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 죄
오스카는 의심하지 않았다. 저주가 에스티아와 에버하르트를 삼키고, 에스티아가 자신의 것이 될 거라고.
처음 조이 글레멘드가 ‘안셀’의 정체를 알고 오스카를 압박할 때도, 결국 오스카의 어두운 마력을 봉인했을 때도, 오스카는 자신이 최후의 승리자가 될 거라는 걸 의심하지 않았다.
조이도, 에스티아도 죽어 가고 있었는걸. 그 어미가 겨우겨우 봉인을 했다고는 하나, 대공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에스티아가 끝내는 마지막 꽃도 바칠 게 분명했다. 그렇게 믿었다.
그건 스스로를 향한 기만이었을까? 아무리 온갖 수작을 부려도 떨어지지 않는 그 두 사람을 보며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을까?
‘안셀?’
심장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안셀과 오스카는 깊이 연결되어 있었고 그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오스카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안셀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에스티아가 그랬을 리가 없었다. 보나 마나 그 빌어먹을 대공이겠지.
“아직까지 그렇게 팔팔할 리가…….”
오스카가 이를 으드득 갈았다. 원래대로라면 에스티아는 물론이고 에버하르트도 고통으로 반쯤 정신이 나가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 하급 악마 따위가 기어코 일을 그르치는 구나!’
오스카가 초조하게 응접실을 돌아다녔다. 이곳은 에스티아의 향기가 가장 짙게 배 있는 곳이었다.
무력하게 바닥에 쓰러졌던 에스티아. 오스카는 불안하지만 그래도 확신하고 있었다. 살든 죽든 그녀가 다시 제 밑으로 들어올 거라고.
‘안 되겠어, 내가 가 봐야…….’
오스카가 응접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차가운 냉기만이 홀로 남은 주인을 감쌌다.
-사람이 되고 싶으냐?
오스카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과거에 안셀이 했던 말이었지만, 지금 목소리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악마가 유혹했을 때 뿌리쳤어야지. 그랬다면 너는 꽃으로 계속 행복했을 거다.
오스카가 뒤를 홱 돌아보았다.
바람을 타고 꽃잎이 흩날리고 있었다. ‘꽃 창고’에서 날아오는 히아신스의 꽃잎이었다.
“그럴 리가…… 이 목소리는…….”
오스카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기억이 맞다면 이 목소리는…….
-저주는 너만 쓸 수 있다고 생각했나? 내 딸에 더러운 흑심을 품은, ‘변절된’ 꽃을 내가 그대로 놔뒀을 거라고?
“조이 글레멘드…….”
오스카가 허공을 맹렬하게 노려보았다. 그저 병들어 죽은 게 아니었다니. 분명 철두철미하게 흑마법을 걸어 죽게 하였는데.
-내 딸을, 괴롭게 한 대가는 톡톡하게 치러야지.
바람이 더 세차게 불기 시작했다. 오스카가 팔을 들어 올릴 때쯤에는, 도저히 멀쩡히 서 있을 수 없을 정도였다.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사람이 된 것까지는 불쌍히 여길 수 있었어. 하지만 내 딸을 탐내고, 에스티아를 갖기 위해 나에게 흑마법을 걸고, 그런 나를 흑마법으로 살리겠다고 한 건…….
분노에 찬 목소리가 오스카를 날카롭게 휘감았다.
-내 죽어서도 용서가 할 수 없구나.
“악!”
순간 심장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느껴졌다. 오스카가 심장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꽃에 봉인된 힘을 전부 ‘라 빅터’에 옮겨 놓았다.
“뭐?”
오스카가 핏발 선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봉인을 못 깨고 있었지? 그러니 에스티아가 가져온 꽃에서도 원래 힘을 빼내지 못했겠지. 오로지 내 핏줄만이 해방할 수 있도록 해놨으니까.
“네년이 기어코!”
-하필 마지막으로 남은 꽃이 ‘라 빅터’구나.
오스카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라 빅터’를 마지막에 찾게 한 건 그냥 그런 게 아니었다. 가장 많은 힘이 봉인된 꽃이었으니, 에스티아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을 때 찾으라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내가…… 내가…….”
당했구나.
오스카는 차마 그 단어는 입에 담지 못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조차 패배를 온 힘을 다해 부정하고 있었다.
“설령…… 그 힘들을 다 공중분해한다고 내가 죽을 거라고 생각하나?!”
오스카가 비릿하게 웃었다. 설령 그 힘들이 없어도 그는 살 수 있었다. 흑마법으로 얻은 힘은 그만큼 강력했다.
