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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137화 (138/141)

137화 - 히아신스 (2)

황궁과 글레멘드 저택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는 무렵, 그 바람을 막으려는 ‘악’도 최후의 발악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스카가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과거에, 오스카는 그저 인식하게 됐을 뿐이었다. 다른 히아신스들은 그저 바람에 몸을 맡길 뿐이었지만 오스카는 달랐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인식’이란 걸 하게 됐고, 그 원인이 길을 잃은 한 소녀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엄마아, 오라버니이.”

여자아이가 훌쩍이면서 그가 있는 곳으로 오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라고는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가 우는 걸 보고 그 자신까지 서러워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아가씨!”

오스카는 다른 누가 소녀가 있는 곳까지 도착하기 전에, 자신이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이이아안!”

하지만 소녀는 그가 있는 곳에는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포르르 소년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게, 같이 가자니까요, 아가씨. 놀라셨잖아요.”

소년은 잔소리를 하면서도 아이를 꼭 껴안았다. 그때 오스카는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을 느꼈다.

질투. 저 소년이 질투가 났다.

언젠가 악마가 찾아와 왜 사람이 되고 싶고, 왜 여자아이에게 끌리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소녀 때문에 사람이 되고 싶은 건 확실한데, 왜 그녀를 만나고 싶은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소녀를 안은 소년을 향한 감정이 ‘질투’라는 걸 알았을 때, ‘사랑’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오스카가 시선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완전히 그친 하늘에서는 하얀 구름이 둥실 떠다녔다.

그는 그저 첫눈에 반했던 어린 소녀가 자신도 봐주길 바랐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다가갈수록 그 여자의 어머니라는 자가 계속 그를 가로막았다.

조이 글레멘드. 오스카는 그 이름을 외치며 자신을 완전히 봉인하려는 마법을 쳐냈지만 반만 성공했다.

조이는 다른 히아신스들에게 그 기운을 봉인했고, 꽃들은 마치 그를 말리려는 듯 조이의 봉인을 받아들였다.

그러니 다 네놈들 잘못이라는 거야.

오스카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분노했다. 이제는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다. 다리는 비틀릴 대로 비틀려 이제는 아예 감각이 없었다.

아마 큰 마법 한 번 쓰고 나면 다시는 마법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에스티아.’

차마 입 밖으로 내지도 못해 속으로만 간신히 담아 보았다.

남색 눈동자. 흑마법으로 조이를 구할 수 있다고 했을 때 그 눈빛. 오스카는 제물로 에버하르트의 목숨을 요구했고, 에스티아는 받아들였다.

그녀가 좀 더 독했더라면 좋았으련만. 미련해서 일을 그르쳤으니 다 그녀 잘못이었다.

‘그러니 너만 두고 죽을 순 없지.’

오스카는 에스티아를 자신이 갈 지옥으로 같이 끌고 갈 생각이었다. 오스카는 글레멘드 저택 주변을 교묘히 맴돌며 에스티아에게 다가갈 기회를 엿보았다.

어찌나 쥐 잡듯이 뒤지는지. 오스카는 단 한 시간도 한곳에 온전히 머물 수가 없었다. 그는 잔챙이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에스티아만 주면 되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저택 주변을 두른 보호 마법이 약해진 걸 눈치챘다.

‘에스티아가 죽었나?’

오스카의 마음이 쿵쿵 뛰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설렘이었다. 지옥이라도 에스티아와 함께라면 상관없었다. 살아생전에는 옆에 있을 기회가 별로 없었으니 죽어서라도 같이 있으리라.

‘아직 영혼이 이 세상을 안 떠났어야 하는데’

오스카의 마음이 급해졌다. 보호 마법이 갈수록 약해지는 걸 보니 에스티아가 정말 죽긴 죽었나 보다.

너는 기어코 죽은 너를 갖게 하는구나. 오스카가 킬킬대며 꿈틀거렸다. 반은 실성한 듯한 웃음소리에 새들이 피하듯 푸드덕 날아갔다.

기다려, 에스티아. 내가 금방 갈게.

이번에는 널 놓치지 않을게.

* * *

“정말 꽃을 보는 게 도움이 될까요?”

이안이 큰 보폭으로 걷는 에버하르트의 뒤를 따랐다. 의심이라기보다는 불안함에 하는 질문이었다.

“지금은 뭐라도 붙잡아 봐야 할 때니까요, 남작 말처럼.”

에버하르트의 안색은 여전히 안 좋았지만 눈빛만은 선명하게 번뜩였다. 그들은 레이븐이 알려 준 창고로 가고 있었다.

“이렇게 깊이 숨겨 놓았으니 그 악마도 찾기 힘들겠습니다.”

이안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속삭였다. 그들은 레이븐이 열어 준 워프를 통해 흡사 지하 감옥 같은 복도를 걷고 있었다.

-쭉 가기만 해. 마법으로 잘 숨겨 놓았으니 누가 갑자기 찾아오는 일은 없을 거야.

과거에도 그랬듯 레이븐은 에버하르트를 일으켜 주었다. 만약 주변 사람들이 없었다면 그도 에스티아를 따라 죽으려고 했을 것이다.

