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 그녀가 있는 곳으로
목이 타는 듯했다. 물이 마시고 싶어서가 아니라 눈을 뜨면 어떤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기 때문이었다.
에버하르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만큼 아침이 무서웠던 적은 없었다고. 그동안 숱하게 ‘희망이 없다’라고 외쳤던 건 실상 배부른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고.
머리가 돌을 얹은 듯 무거웠다. 어떤 ‘사실’이 머릿속에 떠오른 건 아니었지만 의식이 돌아온 에버하르트의 입가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 흐…….”
그는 애쓰고 있었다. 깨어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전하”
온 힘을 다해 의식을 누르는 에버하르트의 귓가에 익숙한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열이…… 전하…… 열이 안…….”
“의원을…… 다시…….”
걱정스럽게 속삭이는 목소리. 에버하르트는 자신의 옆에 에이커와 이안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럼, 그렇다면.
“잠시만…… 의원을 데리고…….”
아니야. 의원이 아니야. 나에게 정말 필요한 사람은.
“티아…….”
이름을 내뱉는 동시에 속이 불에 타는 듯 끔찍한 고통이 에버하르트를 짓눌렀다.
‘에스티아, 에스티아는 어디 있지?’
그 이름을 떠올리니 더 이상 눈을 감고 있을 수가 없었다. 에버하르트가 없는 힘을 끌어모아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전하! 정신이 좀 드십니까?”
에이커가 다급한 얼굴을 한 채 바짝 침대로 다가왔다. 옅은 녹색 눈은 잠시 그를 응시하더니, 누군가를 찾는 듯 움직였다.
“에…… 에……스티아는…….”
목에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유를 짐작하다 보니 저절로 땅에 차갑게 누워 있는 에스티아가 떠올랐다.
“으…… 으…… 헉…….”
에버하르트가 몸을 비틀었다. 에이커는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로 방을 뛰쳐나갔다.
“전하!”
이안이 에버하르트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몸 안에 세포 하나하나가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몸의 마디마디와 온 장기가 끊기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뭐가 뒤틀리고 있었는데 그게 자신의 몸인지, 마음인지 알 수 없었다.
-안 돼요! 숨을 천천히 쉬어야 해요. 천천히!
후, 하. 후, 하.
“하…… 하아…….”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 싶었는데, 그의 머릿속에 그녀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에버하르트가 입을 틀어막고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심장의 떨림이 잦아들고 머릿속에 자는 동안 잊고 있던 생각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의원을 데리고 왔어요.”
에이커가 급하게 문을 열고 의원을 데리고 들어왔다. 에버하르트가 언제 그랬냐는 듯 이안을 밀치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에스티아는.”
에이커의 걸음이 뚝 멈췄다. 그의 눈에 마치 지옥에서 온 듯한 광기가 보였다.
“전하, 일단 진정하시고…….”
“에스티아는 어디에 있냐니까!”
안 그래도 더 창백해진 인상에 핏발 선 눈으로 소리까지 지르니 에이커의 등골이 송연해졌다. 이안은 각오했다는 듯 침착했지만 의원은 당장이라도 도망갈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어디 있어, 에스티아는!”
에버하르트가 식은땀을 흘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에이커는 차라리 그를 기절시킬까도 잠깐 고민했다.
“에스티아는 어디 있어? 제발…… 죽었……다는 말만은…….”
그 고민은 에버하르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자마자 곧 사라졌다. 에이커는 바로 에버하르트의 왼쪽 팔을 부축했다.
“방에 누워 계십니다. 가시죠.”
에버하르트가 에이커의 도움을 받아 침대에서 일어났다. 안절부절못하는 의원을 지나쳐 빠르게 2층 계단으로 올랐다. 지금 여기가 어디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어렸을 적 질리도록 오고, 불과 얼마 전에도 온 곳이니.
에스티아를 보러 갈 때면 몇 시간씩 걸리는 먼 거리도 몇 초처럼 느껴질 만큼 걸음이 가벼웠는데, 지금은 무거운 추가 달린 것처럼 버거웠다.
아픈 몸 때문인지, 아직 무서운 진실이 남아 있을 거 같아서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조금이라도 빨리 그녀를 보러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원래는 사용인이 열어 줘야 할 문도 직접 열 만큼 에버하르트는 다급했다. 너무 불안해서 에이커의 부축도 마다하고 그녀의 침실로 달려갔다.
문이 열렸다. 소박한 침실 한가운데에 하얀 남색 커튼이 쳐져 있는 침대가 있었다.
숨소리. 그가 가장 먼저 확인한 건 숨소리였다. 작게 색색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겨우 에버하르트가 발걸음을 움직였다.
“티아……?”
에버하르트의 목소리가 울음에 잠긴 채 흘러나왔다. 하얗고 긴 손이 커튼을 젖히자 작은 손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선이 위로 움직였다. 아담한 어깨, 그 위까지 내려오는 남색 머리, 그리고…….
