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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131화 (132/141)

131화 - 꽃의 끝 (1)

흑마법으로 움직이는 괴물들 속에 있다 보니 또 다른 ‘괴물’의 흔적을 쫓아가는 건 쉬웠다.

게다가 길에는 두 사람의 발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하나는 성인 남자의 것이 분명했고, 다른 하나는 에스티아의 것이 분명했다.

그것만 보는데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이 소름 끼치는 곳에 에스티아가 악마들과 함께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몸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그나마 비가 와서 다행이었다. 진흙들이 많이 생긴 덕분에 에스티아의 흔적을 쫓아가는 게 훨씬 수월했다.

‘제발, 제발 무사해야 해.’

어두운 숲에 다가갈수록 초조함은 극대화됐다. 에스티아의 흔적은 그 숲 안으로 이어져 있었다.

“젠장!”

에버하르트는 말에서 뛰어내렸다. 말 한 마리가 제대로 지나가기 힘들 만큼 나무들의 사이는 촘촘했다. 이런 곳에서 무슨 일이 생겼어도 도망치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에버하르트는 전속력으로 숲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다행히 숱한 전쟁 경험으로 눈은 빠르게 어둠을 적응했다.

‘빛이다.’

에버하르트의 눈이 예리하게 작은 빛을 낚아챘다. 유달리 선명한 것이 초나 등불이 아니라 마법으로 만든 듯했다. 에스티아는 마법을 쓸 줄 모르니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에스티아라도 도망갈 수 있어야 했다.

다행히 천천히 걷고 있는 듯 빛은 갈수록 더 가까워졌다. 여전히 저주로 인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에버하르트는 오히려 희망을 가졌다. 조금만 가면 에스티아가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돌연 빛이 빠르게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한 남자가 ‘영애’라고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났다. 기억이 맞다면 집사 안셀의 것이었다.

나뭇잎이 짓밟히는 소리, 몸에 나뭇가지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에버하르트는 직감적으로 에스티아가 도망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맙소사, 에스티아.’

에버하르트는 아연해졌다. 몸도 좋지 않은 사람이 인간일지 아닐지도 모르는 남자에게서 도망쳤을 때 결과는 뻔했다.

심장이 터질 거 같았다. 적의 칼이 목 끝까지 들어와도 지금처럼 두렵지는 않을 거 같았다.

안 그래도 빠르게 달리던 에버하르트는 더 속도를 높였다. 빛은 다시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안심이 되는 건 아니었다. 에스티아가 무사하다고 확인하기 전까지는.

“악!”

‘안 돼.’

여인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가 에스티아의 것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아, 열받게 하네.”

쓰러진 실루엣 위로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하나라도 부러트려야 고분고분 알려 주려나?”

짧은 순간이었지만 에버하르트는 일단 저놈을 에스티아에게서 치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절하듯 쓰러져 있는 에스티아. 그 위에 건장한 남자가 누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에버하르트는 바로 검을 꺼내 안셀에게 휘둘렀다.

“윽!”

안셀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옆으로 쓰러졌다. 겨우 피한 안셀의 머리에서 검에 베여 피가 흘러내렸다. 에버하르트의 시선이 바로 에스티아에게로 향했다.

창백했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듯 두 눈을 꼭 감은 채였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느껴지던 저주의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온몸의 피가 정신을 태워 버릴 듯 뜨겁게 타올랐다.

“이 새끼가!”

안셀이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기절하고도 남았지만 역시 사람이 아닌지 피를 흘리면서도 다가왔다.

에버하르트는 고민하지 않았다. 검을 빼서 그대로 안셀의 목을 베었다.

안셀은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의 눈은 충격으로 굳어져 있었다. 이 정도로 빠를 줄은 몰랐다는 눈이었다.

목이 툭 떨어졌다. 위가 텅 비어 버린 몸은 피를 쏟아 내며 쓰러졌다. 에버하르트가 그걸 차갑게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에스티아.”

언제 살기를 내뿜었냐는 듯 에버하르트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에버하르트가 두 무릎을 꿇고 에스티아를 안아 들었다.

“에스티아! 정신 차려! 에스티아!”

“으음…….”

에스티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에버하르트는 연신 에스티아의 뺨을 쓰다듬었다.

“에스티아. 티아, 눈 좀 떠 봐. 눈 떠야 해.”

“……에버?”

에스티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남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아, 티아, 티아.”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의 창백한 이마에 입을 맞췄다. 에스티아가 에버하르트의 옷깃을 잡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보고 싶었어, 에버.”

“너 지금…….”

에버하르트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에스티아를 책망하려다가 참았다.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얼굴이 왜 이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에버하르트의 목에서 짐승처럼 잔뜩 날이 선 음성이 흘러나왔다. 에스티아는 그마저도 반가워서 계속 미소 지었다.

