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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138화 (139/141)

138화 - 히아신스 (3)

“이안, 글레멘드 공작저에 상주하는 마법사가 얼마나 됩니까?”

에버하르트가 워프 게이트를 넘자마자 쉬지 않고 물었다. 이안은 그를 따르면서도 그의 체력이 새삼 감탄스러웠다.

“8명입니다. 그중 1명이 고위 마법사이긴 합니다.”

“그럼 당장 그 고위 마법사를 여기로 데려오세요. 덧붙여 다른 마법사들더러 보호 마법을 서서히 약하게 하라고 하세요.”

이제 시간 싸움이었다. 유일한 희망은 에스티아가 최대한 버텨 주는 것뿐이었다.

“알겠습니다.”

이안은 이제 더는 의심하지 않고 바로 이행했다. 곧 에버하르트의 명령대로 보호 마법이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은 원래 로셸 글레멘드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은 죄책감이 그녀에게 속죄하도록 만들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보호 마법이 완전히 풀릴 때까지 에스티아를 옮겨 놓죠. 장소를 압니다.”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의 방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기나긴 복도를 지나쳐 익숙한 방문을 열었다.

“티아.”

에버하르트가 침실 문을 열고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에스티아는 곤히 자고 있었다.

에버하르트가 옆 협탁에 잠시 꽃병을 내려놓고는, 에스티아의 등 뒤로 팔을 넣어 한 번에 들어 올렸다. 그새 말랐는지 전보다 더 가벼워져 있었다.

에버하르트는 에스티아를 꼭 안은 채로 공작 부인의 방으로 이동했다.

“이안, 벽에 걸린 액자를 돌려주세요.”

이안은 무슨 방향으로 돌리냐고 물어보려다가 직감적으로 왼쪽으로 돌렸다. 공작 부인이 왼손잡이였기 때문이다.

벽이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래로 나 있는 계단에는 마치 손님을 경계하듯 날카로운 기운을 뿜어냈다. 그러다가 에스티아를 느낀 듯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에버하르트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이제는 손님을 반기듯 랜턴에 불이 딱 들어왔다. 어두웠지만 아늑한 공간에는 깨끗한 시트가 놓인 침대가 있었다.

“공작 부인께서는 다 준비를 해놓으셨군요.”

이안이 약간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에버하르트는 조용히 에스티아를 눕히고 반으로 접힌 이불을 펼쳐 그녀를 덮어 주었다.

“티아. 금방 올게. 잘 버티고 있어야 해.”

다행히 에스티아의 표정은 평화로워 보였다. 숨도 여전히 잘 쉬고 있었다. 이제 깨어나기만 하면 되었다.

“가죠.”

이안의 말이 맞았다. 에스티아가 돌아올 때까지 잘 버티고 있어야 그녀도 마음 편히 나을 수 있을 것이다.

“보호 마법이 풀렸습니다, 남작님.”

그들이 조이의 방을 나오자 한 마법사가 급히 달려오며 외쳤다. 이안이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듯 에버하르트를 돌아보았다.

“저 방에는 다시 보호 마법이 걸렸습니다. 설령 그놈이 알아채도 깨지 못할 겁니다.”

“그럼요. 부인께서 해놓으신 마법이니까요.”

이안의 목소리에 자부심과 그리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이안, 그놈이 올 겁니다.”

“역시 그런 거군요.”

이안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크로트를 어디로 부르면 됩니까?”

크로트는 글레멘드 공작가의 고위 마법사였다. 에버하르트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에스티아의 창문이 보이는 공터로. 분명 거기로 올 거야.”

“어떻게 아십니까?”

이안이 걱정스러운 낯빛을 한 채 물었다.

“내가 그놈이라면…… 가장 먼저 에스티아의 방이 보이는 곳으로 갈 거 같거든.”

그 악마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건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더 기분 나쁜 건, 그게 너무나도 쉬웠다는 것이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오스카보다 못한 입장이었으니. 관계의 벼랑 끝까지 몰린 기분을 에버하르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에버하르트는 마법사에게 크로트를 데려오라는 말과 함께 몇 가지를 일러두었다. 마법사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우리도 가죠. 아무리 거의 다 죽어 간다지만 보호 마법이 풀린 건 귀신같이 알아챌 겁니다.”

에버하르트와 이안은 함께 작은 공터로 향했다. 이안은 마법은 잘 몰랐지만 저택 안의 공기가 아까와는 달라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공기 자체가 오염된 듯 묵직하고 어두운 기운이 느껴졌다.

에버하르트는 검 손잡이를 꽉 쥔 채로 앞을 노려보았다. 오스카를 다시 볼 생각하면 저절로 구역질이 치솟아 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었다. 천천히 고통 속에서 죽어 가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복수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그건 에스티아를 지키는 것이었다.

“전하.”

이안도 에버하르트처럼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에버하르트가 뭔가를 직감한 듯 검집에서 검을 빼 들고 허공을 향해 휘둘렀다. 의아해하던 이안은 곧 눈앞에 은신 마법식이 풀리고 ‘악마’가 눈에 드러나자 그제야 에버하르트가 마법을 해제한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들 눈앞으로 기어오고 있는 건 태초에 인간에게 금단의 열매를 먹으라 유혹했던 뱀처럼 움직였다.

고장 난 호두까기 같기도 했다. 어느새 도착한 마법사들도 다가와 경계 태세를 취했다.

“아…… 대공…….”

에버하르트는 내심 이 광경을 에스티아가 안 봐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온몸의 관절이 뒤틀린 채 걸어오는 오스카의 모습은 소름이 끼쳤다.

