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 히아신스 (1)
“마나혈의 문제입니다. 정신적 충격 때문이니 약만 잘 드신다면 금방 나으실 겁니다.”
의원이 침대 근처로 모인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이따금 의원의 시선이 시체처럼 누워 있는 에버하르트로 향하기도 했지만, 곧 사람들로 돌아왔다.
그도 그럴 것이 에버하르트는 천장을 바라본 채로 미동도 안 하고 있었다. 흡사 밀랍 인형을 보는 듯한 모습에 가끔 들르는 사용인들도 감히 쳐다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바일 가의 집사와 하녀장이 찾아와 그에게 몇 마디를 붙여 보았지만 역시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바일 저택이라도 지키는 게 낫다는 이안의 말에 다시 돌아갔다.
“전하.”
고요해진 방 안에 이안의 목소리가 잔잔히 퍼졌다. 에버하르트는 여전히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다만 좌절했다기보다는 깊이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속이 문드러지는 건 에버하르트뿐만이 아니었다. 이안은 에스티아가 죽는다면 뒤를 따라갈 생각도 하고 있었다.
다만 그럼에도 희망을 갖고 있었다. 강인한 우리 아가씨가 이겨 내고 다시 일어날 거라는 희망.
다만 안타깝게도 충분히 그를 기다려 줄 여유가 없었다.
“전하. 정신 좀 차리세요.”
“…….”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안이 계속 에버하르트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전하가 이러고 계실 때입니까? 아가씨를 저렇게 만든 사람들에게 벌을 주셔야죠. 메르헨 셰린포드는 어쩔 겁니까? 라 빅터 오스카는요? 찾지도 못하셨잖습니까.”
이안의 힐난에 에버하르트의 눈동자가 조금씩 움직였다. 이때다 싶어 이안은 그가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문제를 꺼내 들었다.
이안은 침대 맡에 선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곧 그의 의식이 어린 시절 기억에 닿았다.
-이안 웬트워스! 에스티아와 둘이서만 있지 말라고 했지!
-제가 아가씨의 호위 기사인데 어떻게 따로 있습니까?
-하녀라도 옆에 있게 하라고 했잖아!
이안은 평소에 샌님이라고만 생각했던 에버하르트를 노려보았었다. 유독 다른 사람보다 이안에게 에버하르트는 많이 질투했었다.
그래, 질투.
“저는 아가씨가 금방 깨어나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곳에 전하가 계시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
“얼마 전에 약초를 구하러 갔을 때 아가씨가 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었습니다.”
이안이 에버하르트의 얼굴 근처로 다가왔다.
“저에게 ‘결혼’하자고 하더군요.”
“……!”
역시 에버하르트의 표정에 변화가 나타났다.
미간에 미세한 주름이 가고 녹색 눈동자가 이안을 향해 떼구루루 움직였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진짜인데요. 저한테 결혼하자고 하셨어요. 물론 이성적인 마음이 아니고 편해서 그러신 거 같습니다만.”
“이안……!”
에버하르트가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이안은 물러서지 않고 몰아붙였다.
“전 아가씨를 위해서 뭐든지 합니다. 그게 결혼이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너……!”
에버하르트가 언제 누워 있었냐는 듯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고는 이안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음 내가 하려고 했더니 당하네.’
이안이 속으로 멋쩍어하는데 에버하르트가 그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네가 제정신이 아니지? 감히 누구와 결혼을 한다고?”
“제정신이 아닌 건 제가 아니라 전하 같은데요.”
이안이 태연하게 맞받아쳤다. 에버하르트가 멱살을 쥔 손에 더 힘을 줬지만 반박은 하지 못했다.
“전하, 아가씨는 안 돌아오는 겁니까?”
“……무슨 소리야. 무조건 돌아올 거야.”
“그런데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누워 계시는 겁니까?”
이안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에버하르트의 마음에 날카롭게 꽂혔다. 이안이 에버하르트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왔다.
“전하, 미래가 어떻게 되든 우리 끝까지,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면 안 될까요? 아가씨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으신 분이잖아요.”
에버하르트의 손에 점점 힘이 빠졌다. 이안이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 조금만 더 해 봐요. 전하가 얼마나 힘든지 압니다. 충분히 이해해요.”
