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 벌, 아니면 보상
‘저 날은…….’
에스티아는 흐릿한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에스티아가 입고 있는 옷이 낯이 익었다. 머리색과 유사한 짙은 남색 드레스. 수수하면서도 은은한 분위기의 그 드레스는 분명 에스티아가 아는 옷이었다.
‘설마 그 빙의한 날.’
에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뱉었다. 기억이 맞다면 저 드레스는 에스티아가 이 소설에 빙의한 날에 입고 있었던 옷이었다.
하지만 저 기억은 그녀가 이 소설에 빙의, 다시 돌아오고 나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그 전날이었다. 에스티아가 에버하르트의 집에 찾아가 그의 멱살을 잡고 메르헨 앞에서 끌려 나왔던 날.
‘그대로 방에서 자고 있던 게 아니었구나.’
저 기억이 맞다면 에스티아는 그 일을 당한 후 몰래 저택을 빠져나와 이 절벽으로 온 게 분명했다.
에스티아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곧 위태롭게 쓰러질 거 같던 여자에게.
그녀와 자신 사이에 딱 한 걸음 정도가 남았을 때, 에스티아는 몸이 앞으로 쏠리는 걸 느꼈다.
울렁이는 느낌. 흔들리는 시야. 에스티아가 고개를 젓고 눈을 떠 보았다. 어느새 에스티아는 그 기억 속의 그녀처럼 짙은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에스티아의 속에서는 이런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제 더는 못 버티겠어. 더는 이렇게 상처받으면서 살 수가 없어.
에스티아는 절벽 아래의 검은 강을 바라보았다. 너무 짙어서 자신의 고통마저 보이지 않을 거 같았다.
에스티아의 발치에 술병이 치였다. 그녀도 이 술을 어떻게 구해서 온 건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집 안에 있는 창고에서 가져온 거겠거니 생각했다.
-유서는 없는 게 나을 거야. 어차피 에버하르트가 읽지도 않을 텐데 뭐.
에스티아는 서럽게 울었다. 아이처럼 엉엉 울며 절벽 아래로 슬픔을 토해 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두려움과 안식이 동시에 존재했다. 저 어둠이 그녀를 삼켜 버릴 거라는 두려움, 동시에 이제는 더는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심.
에스티아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2년 전에 에버하르트가 그녀에게 선물로 준 드레스였다.
-그래도 그 사람의 흔적하고 같이 가니까 그렇게 외롭진 않네.
에스티아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그녀의 고통은 끝날 수 있었다.
-잘 있어, 에버.
에스티아는 아까 낮에 보았던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혐오와 경멸이 가득한 얼굴. 그마저도 그립게 만드는 사람.
에스티아가 앞으로 발을 뻗었다. 한 발이 허공에 닿자 무게 중심이 앞으로 흔들렸다.
에스티아가 잠시 버둥거리다가 뚝 움직임을 멈췄다. 에스티아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티아!
그러나 그 시도는 허무하게 끝나 버리고 말았다.
평온하던 에스티아의 얼굴이 훅 다가온 감촉에 혼돈으로 가득 찼다. 에스티아가 파르르 떨며 자신의 허리를 감은 팔을 바라보았다.
-하아, 하아.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숨소리와 이 팔의 주인을 그녀가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너 미쳤지. 미친 거지.
팔의 주인이 그녀의 몸을 홱 돌려 온 힘을 다해 움켜쥐었다. 에스티아가 작게 신음 소리를 흘렸다. 반면에 그의 눈에는 그런 게 보이지 않는 듯 그의 목소리는 갈수록 커져 갔다.
-겨우 그 정도 가지고 이렇게 포기해!? 너한테 내가 그 정도였어? 네가 뭔데 날 두고 죽으려고 해, 네가 뭔데!
에스티아는 대답할 수 없었다. 술기운이 점점 올라오면서 말 한마디 내뱉을 수 없는 정도였다.
-아니, 아니야. 그래, 내가 잘못했어. 일단…… 내려가자.
에버하르트가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에스티아가 그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더니 작게 속삭였다.
-내가 여기에 있는지는 어떻게 알았어?
-네가 잘 있는지 에이커를 시켜서 확인했는데, 네가 방에 없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이안이 머무는 별관의 불은 켜져 있었지. 즉, 너는 이안 없이 혼자 이동했다는 소리였고.
-뭐야, 날 감시하고 있었어?
에스티아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에버하르트는 그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왜 웃어?
-그냥 이제 좀 희망을 봐도 될까 싶어서.
에스티아가 지친 듯이 말했다. 에버하르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을 찾았어. 다시는 이러지 마.
-그러면 나 이제 메르헨 셰린포드 앞에서 수치스럽게 끌려 나가지 않아도 되는 거야?
-하, 그건.
에버하르트가 떨리는 숨을 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2년 동안 그녀를 피함으로써 그녀를 벌주고, 지켜주려는 계획이 한순간에 무산이 되었다. 더는 그녀를 외면할 수 없을 거 같았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내일 일단 나랑 만나. 사과하라는 핑계로 부를 테니까, 곧장 우리 저택으로 와. 알겠지?
-…….
-에스, 티아!
에스티아가 그저 웃기만 하자 에버하르트가 절박하게 그녀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에스티아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서도 에버하르트는 안심이 되지 않는지 한참을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에스티아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럴게.
코앞에서도 들릴까 싶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에버하르트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곧 살짝 틈을 벌린 입술 사이로 뜨거운 감촉이 내려앉았다. 에스티아가 그게 무엇인지도 알기 전에 에버하르트는 그녀의 몸을 꽉 끌어안고 작은 입술을 머금었다.