오죽하면 평소에 침착하기론 제일가던 이안마저 흠칫할 정도였다.

“에스티아가…… 죽은 게 아니었습니까?”

에버하르트가 으득 하고 이를 악물었다. 입 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네놈은 정말 에스티아를 사랑하긴 한 건가?”

혐오감이 차올랐다. 자신도 정말 그렇게 될까 봐 감히 입에 담지도 못하는 말을 쉽게 내뱉고 있었다.

“……에스티아를 보러 가야겠어요. 살아 있을 때는 같이 못 있었으니까, 지옥에 같이 가야지.”

오스카의 입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에버하르트는 저 머리를 으깨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알고 있었어. 나도 제정신이 아니라고. 집착에 사로잡혀 있는 건 너만 그런 게 아니라고. 하지만.”

에버하르트가 검을 들었다. 마법사들이 에버하르트에게로 바짝 다가왔다.

“난 내 마음보다도, 나 자신보다도 티아가 더 소중해.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에버하르트가 터벅터벅 오스카를 향해 걸어갔다. 오스카가 햇빛을 보는 뱀처럼 미약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티아는 너랑 같이 죽지 않아. 나와 함께 살아갈 거야.”

에버하르트가 검을 아래로 내렸다.

“헛소…….”

오스카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발악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에버하르트가 검을 내리쳤다.

“아악!”

오스카가 고통에 젖은 비명을 질러 댔다.

“악! 내…… 내…….”

오스카는 차마 망가진 팔로 지혈도 하지 못한 채 몸부림쳤다.

“내 눈!”

에버하르트는 목이 아닌 오스카의 눈을 베어 버렸다.

“이제 봉인할까요, 전하?”

고위 마법사 크로트가 다가와 물었다.

“그래, 이놈을 봉인해.”

“뭐?”

오스카가 비명을 지르며 으르렁거렸다. 자신이 무슨 말을 듣고 있는지 못 믿겠다는 투였다.

“한 짓이 있는데 곱게 죽여줄 순 없지. 네놈은 평생 연구 대상이 된 채 고통 속에서 살다가 죽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잔인하게 죽이고 싶었지만, 그건 에스티아를 위한 길이 아니었다.

다시는 에스티아도, 그 누구도 흑마법으로 괴로워할 일이 없도록 대비하는 게 중요했다.

“싫어! 이 개새끼야! 당장 비켜! 난 당장 에스티아를 보러 가야…….”

“봉인해.”

에버하르트가 검을 집어넣고 등을 돌렸다. 뒤에서 강한 마법의 기운이 느껴졌다.

“싫어! 싫다고! 살려 줘! 이렇게는 안 돼! 누가 나 좀…….”

오스카가 몸을 비틀며 처절하게 외쳤지만 당연히 도와주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악을 지르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마지막 발악으로 오스카가 에버하르트에게 흑마법으로 썼지만, 희미해진 마법의 힘은 마법사들에게 가볍게 막혔다.

“아아아! 에스티…….”

오스카가 다가오는 마법사들을 느끼고는 꿈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지금이라도 도망칠 수 있는 것처럼 다시 본인에게 은신 마법 수식을 읊기 시작했다.

“막아라.”

에버하르트가 단호하게 다른 마법사들에게 명령했다. 마법사들은 단숨에 오스카의 팔과 다리를 마법의 힘으로 완전히 묶어 버렸다. 오스카가 마치 일어설 수 있다고 착각하는 뱀처럼 꿈틀거렸다.

오스카가 끔찍한 절규를 토해 내며 마법으로 생긴 사슬을 풀려고 애썼다. 그러고는 죽어도 이곳에서 죽을 수 없다는 듯 몸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마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지금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에버하르트가 오스카의 목을 움켜쥐었다.

“컥!”

“끝이다, 너는.”

에버하르트가 한 번 더 몸을 세게 쥐자 기껏 모였던 흑마법의 기운이 다시 흩어졌다. 오스카는 침을 흘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피가 흐르는 눈. 완전히 묶여 버린 사지. 티끌처럼 분해되어 버린 기운. 오스카는 끅끅거리며 고통을 쏟아 냈다.

“그동안 에스티아도, 나도, 죄없는 다른 이들도 괴롭게 했으니 네놈은 평생 그렇게 살 거다.”

에버하르트가 마지막으로 오스카에게 말하고는 뒤를 돌아 걷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이 봉인하는 소리와 함께 오스카가 지옥에서 벌을 받듯 고통에 몸부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명은 조이의 방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다시 숨겨진 방 앞에 도달했을 때, 비명이 뚝 멎었다.

에버하르트는 계단을 내려갔다. 뚜벅뚜벅하는 소리가 고요히 울려 퍼졌다.

에스티아는 이 방을 나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곤히 자고 있었다. 에버하르트의 손끝이 덜덜 떨리며 에스티아의 얼굴에 닿았다.

“티아. 끝났어. 놈을 완전히 봉인했으니 너도, 그 꽃들도, 공작 부인도 다 자유야.”

에버하르트가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제…… 너만 돌아오면 돼.”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의 작은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만약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도 따라갈게. 네가 있는 곳으로. 나…… 네 목소리가 너무나도 듣고 싶어.”

에스티아의 작은 손바닥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리웠다. 고운 목소리도, 심성만큼 깊은 남색 눈동자도. 언제나 그를 사랑해 주던 아름다운 마음도.

에버하르트는 다시 한 번 소리를 내어 울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이 울음소리를 듣고 다시 돌아와 줄까 싶어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바람에는 익숙한 빛을 뽐내는 꽃잎들이 실려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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