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139화 (140/141)

139화 - 첫사랑

잠이 들었던 것도 같다. 눈앞이 물결치듯 흐릿했고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 만큼 나른했다.

“에버하르트”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에버하르트는 본능적으로 이곳이 꿈속이라는 걸 눈치챘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옆에 조이가 앉아 있을 리 없었으니까.

“공작 부인?”

그녀를 부른 에버하르트는 흠칫 놀랬다. 자신의 목에서 변성기 이전의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 나야.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려고 왔어.”

“마지막 인사라뇨.”

순간 에버하르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느새 그의 머릿속에서 꿈이냐 현실이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 모든 게 마무리되었으니 너희에게 선물을 주고 가려고.”

조이가 온화하게 웃었다. 다정하면서도 슬픈 미소였다.

“오스카를 봉인함으로써 그의 기운을 잡아 뒀던 꽃에서도, 어두운 마력이 빠져나갔어. 그 꽃들도 나처럼 이제 자유롭게 살겠지.”

에버하르트는 에스티아를 위해서라도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말을 했다가, 그녀가 에스티아까지 데려갈까 두려워졌다. 조이는 그 마음을 알아차린 듯 에버하르트를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 난 에스티아를 구하려고 아직 안 떠나고 있던 거니까.”

“방법이 있는 겁니까?”

어린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에버하르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조이가 웃으며 에버하르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먼 옛날처럼.

“히아신스가 어떤 꽃인지 기억해, 에버하르트?”

“……네, 영원한 마력을 가진 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저 떠오르는 대로 답한 에버하르트는 흠칫했다.

“설마.”

“그래, 에스티아를 살릴 수 있어. 꽃들이 감사의 선물로 너희에게 남기고 간 게 있어.”

조이가 에버하르트의 한 손을 살포시 잡아 올렸다. 그러고는 그의 손바닥을 편 다음 자신의 주먹 쥔 손을 위로 올렸다. 사르륵. 에버하르트의 손바닥에 물기가 어린 뭔가가 닿았다.

“꽃잎…….”

전에 에스티아와 함께 봤을 때와는 불길한 기운은 사라진 꽃잎이 그의 손바닥에 놓여 있었다.

“히아신스는 영원한 마력만 가진 게 아니야. 생명력도 가졌지.”

“부인.”

에버하르트의 눈가에 눈물이 가득 맺혔다. 조이가 손을 들어 그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하지만 다 주진 못해. 그럼 공평하지 않거든. 다만 너와 평생을 함께 행복하게 살 정도는, 충분할 거야.”

“아.”

에버하르트는 꽃잎을 소중하게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굵은 물방울이 어린 소년의 눈에서 뚝뚝 떨어졌다.

“이걸 달여서 에스티아에게 먹여. 그거면 돼.”

조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버하르트도 저도 모르게 따라 일어섰다.

“에버, 에스티아를 부탁해. 상처 준 만큼 잘해 줘. 너도 꼭 행복하고.”

조이가 에버하르트의 붉은 눈가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에버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조이가 팔을 뻗어 자신의 어깨까지 오는 소년을 부드럽게 껴안았다.

“이제부터는 하늘에서 지켜 줄게. 언제나 곁에 있을게.”

에버하르트는 답하듯 조이를 꽉 안았다. 아들이 어머니를 안듯이.

꿈속으로 들어올 때처럼 몽롱한 느낌이 에버하르트를 덮쳐 왔다. 몸에 닿았던 따스한 여인의 온기가 서서히 멀어졌다.

하지만 에버하르트는 그녀가 진정으로 멀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다음에 만나요, 공작 부인.’

그 말과 동시에 에버하르트가 번쩍 눈을 떴다.

천천히 고개를 드니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에스티아의 모습이 보였다.

에버하르트는 왼손을 펴 보았다. 그곳에 꿈에서처럼 꽃잎들이 살포시 놓여 있었다.

“이안! 이안!”

에버하르트는 있는 힘을 다해 목청껏 이안을 불렀다. 이안이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당장…… 당장 약제사를 불러! 지금 당장!”

에버하르트는 어느 순간보다도 간절하게 외쳤다.

에스티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 * *

메르헨은 살면서 이렇게 소리를 질러 본 적이 없었다. 감옥으로 끌려오는 내내 소리를 바락바락 질러 보았지만 간수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손목과 발목에 쇠고랑이 채워진 채로 내동댕이쳐질 때도 메르헨은 비명을 질러 댔다. 하지만 간수들은 무감한 표정으로 철창을 잠글 뿐이었다.

“아버지…… 아버지를 불러 줘! 너희들이 나한테 이러고도 무사할 수 있을 거 같아!? 아버지를 불러 달라고, 미친 새끼들아!”

“조용히 해. 교수형에서 단두대로 바뀌기 전에.”

“뭐? 교수형이라니! 내가 왜 교수형을 당해! 왜! 나 좀 내보내 줘!”