에버하르트의 혀가 에스티아의 작은 틈을 벌리며 깊게 들어왔다.
잠시 허공을 휘젓던 에스티아의 두 손은 곧 그녀의 키만 한 검은 겉옷을 움켜쥐었다.
그 이후 기억은 드문드문 끊겨 어느새 에스티아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밤에서 새벽, 새벽에서 동틀 녘이 될 때까지 에버하르트는 옆에 있었다.
희미한 열기가 기억난다. 술 취한 정인을 남자는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에스티아가 그 품속으로 파고들 때마다 그는 시험받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마지막 선을 넘진 않았다.
아침 해가 떴을 때, 에버하르트는 조용히 방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에스티아의 위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마치 둘의 관계를 방해하듯 불길한 연기였다.
에스티아는 느낄 수 있었다. 저기에 지금 그녀의 영혼이 들어가 있다고. 현재의 에스티아와 미래의 에스티아의 영혼이 결합이 되었다고.
‘어떻게 알고 이때 흑마법을 부린 거지?’
화가 났다.
방법을 생각하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어쩌면, 에스티아를 미친 듯이 찾아 헤매는 에버하르트를 모습을 봤었을 수도 있다.
그럼 알았겠지. 에버하르트가 메르헨을 좋아하는 건 다 연기였다고.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에스티아는 기억이 끝나감을 깨달았다.
에스티아는 이것이 벌인지 보상인지 알 수 없었다.
에버하르트가 다시 그녀를 찾아왔다는 걸 앎과 동시에,
그들의 관계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고 말하는 거 같아서.
‘에버하르트’
에스티아는 마지막으로 그 이름을 한 번 더 불러보았다.
어쩌면 더 빨리 외쳤을 수도 있던 그 이름을.
* * *
에버하르트는 안셀을 막기 위해 열 번은 더 검을 휘둘러야 했다. 설령 안셀을 ‘한동안’ 막는다고 쳐도 그때는 그도 유령이 되어 있을 거 같았다.
이제는 타는 정도가 아니라 살이 찢기는 고통까지 느껴졌다. 에버하르트는 이제 곧 마지막이라고 느꼈다.
‘응?’
그런 그가 몸이 가벼워졌다고 느낀 건 안셀의 오른팔이 여덟 번째 떨어졌을 때였다.
‘저주가…….’
에버하르트가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저주가 사라지고 있었다. 몸에 새겨져 있던 문양은 물론 몸을 점령하고 있던 고통마저 없어지고 있었다.
저주를 벗어나고 싶었던 건 맞지만, 그 순간 그의 마음을 찾아온 건 후련함이 아닌 불안감이었다.
불길했다. 에버하르트는 끔찍한 상상에 의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써야 했다.
그래서 에버하르트가 몸을 틀어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안셀이 꿈틀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에스티아를 쫓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뭇잎과 가지가 밟히면서 흔적이 남아 있었고 그는 그걸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숲속의 지독한 고요함이 그를 미치도록 불안하게 만들었다.
빛이 들어왔다. 숲 안에는 어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무 몇 그루가 이제 막 자라고 있는 땅 위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비가 멈춘 것이다.
마치 원처럼 햇빛이 자리한 그 땅 위에, 에스티아가 쓰러져 있었다.
평온한 표정이었다. 땅을 요람 삼아 자는 아기 같기도 했다.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함부로 깨울 수 없을 만큼.
하지만 에버하르트는 검을 내려놓고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끼고 있던 장갑을 쥐어뜯듯이 벗고 그녀의 심장에 귀를 갖다 댔다.
“안…… 안…….”
안 들려. 잘 안 들려.
그는 자신이 무슨 소리를 내뱉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코 밑에 손가락을 갖다 대보고, 제대로 할 줄도 모르면서 맥을 짚어 보았다.
“아…… 아…….”
에버하르트가 눈을 부릅떴다. 그는 눈앞에 있는 분명한 사실을 부정했다.
다급한 손짓으로 에버하르트가 소매 단추를 풀었다. 두 손목이 움직이기 편하도록.
그러고는 곧바로 가슴 부근에 손을 올리고 남은 힘을 다해 내리눌렀다.
저주의 여파로 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그는 쉬지 않고 에스티아의 가슴을 압박했다. 압박을 몇십 번 한 뒤에는 생기 없는 입술에 숨을 불어넣었다.
‘제발, 제발!’
몸에 남아 있는 온기가 그를 미치게 했다. 쓰러진 지 얼마 안 된 게 분명한데 에스티아가 깨어나지 않았다.
“윽…… 흐…….”
에버하르트는 짐승이 울부짖듯 소리를 지르며 계속 에스티아의 심장을 압박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에스티아가 없는 세상을 그려 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찰나에 생긴 괴로운 가정은 어느새 파도처럼 에버하르트의 이성을 잠식하고 있었다.
“제……발…… 제발…… 에스티아.”
창백해진 에스티아의 얼굴 위로 에버하르트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눈물인지, 혹은 그녀의 뺨에 맺힌 이슬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든 노력에도 에스티아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더는 미련이 남지 않는 얼굴로.
그 이후로도 수십 번은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에스티아는 깨어나지 않았다.
누가 듣는다면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 못 할 정도로 에버하르트는 절규했다. 작은 드레스를 움켜쥐고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아아아악!
마치 그렇게 하면 그녀가 돌아올 것처럼 에버하르트는 소리를 지르며, 이미 온기가 사라지고 있는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하얀 목에 얼굴을 묻었다. 떠나지 말라고 얘기하는데도 에스티아는 반응이 없었다.
에버하르트는 계속 울었다.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떠남으로써 이제 자신의 삶도 끝났다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