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 판도라의 상자
누워 있는 여자에게서 남자를 떼어놓는 데 장장 남자 다섯 명이 들러붙어야 했다. 그마저도 꼼짝을 하지 않아서 마법사까지 데려와 마법까지 동원해서야 겨우 떨어트릴 수 있었다.
거기에는 기사들이 감정적이었던 것도 있었다. 그들은 평생 흔들리지 않던 자신의 지도자가 처참하게 무너진 걸 목격했다. 에버하르트는 말 그대로 아이처럼 울었고, 기사들은 그를 잡아당기면서도 매정하게 끌어내지 못했다.
사태를 끝낸 건 아이비였다. 그녀는 다시 에스티아로 달려가려는 에버하르트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에스……티아…….”
흑마법에 의해 저주까지 걸렸던 남자였다. 게다가 그 저주로 인해 끔찍한 고통까지 참아 가면서 오스카에게 맞섰다. 깨어 있는 것 자체가 곤욕일 텐데, 기절하라고 한 공격에도 에버하르트는 연신 에스티아를 불러 댔다.
“아가씨는, 죽……었습니까?”
에이커가 창백해진 얼굴로 다가왔다. 아이비가 에스티아의 코 아래에 손을 갖다 댔다.
만약 그녀가 조금이라도 인내심이 없었다면 동요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에스티아의 숨은 미약해서 살아있다고 알아차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당장 영애를 옮겨라, 빨리!”
아이비가 다급한 목소리로 기사들에게 일렀다. 기사들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아이비는 에스티아가 시체처럼 들어 올려지는 걸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해했다, 에버하르트를. 아이비도 온 힘을 다해 슬픔을 억누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에버하르트처럼 울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에버하르트가 쓰러진 지금, 기사들이 의지할 건 아이비밖에 없었다.
“에이커 기사.”
“네.”
에이커는 아직도 에버하르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단장님도 글레멘드 공작저로 옮겨. 깨어나자마자 에스티아를 찾을 테니.”
“그러겠습니다.”
에이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은 기사들이 들것으로 에버하르트를 옮겼다.
“에이커.”
“네, 부단장님.”
에이커가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비 옆에 섰다. 아이비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꼭 다 처단해야 한다. 하나도 남김없이.”
“그러겠습니다.”
아이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에이커가 대답했다.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 * *
오스카 후작저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주인도, 그를 따르던 집사도 사라졌다. 기사들은 후작저 안을 쥐 잡듯이 뒤졌고, 잎이 떨어지고 있는 꽃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한 창고에서 의식이 없는 이안을 발견했다.
아이비가 도착한 건 그때쯤이었다. 아이비는 이안이 무사하다는 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단장님!”
아이비는 기사들이 모아놓은 흑마법의 도구들을 보고 있었다. 피가 담겨 있는 병, 마법진이 그려진 수십 권의 공책. 흑마법에 희생된, 피해자들이 적혀 있는 리스트.
그러나 그것들은 어쩌면 곧 맞닥뜨리게 된 아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뭐지?”
아이비의 예리한 눈빛이 황급하게 달려온 기사에게로 꽂혔다.
“그……그게…….”
기사는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얼굴이 하얘져 있었다.
“뭔데 그러는가?”
아이비는 기사의 눈빛 속에서 짙은 공포를 보았다.
“후작저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방을…… 뒤져 보았는데…… 거기에…… 시신이 있었습니다.”
“하.”
아이비가 이마를 짚었다. 역시 없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시신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지 않나?”
“그렇습니다만, 제가…… 아는 얼굴이었습니다.”
그 순간 싸한 느낌이 아이비의 등줄기를 타고 스쳐 지나갔다.
“누군데.”
아이비는 제발 그녀가 아는 사람이 아니길 바랐다. 그랬는데.
“……글…… 글레멘드 공작 부인입니다. 일부러 부패할까 봐 오스카가 마법으로 보존……해 놓은 거 같습니다.”
“아.”
아이비의 숨이 거칠어졌다. 속이 메스꺼워지고, 머리에 현기증이 일었다.
아이비는 로셸이 에스티아를 위협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태후 레이첼로부터 로셸의 실체를 들었다. 그가 조이의 시신을 숨긴 거 같다고도.
“에스티아.”