“티아, 나 왔어.”
에버하르트가 침대 옆에 무릎을 꿇었다. 작은 손을 들어 올려 두 손에 꼭 쥐었다. 차가운 두 손에 후후 하고 숨을 불어넣었다. 차가운 손이 조금이라도 따뜻해지길 바라면서.
“늦게 와서 미안해.”
슬픔이 다시 후드득 떨어졌다. 에버하르트가 두 손에 이마를 갖다 댔다.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미안해.”
에버하르트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에스티아의 뺨에 손을 가져갔다. 평소라면 에스티아는 미간을 찌푸렸을 것이다. 잠귀가 밝았으니까. 얼굴을 만지는 것도 금방 알 것이었다.
“티아.”
하지만 이번에는 깨어나지 않았다. 에스티아는 혹시라도 누가 붙잡을까 봐 멀리 도망가 버린 거 같았다.
에버하르트의 숨이 떨렸다. 뒤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에버하트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문가에 서 있던 의원이 파드득 놀랐다.
“에스티아의 상태는?”
옆에 있던 에이커는 드디어 올 게 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그게…….”
의원은 몇십 년 동안 이 일을 한 전문가였지만 사랑에 미친 남자의 살기를 감당할 만큼 기가 세진 않았다.
“어떻냐니까!”
결국 에버하르트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에이커는 후다닥 에버하르트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전하, 일단 진정하세요. 이러시는 거 아무것도 도움이 안 됩니다.”
에이커의 이성적인 말에 에버하르트가 겨우 숨을 골랐다. 의원이 땀을 흘리며 방 안에 발을 들였다.
“아가씨의 상태는…….”
의원은 차마 에버하르트의 눈을 보지도 못했다. 그가 전할 진실이 그만큼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에버하르트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의원이 뜸 들이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기에, 그는 다시 현실을 도피하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아가씨는…… 쉽게 말씀드리자면…….”
의원이 차마 땀을 손으로 훔치지도 못한 채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 숨만 쉬시는 상태입니다.”
“그 말은…….”
에버하르트의 눈동자가 일순 공허해졌다. 의원이 더욱 허리를 숙였다.
“어떠한 자극에도 반응이 없으십니다. 그것은…… 그게 이제…….”
“아무 말도 하지 마.”
뜨문뜨문 이어지는 의원의 말을 에버하르트가 가로막았다.
“그딴 말 말고, 살릴 수, 살릴 수 있는…….”
“죄송합니다.”
의원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으로 숙였다.
“전하.”
에이커가 에버하르트를 불렀지만 아무런 반응도 끌어낼 수 없었다. 마치 에스티아처럼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처럼.
“나가.”
에버하르트가 의원을 바라보았다.
“다 나가.”
“전하.”
“제발 부탁이니까, 나가!”
이러다가 에버하르트까지 나빠질 판이었지만 에이커는 그 말을 거역할 순 없었다. 그는 덜덜 떠는 의원을 끌고 방을 나갔다.
“티아.”
에버하르트가 하얀 손을 다시 붙잡았다.
“티아, 일어나 봐. 응? 나랑 할 얘기도 있잖아.”
에버하르트는 자신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나오는 대로 입을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에스티아, 티아. 나 버리지 마. 나만 두고 가지 마.”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의 손을 잡고 자신의 뺨에 갖다 댔다. 작디작은 손을 꽉 움켜쥐고 끝도 없이 울부짖었다.
“당신 없이 어떻게 해? 당신이 깨어나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해? 나는…… 나는…….”
이제는 누가 들으면 말과 울음을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에버하르트는 끊임없이 절망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살려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게 의미가 없다.
어서 정신을 차리고 에스티아를 살려야 하는데, 입에서는 울음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끔찍하게도, 그녀에게 자신이 지껄였던 말까지 생각나 버렸다.
-저한테 진정한 사과를 하겠다고요? 영애가 다른 영애에게 행패를 부린 것에 대해 저한테 사과를 전한다니.
불안해서 그랬던 거였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냥 한 번 더 저를 보고 싶은 거라고 말하세요. 그럼 적어도 고민은 해 볼 테니까요.
사실은 내가 당신을 한 번 더 보고 싶었어. 그래서 그랬던 거였어.
“아아아아아악!”
빨리 움직여야 했다. 에스티아를 살리려면.
그러나 몸은 움직이지 않았고, 새된 비명만 터져 나왔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슬픔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문이 열렸다. 발걸음은 세 개. 들어온 사람은.
에버하르트는 들었지만 누구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마치 몸이 스스로를 죽이듯 목 아래에서 피가 벌컥 쏟아져 나왔다.
에버하르트의 몸이 풀썩 아래로 꺾였다.
독도, 저주도 아니었다. 원인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전하!”
경악에 찬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지만 에버하르트는 대답하지 못했다.
에스티아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