“일단…… 일단 가자…… 가야 해.”

에버하르트의 머릿속에는 에스티아가 무사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어서 그녀를 따뜻한 침대에 누이고 치료를 받게 해야 했다.

“꽃…… 오스카를 막으려면 꽃을 꺾어야 해.”

에스티아가 끊어질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한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에버하르트는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거 같았다.

“어디 있는데. 내가 대신…….”

“아냐. 내가 찾아야 해. 나만 찾을 수 있어.”

“그러니까 그걸 왜 네가 해야 하는데!”

에버하르트의 머릿속은 에스티아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완전히 마비되었다. 에스티아는 손을 들어 동요하는 에버하르트의 뺨에 손을 올렸다.

“그래야 당신을 지킬 수 있잖아. 물론…….”

에스티아가 다시 험악해지는 에버하르트를 보며 황급히 말을 이었다.

“물론, 나도 살 수 있고.”

“……그러면 같이…….”

에버하르트는 이번에는 절대 에스티아를 혼자 보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끄……윽…….”

에버하르트가 홱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길 바랐는데, 안셀의 몸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다시 살아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떨어진 목에서도 신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하아.’

에버하르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유감스럽게도 지금도 역시 그의 뜻대로 흘러가질 않을 모양이었다.

“에스티아.”

에버하르트가 조심스럽게 에스티아를 일으켰다.

“꽃 찾을 수 있다고 했지.”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하지만 절박함이 잔뜩 묻은 손짓이었다.

“꽃을 찾아. 그리고 오스카를 막아. 난 이 괴물을 막고 있을 테니까.”

“에버.”

“네가 살 수 있다고 해서 보내 주는 거야. 아니면 안 보내 줘.”

눈가에 가득 눈물이 차오르는 게 느꼈다. 에스티아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알겠지? 안 다치고 돌아올 수 있지?”

“응.”

에스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버하르트는 에스티아의 어깨를 놓아주었다. 뒤에서 ‘끄으윽’ 하는 소리가 더 빈번하게 들렸다.

“가, 어서. 금방 뒤쫓아 갈게.”

에스티아는 달리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에버하르트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 * *

에스티아는 꽃을 향해 다가갈수록 자신의 생명이 사라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간 에버하르트만 걱정하느라 몸을 돌보지 않았으니 더 몸이 안 좋아졌을 것이다.

-에스티아.

에스티아에게 믿을 건 그 목소리 하나뿐이었다. 혹은 저 멀리 보이는 붉은빛이라든가.

에스티아는 그 빛이 ‘라 빅터’에게서 나오는 빛이라는 걸 알아챘다.

이제는 몇 초 단위로 눈앞이 흐려졌다. 그래도 에스티아는 멈추지 않았다. 혹시라도 오스카가 나타나 그녀 앞을 가로막으면 끝이었다.

에스티아가 나뭇가지에 걸려 넘어졌다. 몸이 힘없이 꺾였지만 에스티아는 부들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두 걸음만 가면 있다.

일어설 힘은 없어 에스티아는 두 팔 힘으로 꽃을 향해 기어갔다.

-에스티아, 여기에, 내가 그자의 힘을 다 모아 놨어.

“으흑…….”

재차 들리는 목소리에 울음이 울컥 차올랐다.

손끝에 차가운 꽃잎이 스쳤다. 에스티아는 땅을 움켜쥐며 마지막 힘을 모아 몸을 움직였다.

-잘했어.

에스티아가 작게 숨을 내뱉었다. 손안에 꽃이 들어왔다. 구원줄이자 족쇄였던, 외면할 수 없는 존재였다.

-언제나 지켜 줄게, 에스티아.

지금 들려오는 목소리인지, 과거 기억에서 나오는 목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만큼 의식은 현실에서 떠나가고 있었다.

에스티아가 꽃을 움켜쥐었다. 붉은빛이 거부하듯 빛을 뿜어냈다.

‘미안해.’

에스티아는 그 말이 꽃에게 하는 말인지, 어머니에게 하는 말인지, 에버하르트에게 하는 말인지는 몰랐다. 그저 속삭였을 뿐이었다.

‘사랑해.’

에스티아가 꽃을 꺾었다.

마치 비명을 지르듯 꽃에서 우드득 소리가 났다.

빛이 났다. 최후로 발악하듯 아주 눈부신 빛을 내면서.

하지만 빛은 곧 사그라졌다. 원래 그곳에 빛이 없었던 것처럼.

생기 잃은 꽃은 먼지처럼 사라졌다.

에스티아의 남색 눈이 그 모습을 눈 안에 담았다.

스르륵, 감기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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