아이비가 결국 뒤를 돌아 고개를 숙였다. 아주 세세한 내막까지 알지 못해도 대략 어떻게 돌아가는지 머릿속에 그려졌다.
‘도대체 왜? 그 좋은 사람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리고 에버하르트는? 에버하르트는 도대체 뭘 잘못했는데?
무너지지 않으려고 했지만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보고하러 온 기사도 참담함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한 것밖에 없다. 집착을 사랑으로 착각해 악마들이 날뛰지만 않았어도, 두 사람은 괜찮았을 것이다. 아무리 크게 싸워도 언젠가는 화해하고 서로를 용서했을 것이다.
아이비는 눈물을 닦았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에버하르트까지 정신을 놓은 마당에 그녀까지 약해질 수는 없었다. 아이비가 기사를 향해 몸을 틀었다.
“라 빅터 오스카의 행방은?”
이제 더는 오스카는 후작이 아니었다. 적어도 아이비가 예상하기에는 그랬다.
“기사들이 기운을 추적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찾아오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메르헨 셰린포드는?”
아이비가 마치 벌레를 본 것처럼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황실 감옥에 있습니다. 일단 죽지 않게 고위 마법사들이 치료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는 물론 칼 셰린포드, 로셸 글레멘드의 행방도 확보해. 인신매매한 놈들이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이비가 말끝을 흐리며 슬픈 기색을 띄웠다.
“글레멘드 공작 부인은 잘 모시고.”
“네, 그러겠습니다.”
기사가 허리를 숙이고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아이비도 마음을 진정시키고 빠르게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웠다.
먼저 로셸 글레멘드와 칼 셰린포드를 호송해 오고, 자백을 확보한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메르헨 셰린포드를 심문한다.
끝으로, 라 빅터 오스카를 찾아 벌을 받게 한다.
‘가장 큰 문제는…….’
아이비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에스티아와 에버하르트였다.
에스티아가 살아나지 못하면 에버하르트의 삶도 끝이 난다. 그 남자는 절대 에스티아 없는 삶을 살아갈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친구, 가족, 아끼는 동료까지 잃을 위기에 처했다.
에스티아가 죽으면 삶이 망가지는 이들은 정말 한두 명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이제 아이비도 포함이었다. 에스티아의 친절함과 온화함은 아이비에게 순수한 우정이란 무엇인지 알려 주었다.
‘제발 신이시어.’
아이비는 처음으로 신을 찾았다. 전쟁에서도 찾지 않았던 신을, 전쟁이 끝난 황폐한 광야에서 찾고 있었다.
‘에스티아를 살려 주세요.’
아이비는 애써 강인한 척 움직이면서도,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었다.
기적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 * *
몸이 깊은 물에 잠긴 듯했다. 아무리 팔을 휘저어도 위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마치 처형을 당했던 그때처럼 한없이 밑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무서워.’
에스티아는 팔을 휘젓는 걸 멈추고 몸을 웅크렸다. 마치 엄마 배 속에 있는 아이처럼.
어느새 발목에 채워져 있던 족쇄가 사라지고, 편안한 기운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에스티아는 두려움을 잊고 물길에 몸을 맡겼다. 설령 지금 이대로 죽는 거라고 해도, 원래의 시작점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에스티아.
누군가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면 에스티아는 계속 눈을 감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운 목소리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면서 에스티아는 생각했다. 다시 듣고 싶은 목소리라고.
-에스티아, 일어나.
에스티아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평온하다고도 말하고 싶었다.
-에스티아, 티아. 나 버리지 마. 나만 두고 가지 마.
아마 목소리의 주인이 울지 않았다면 그녀는 끝까지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그런데 서글픈 울음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에스티아는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침대가 보였다. 이제 에스티아는 땅에 발을 딛고 천천히 침대를 향해 다가갔다.
그 옆에는 남자가 있었다. 은발에 옅은 녹색 눈을 가진 남자. 그 남자는 눈이 벌게진 채로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의 드레스와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있었다.
“당신 없이 어떻게 해? 당신이 깨어나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해?”
에스티아는 남자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울면 탈진한다고. 많이 아플 거라고.
‘울지 마, 에…….’
에버하르트.
에스티아가 뚝 얼어붙었다. 그녀의 시선이 남자에게서 여자로 향했다.
자신이 누워 있었다. 아무리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을 거 같은,
차가운 자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