“이안.”

에버하르트가 어느새 나타난 창고 문 앞에서 걸음을 뚝 멈추었다.

“예.”

이안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에버하르트를 기다려 주었다.

“그……그러니까…… 음…… 당신도 힘들 텐데…… 같이…… 음…….”

급박한 상황임에도 꼭 하고 싶은 말이었다. 나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에스티아 앞에서는 잘만 나오던 말이 다른 사람 앞에서는 꽉 막혔다.

“전하 예뻐서 그러는 거 아닙니다.”

“뭐요?”

이안이 다 안다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에버하르트가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걸 해야죠. 저는 그게 전하를 돕는 거라고 생각했고요. 그러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딱딱한 말투였지만 가식은 전혀 없는 목소리였다. 에버하르트가 잠시 이안을 바라보더니 창고 문을 열었다. 창고가 끼익 하는 소리를 내며 뒤로 열렸다.

창고 안에는 나무로 된 탁자 위에 세 종류의 꽃이 각각 꽃병에 꽂혀 있었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펄 브릴리안트, 퀸 오브 더 핑크스, 암스테르담이 있었다. 히아신스 중에서도 오스카의 기운을 봉인하고 있는 꽃들이었다.

뾰족한 수가 있어서 온 건 아니었지만 에버하르트는 뭐라도 얻고 싶은 심정으로 꽃들을 바라보았다.

이 꽃들도 괴로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이를 도와 오스카의 힘을 갖고 있었다.

‘도와줘.’

에버하르트가 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 아래 부드러운 꽃잎이 느껴졌다.

‘에스티아를 살려 줘.’

스스로가 바보 같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라도 애걸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에버하르트는 매달리는 심정으로 꽃 하나하나를 어루만졌다. 혹시라도 대답이 들려올까 하는 마음으로.

-에버하르트?

에버하르트의 몸이 움찔했다. 그는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에버하르트

허공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어떻게 들어도 조이 목소리였다.

“이안, 지금 이 목소리 들립니까?”

“네? 무슨 목소리 말입니까?”

“…….”

이안은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에버하르트는 환청인가 싶었지만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을 틀었다.

-에버하르트. 나예요.

“공작 부인?”

그리운 목소리였다. 아픈 그의 어머니를 대신해 그를 따스하게 다독이던 목소리.

-에버하르트, 에스티아를 살리려면 꽃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줘야 해요. 꽃들은 오스카의 기운을 계속 붙잡고 있어요. 오스카의 기운을 빼주고 원래 있는 곳으로 돌려보내야 해요.

“그럼 정말 에스티아를 살릴 수 있는 겁니까?”

-맞아요, 일단 오스카부터 막아 줘요. 오스카가 완전히 힘을 잃으면 꽃들도 흑마법의 기운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거예요.

“오스카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상황만 아니라면 그녀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에스티아를 구하는 게 먼저였다.

-글레멘드 저택을 계속 맴돌고 있어요. ‘라 빅터 오스카’가 소멸했는데도 살아 있는 걸 보면, 흑마법이 꽤 강력하긴 한가 봐요.

“당장 찾아내겠습니다.”

-꽃들은 아직도, 오스카가 에스티아를 포기하지 못한 거 같대요.

바로 이동하려는 에버하르트를 조이가 붙잡았다.

-에스티아를 다른 데로 옮기고, 저택을 감싸고 있는 보호 마법을 푸세요.

“하지만 그러다가 에스티아가 위험해지면요!”

에버하르트는 보호 마법을 풀라는 말에 다시 동요했다. 조이는 옛날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

-그자는 지금 움직이는 게 고작일 거예요. 에스티아의 기운을 느낄 힘도 없겠죠. 내가 머물던 방에 액자가 있어요. 그 액자를 돌리면 숨겨 둔 방이 있어요. 거기로 옮겨요.

“그 방은 안전합니까?”

조이를 의심해서 미안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에스티아가 죽으면 모든 게 끝난다.

-에버하르트.

조이가 따듯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날 믿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듣기만 해도 믿음을 주는 힘을 갖고 있었다. 에버하르트가 꽃이 꽂힌 꽃병 2개를 이안에게 건네고는 자신도 하나 들었다. 그러고는 바로 몸을 돌렸다.

“어디 가십니까!”

이안이 빠른 걸음으로 에버하르트를 뒤쫓았다.

“저택의 보호 마법을 풀고 에스티아를 다른 방으로 옮기죠.”

“예? 그건 너무 위험…….”

“글레멘드 공작 부인이 알려 준 방법입니다!”

“예에?!”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말이었지만 일단 이안은 에버하르트를 따라 움직였다. 에버하르트가 곧 복도 한가운데서 멈추더니 사람 두 명이 딱 들어갈 워프 게이트를 만들어 냈다.

“전하! 이러면 마력 소모가…….”

“상관없어. 에스티아를 살릴 수 있다면.”

에버하르트는 주저하지 않고 게이트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번에도 이안은 의심하지 않고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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