-어리석긴.
조이의 차가운 음성이 오스카의 심장에 꽂혔다.
-봉인된 마력이 갈기갈기 찢기는 순간, 너에게도 끔찍한 고통이 찾아갈 것이다.
오스카가 차마 말을 꺼내진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네가 원래 꽃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나?
오스카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조이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라 빅터’는 너의 분신이야.
모르지 않을 텐데.
오스카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랬다. 그는 꽃이었고, 악마에 의해 사람이 됐다. 그때 ‘안셀’은…….
‘라 빅터’만큼은 꺾으면 안 된다고……. 그랬기에 혹시라도 에스티아가 허튼짓할까 따라갔던 것이겠지.
하지만 지금 안셀의 목이 잘렸는데…….
“안 돼!”
안 돼! 안 돼!
오스카가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러댔다.
심장이 찢기는 듯 아팠지만 오스카는 일어났다. 에스티아가 완전히 꽃을 꺾기 전에 어서…….
-늦었어. 그러게 네 원래 주제가 사람이 아니라는 걸,
기억했어야지.
“아아아아악!”
오스카의 다리가 누가 타의로 으스러뜨리듯 뚝 꺾였다.
우드득.
오스카는 그 소리가 자신의 몸이 부서지는 소리인지, 꽃이 꺾이는 소리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없다고! 안 돼! 이렇게!”
오스카가 고통에 못 이겨 몸을 비틀었다. 그 모습이 마치 선악과를 눈앞에 둔 뱀처럼 보였다.
-걱정하지 마라. 죽게 놔두진 않을 테니.
끝까지 살아서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지.
조이의 말은 그렇게 들리는 듯했다.
오스카는 일어나려고 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이렇게 허무하게 질 리가 없었다.
에스티아. 에스티아.
의식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오스카는 에스티아의 이름을 불렀다.
난 널 사랑한 죄밖에 없어. 네가 그 남자를 사랑하듯, 나도 널 사랑한 것뿐이야.
그래서 인간이 된 것뿐이야.
오스카가 동아줄을 잡듯 천장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의 손을 잡는 대신, 현관문이 거칠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에버하르트의 병사들이었다.
오스카는 몸에 남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이동 마법 수식을 읊었다.
병사들의 손이 닿으려는 찰나, 오스카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 * *
악한 기운이 떠난 ‘라 빅터’는 꺾이면서도 에스티아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잊고 있었던 기억을 선물해 주고 사라졌다.
로셸에게 마법으로 정신적 학대를 받아 쓰러졌을 때의 기억이었다. 로셸은 그때 이렇게 중얼거렸다.
-네 어미는 죽을 만해서 죽은 것이야.
로셸이 초조하게 두 주먹을 쥐었다 폈다.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나는…… 그냥 그 악마 같은 후작이 그 여자를 죽게 놔뒀을 뿐이야. 그 여자가 자꾸 오만하게 구니까!
‘거짓말.’
에스티아는 그저 변명이라고 확신했다. 뛰어난 마법사였던 어머니를 질투한, 겁쟁이가 지껄이는 말이었다.
아쉽긴 했다. 로셸의 최후를 보고 가지 못하는 것이. 그래도 에버하르트는 살렸으니까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에버…….’
그런데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 사람을 제대로 사랑도 못 해 보고 떠나는 게 아쉬웠다. 사무쳤다.
‘기억 하나만 더 들려줘…….’
에스티아는 사라지는 ‘라 빅터’를 향해 흐느꼈다. 그를 추억할 수 있는 소중한 기억 하나만 더 들으면 소원이 없을 거 같았다. 다른 세상에 살다 와서 이곳의 기억이 흐릿한 게 처음으로 원망스러웠다.
-에스티아 글레멘드.
푹 숙이고 있던 에스티아의 고개가 퍼뜩 들렸다. 에스티아가 목소리를 찾듯 간절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절벽?’
그러자 하얀 안개가 걷히고 저 멀리 가파른 절벽이 보였다. 그 아래로 검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 앞에는 한 여자가 위태롭게 서 있었다. 옆에는 술병 몇 개가 굴러다녔다.
에스티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점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에스티아는 절벽 끝에 서 있는 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여자는 울고 있었다. 마치 마지막으로 울음을 토해 내는 것처럼. 서글프게 울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알 수 있었다.
머릿속에는 없지만 분명 자신의 기억이 맞는, 그 과거 속의 저 여자는,
에스티아,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