이안은 없는 말재주를 최대한 동원해서 에버하르트에게 말했다.
에버하르트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에버하르트가 평정을 되찾은 듯 나지막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날 도와줄 게 있어요.”
에버하르트가 도움을 요청하듯 강렬하게 바라보았다. 이안이 승낙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
* * *
레이븐은 알현실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황실 감옥에 있는 그 여자를 잠깐 보러 가고 싶었다. 지금은 동정으로 변한 마음일지라도 악마가 되기 전엔 천사의 노래처럼 위로를 들려주던 이였으니.
레이븐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가 멈춘 세상에는 햇빛이 가득했다. 다만 그 햇빛이 자신과 에버하르트만 빼놓고 비추고 있는 듯했다.
“폐하, 바일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들라 하게.”
레이븐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의 얼굴에 절로 걸음이 움직였다.
“잘 지내셨습니까, 폐하.”
그러나 그 걸음은 친구의 안색에 뚝 멈추고 말았다.
“너 얼굴이 도대체.”
레이븐이 눈을 감고 얼굴을 쓸었다. 에버하르트가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께, 꼭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에버하르트.”
“이건 친구로서가 아니라, 바일 공국의 대공작으로 드리는 청입니다.”
레이븐이 거의 시체처럼 하얀 에버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눈은 새빨갛게 충혈된 데다가 얼굴은 안 본 새에 많이 야위어 있었다.
“메르헨 셰린포드와 칼 셰린포드를 처형해 주십시오.”
에버하르트는 실핏줄이 터진 눈을 한 채 메르헨 셰린포드의 사형을 청원했다.
“바일 대공.”
“메르헨 셰린포드가 흑마법으로 죄 없는 영애들의 목숨을 뺏고, 제 연인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또한, 아버지인 칼 셰린포드가 인신매매를 하는 걸 방조했습니다. 칼 셰린포드 또한 메르헨이 그러는 걸 알면서도 방관했다고 자백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레이븐은 마음이 아프게 조여드는 걸 느꼈다. 그가 메르헨을 죽여 달라고 말해서가 아니라, 마치 떠나기 직전 유언처럼 남기는 말 같아서.
“그 두 사람은 물론이고, 로셸 글레멘드도 중형을 피하지 못할 겁니다. 2년 전 인신매매에서 살아남은 청년 루썸이 소식을 듣고 궁으로 찾아왔습니다. 증언까지 더해졌으니 메르헨 셰린포드와 칼 셰린포드는 대공의 청대로 하지요.”
“……감사합니다.”
에버하르트가 할 말이 다 끝난 것처럼 힘들게 숨을 골랐다. 기절한 거 빼고는 며칠 동안 잠도 못 잤으니 그럴 만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걸 알죠? 대공.”
“……알고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아직 라 빅터 오스카를 잡지 못했으니 그 무엇도 제대로 끝났다고 할 수 없습니다.”
레이븐이 에버하르트의 어깨를 살포시 잡고서 물었다.
“그러니까, 에버.”
“……예.”
“포기하지 마.”
레이븐이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버하르트가 시선을 들었다.
“압니다. 절대 포기 안 합니다. 절대로.”
에버하르트의 눈에는 물기가 가득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폐하의 말씀대로 아직 오스카를 찾지 못했습니다. 오스카를 찾아 벌을 받게 한 후 에스티아를 살릴 방법을 찾을 겁니다.”
레이븐에게도 에버하르트의 간절함이 와 닿았다. 레이븐은 혹시라도 키가 될까 새로운 소식을 에버하르트에게 전했다.
“궁 안에 그자가 찾던 꽃을 가져왔어.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한번 봐봐. 응? 혹시 모르잖아.”
사실 에버하르트를 잃을까 봐 급하게 던진 말이었다. 그게 키가 될 줄은,
레이븐도 알지 못했다.
* * *
에스티아는 꿈을 꾸고 있었다. 어머니 조이가 팔을 활짝 벌리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꿈속에서 조이를 끌어안는 에스티아의 입가에 미세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리고 손가락이 꿈틀, 하고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