의 검이 날카롭게 괴물의 목을 베었다. 실처럼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목이 뚝 떨어졌다.

“하아, 하아.”

에버하르트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평소에는 깃털처럼 들던 검이 지금은 감당할 수 없는 사신의 낫처럼 느껴졌다. 무거웠고, 버거웠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아이비가 검은 피가 묻은 검을 든 채 다가왔다. 에버하르트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난 신경 쓰지 말고 저놈들이나…….”

젠장.

에버하르트가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타는 듯한 고통은 이제 피부 속까지 침투해 그를 갉아먹고 있었다.

‘내가 이렇다면 에스티아는.’

그 저주가 에스티아를 가만둘 리가 없었다. 죽음이 목전까지 다가온 순간조차 에버하르트는 에스티아가 걱정됐다.

여태까지 전쟁에 나갔을 때는 적어도 ‘건강한’ 에스티아가 그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원망스럽고 증오스러워도 매번 그 여자를 볼 생각으로 버티고 또 버텼다.

근데 지금은 에스티아가 어떤 상태일지 전혀 예측을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최악의 경우만 상상됐다.

눈앞의 괴물은 오른쪽 팔을 잃었는데도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듯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겨우 단검을 상대하는 것이니 곧 머리를 베었지만, 이 괴물도 바로 죽지는 않았다. 오히려 단검을 빠르게 그 앞에서 휘둘러 댔다.

‘하아.’

에버하르트가 이를 악물어 단번에 목을 떨어트렸다. 그 이후로도 괴물은 몇 초간 꿈틀거리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에스티아.’

전쟁에서 잡생각이 드는 건 절대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어디서 뭐가 날아올지 모르는, 일분일초가 급박한 전쟁 상황에서 잡념은 스스로를 찌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걱정돼서 미치겠어.’

차라리 귀신으로나마 구할 수 있다면 이 자리에서 죽어서 그녀를 구하러 가는 게 낫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버텨야 해, 에스티아. 다치면 안 돼. 죽어서도 안 돼.’

“윽.”

오른쪽 팔에 차가운 칼날이 스쳐 지나갔다. 저주가 아니라 괴물이 그의 팔을 벤 거라고 알아차릴 때까지는 무려 몇 초가 걸렸다.

“전하!”

역시 잡념은 전쟁에서 독이다. 에버하르트가 지혈을 하지 않은 채로 괴물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다. 그런 괴물을 아이비가 확인 사살하듯 목을 내리쳤다.

“전하, 제 말씀 잘 들으세요.”

다시 검을 들려는 손을 아이비가 제지했다. 시선을 돌려 바라본 눈빛에 방금과는 또 다른 비장함이 엿보였다.

“여기는 저희한테 맡기십시오. 전하는 에스티아를 찾으러 가세요.”

아이비는 몸을 틀어 괴물을 찌르는 와중에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이비.”

“에스티아와 약속했습니다. 그녀를 돕겠다고요. 이렇게나마 그분을 돕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 전하가 여기 계셔 봤자 저희 신경만 쓰입니다. 어서요!”

아이비는 강하게 의지를 표하듯 아예 그를 등지고 괴물들과 맞섰다. 에버하르트는 그런 아이비 등 뒤를 잠시 바라보았다.

아이비는 지난 2년 동안 그의 비참함을 가장 생생하게 봐 온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아이비가 에스티아를 편견 없이 보았던 이유는 그녀의 선한 심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 관계에서 가장 큰 미련을 가진 사람이 그라는 것도 알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분은 솔직하잖아요.

네가 뭘 아냐며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결국에는 맞는 말이었다.

아이비는 언제나 그랬다. 가식이 없고 솔직하고, 항상 곁을 든든하게 지켜 주는 친구였다.

“고마워.”

에버하르트의 말에 아이비는 살짝 미소 짓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아이비는 다른 병사들과 함께 에버하르트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저주 때문인지 전쟁 때문인지 모를 상처들이 고통스러웠지만, 에버하르트는 말고삐를 고쳐 쥐었다.

파란 장미 꽃밭이 있는 곳으로, 에버하르트는 달리기 시작했다.

* * *

에스티아는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겨우 움직였다. 몸에 기운이 없는 것인지, 몸살인지 로브를 꽉 여몄는데도 지독한 추위가 느껴졌다.

게다가 그동안 외면해 왔던 고통까지 피부 아래로 파고들어 왔다. 연한 살이 찢기고 데는 듯한 느낌이 점점 선명해졌다. 아무래도 약해진 몸이 고통에 더 예민해진 거 같았다.

저주가 이런 고통을 주는 거라면 에버하르트는 어떡하지. 그 사람, 마지막으로 볼 때 많이 아파 보였는데.