간수들은 그저 경멸 어린 눈으로 그녀를 보고는 사라졌다. 메르헨은 철창을 붙잡고 몇 시간을 더 발악하다가 지쳐 쓰러졌다. 그러면서도 중얼중얼 욕설을 내뱉었다. 인신매매로 팔려온 소년들이 숨겨진 방에서 난리 칠 때마다 하던 욕이었다.

‘이게 다 그년 때문이야. 에스티아 그년을 믿는 게 아니었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에스티아를 그냥 죽여 버렸어야 했다. 그럼 에버하르트의 껍데기라도 가진 채로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에버하르트가…… 날 버릴 리 없어.”

그러나 그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상황에서 메르헨은 현실 도피를 하고 있었다. 메르헨이 다시 철창 가까이 기어갔다.

“그래, 에버가 날 버릴 리 없어. 에버는 날 사랑하는걸. 지난 2년 동안 우리는 너무나 행복했는걸.”

흑마법의 부작용으로 까매진 손이 덜덜 떨리며 철창에 닿았다. 메르헨이 남아 있는 힘을 쥐어짜서 철창을 두드렸다.

“야! 에버하르트를 불러와. 내 약혼자…… 내 약혼자 불러오라고. 에버가 알면 너희를 다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 사람이 날 보며 어떤 미소를 지었는데. 어떤 표정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는데.

메르헨이 실성한 듯 웃음을 흘렸다. 그 모든 것이 연기였다는 걸 메르헨은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 모든 것이 사실은 그녀로부터 에스티아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걸.

“미친놈들아! 내 약혼자 부르라고! 너희를 다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릴 거야!”

메르헨은 헉헉거리면서도 다시 철창을 두드렸다. 쉬지 않고 천박한 말을 뱉어 내면서.

‘응?’

메르헨이 소리 지르던 걸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계단 아래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메르헨은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섰다.

‘에버야. 에버가 날 구하러 와 준 거야!’

메르헨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그녀의 승리였다.

“메르헨.”

“에…….”

메르헨이 자리에서 일어나 발자국 소리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에버하르트의 이름을 부르려던 메르헨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레이븐?”

금발과 똑 닮은 금안을 가진 자는 레이븐이였다. 메르헨의 마음이 절망 아래로 떨어졌다. 레이븐이 철창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이네, 르헨.”

레이븐이 메르헨의 옛 호칭을 불렀다. 과거에 메르헨이 에스티아를 연못으로 밀어 버리기 전까지, 불렀던 애칭이었다.

“내가 기다리던 건 네가 아니야.”

“알아.”

레이븐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 메르헨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내가 기다린 건 네가 아니라고. 에버하르트는 어디 있어?”

“르헨.”

“에버하르트는 어디에 있냐고!”

레이븐을 내려치기 위해 팔을 들던 메르헨은 살이 썩는 고통에 털썩 주저앉았다.

레이븐이 황급히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아마, 이대로 살아도 지옥이겠지.

“르헨.”

“에버하르트를 불러! 당장 부르란 말이야!”

레이븐이 쓰러진 메르헨을 조심스레 안았다. 메르헨은 거의 죽어 가는 상태에서도 계속 몸부림을 쳤다.

“네가 에버하르트에게 그렇게 집착하기 이전에, 나한테 했던 말 기억 나? 내 아버지 장례식 때 네가 했던 말 있었잖아.”

“……그딴 거 몰라.”

레이븐이 발버둥 치는 메르헨의 등을 위로하듯 다독였다. 메르헨은 허공에 대고 계속해서 발길질을 해댔다.

“‘나만은 너의 외로움을 잊지 않고, 이름으로 불러 줄게.’라고 했었잖아.”

“됐고, 에버하르트나 부르라고! 이 멍청아!”

“이름으로 불러 줘서 고마웠어, 메르헨.”

레이븐은 메르헨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가 뭘 하려는지 눈치챈 메르헨이 악을 지르며 손을 뻗었다.

“안 돼! 이 거지 같은! 이 쓰…….”

“잘자.”

하지만 레이븐이 더 빨랐다. 레이븐은 그녀를 위한 주문을 외웠다.

“안…… 안…….”

끝까지 의식을 놓지 않으려던 메르헨은 결국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내 마지막 선물이야.”

아마 교수형 당하는 날까지는 계속 잠에 빠져 있을 것이다. 죽기 전 잠시라도 고통을 잊을 수 있겠지.

레이븐은 메르헨을 조심스레 눕혔다.

마지막으로 레이븐은 첫사랑을 눈에 담았다. 그 무엇으로도 남지 않을 얼굴을.

곧 레이븐이 감옥을 나섰다. 차가운 한기가 다시 감옥 안에 가득 찼다.

정확히 일주일 후, 메르헨과 그녀의 아버지 칼은 제국민이 바라보는 광장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셰린포드 가문은 그렇게 멸문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