“글레멘드 영애.”

“…….”

그 사람을 걱정하다 보니 에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춘 상태였다.

“꽃이 있을 곳이라 예상한 장소는 더 가야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굳이 말 안 해 줘도.”

지금은 숙여야 할 때라는 건 알지만 도저히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다행히 그나마 안셀은 제 주인에 비해 말은 적은 편이었다. 그는 그저 눈짓 한 번으로 빨리 걸으라고 재촉할 뿐이었다.

에스티아는 흐려지는 정신을 계속 부여잡았다. 지금 소원이 딱 하나 있다면, 포근한 침대에 에버하르트와 나란히 누워 평온을 즐기는 거였다.

‘그럴 수 있을까.’

에스티아는 조용히 헛웃음을 지었다.

컬스 영지는 지난번에 왔던 것처럼 인기척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폐허처럼 무너진 작은 나무집 몇 개를 지나쳤다. 그 집들이 흡사 전에 마을에서 보았던 꽃 창고를 연상시켰다. 똑같이 소름 끼치고 스산한 느낌을 주던.

“저 숲입니다.”

이제 그는 뒤에 ‘영애’라는 말도 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잘 됐다. 저 입으로 영애라는 말을 듣는 것도 소름 끼쳤으니까.

에스티아는 눈앞의 숲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나무들은 짙었다. 짙다 못해 검게 보이는 나무들은 그 자체로 어둠으로 보였다.

‘꽃을 꺾으면 된다.’

라 빅터 하나만 꺾는 것만으로 효과가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다. 게다가 저 남자를 따돌리고 꽃을 꺾을 수 있을지도.

‘그래도 해야 해. 어머니가 알려 줬으니까.’

에스티아는 어두운 숲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앞이 뒤에서 흘러나오는 빛으로 바로 코앞만 교묘하게 비추었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에스티아는 안셀이 마법을 쓴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에스티아, 여기.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에스티아가 미세하게 움찔했다. 꽃이자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였다.

에스티아는 걸음을 늦춰 안셀의 반응을 살폈다. 눈치챈 건지 못 챈 건지, 안셀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따돌릴 수 있을까.’

이 몸으로?

에스티아는 갈등했다. 시도라도 해 볼까. 그런데 시도했다가 상황이 오히려 안 좋아지면 어떡할까.

그래도 저들이 그녀가 없으면 꽃을 찾지 못한다는 건 확실했다.

‘해 볼까. 한 번은 해 볼까.’

에스티아는 땀이 배어 나오는 손을 로브에 문질렀다.

그래 눈 딱 감고 해 보자. 에스티아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에스티아.

앞에서 다시 소리가 들렸다. 앞으로만, 달리면 된다.

“영애, 그쪽이 맞습…….”

아마 맞냐고 물으려던 거 같다. 달리기 시작해서 끝까지 듣지는 못했지만.

헉, 헉.

에스티아는 달렸다. 입 안에서 피맛이 느낄 정도로 온 힘을 다해 달렸다. 꽃이 부르는 목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와 동시에 뒤에서 그녀를 쫓아오는 소리도 가까워졌다.

‘조금만…… 조금만 더!’

뛰는 와중에도 몸이 떨려서 몇 번이나 바닥에 엎어질 뻔했다.

‘제발!’

정신을 잃은 건지, 앞이 깜깜한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괴로웠지만 에스티아는 멈추지 않았다.

-에스티…….

“악!”

꽃이 한 번 더 그녀를 부르려던 때였다. 우악스러운 손이 그녀의 짧은 머리채를 잡아챘다.

에스티아의 몸이 힘없이 그 손에 딸려갔다.

“아, 열받게 하네.”

머리카락이 뽑히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에스티아는 힘껏 발버둥을 쳤다.

안셀이 에스티아를 흙바닥에 내팽개쳤다. 에스티아가 차디찬 바닥으로 철퍼덕 엎어졌다. 그 위를 안셀이 여유롭게 올라탔다.

“어디 하나라도 부러트려야 고분고분 알려 주려나?”

안셀의 손이 에스티아의 얇은 발목으로 향했다. 발목을 부러트릴 심산인 것이다.

현실을 도피하듯 에스티아의 의식이 더 흐려졌다. 저주로 인한 고통도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몸이 스스로 마취제를 놓는 것처럼 정신이 몽롱해졌다. 발악할 힘마저 사라질 만큼.

만약 이렇게 죽는다면 에버하르트라도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 싶다.’

어둠 속 태양처럼 눈부시고 따뜻한 사람. 설령 빛을 조금 잃더라도 유일한 별처럼 아름다울 사람.

에스티아는 마지막으로 에버하르트를 그려 보았다.

안셀의 몸이 퍽 하고 꼬꾸라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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