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 약혼 말고
에스티아는 에버하르트에게 꼭 안겨 있었다. 에버하르트는 꽃잎을 달인 물을 그녀에게 먹이기 위해 은수저를 들고 있었다.
이안이 데려온 약제사는 심혈을 기울여 꽃잎을 달여 냈다. 약제사는 달인 즉시 하얀 그릇에 담아 에스티아의 침실로 가져왔다.
에버하르트는 에스티아의 옆에 앉고 그녀를 자신에게 기대게 했다. 메리가 침대 맡으로 다가와 물이 든 그릇을 들었다.
침실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제 하나뿐인 주인을 보러 저택의 사용인들이 다 몰려왔다. 로셸이 종신형을 받은 시점에서 이제 글레멘드의 주인은 에스티아였다.
에버하르트는 떨리는 손에서 수저를 떨어트리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그만큼 희망과 절망이 동시에 교차하고 있었다.
물은 마치 무지개처럼 여러 빛깔로 빛났다. 어떤 각도에서 보면 분홍빛처럼 보였고, 다른 각도에서 보면 하늘을 품은 빛깔처럼 보이기도 했다.
에버하르트는 은수저 든 손을 내려 물을 한 숟갈 떴다. 안 그래도 달인 물은 양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도 흘려서는 안 됐다.
에버하르트는 살짝 벌어진 작은 입술 사이로 물을 흘려 넣었다.
만약 에스티아가 삼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서든 그녀가 삼킬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다.
그런데 삼켰다. 그걸 본 에버하르트는 마음이 급해졌지만 애써 침착하게 다시 수저로 물을 퍼 올렸다.
계속 입 안으로 흘려 넣었다. 시간이 길게 느껴질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전과 달리 에버하르트는 그 끝에서 빛을 보았다.
“아가씨…….”
카린이 입을 틀어막았다. 에스티아의 눈꺼풀이 꿈틀거렸기 때문이다.
됐다. 에버하르트는 남은 한 방울을 더 퍼서 에스티아의 입으로 기울였다. 방울이 똑 하고 에스티아의 입속으로 떨어졌다.
이제 에버하르트는 운명에 비는 수밖에 없었다. 에버하르트는 미세하게 몸을 떨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에스티아의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창백하던 뺨은 은은하게 물들이듯 붉은색을 띠었고, 푸석해진 머리카락에는 윤기가 감돌았다.
약을 발라도 쉽게 사라지지 않던 생채기들도 어느새 모습을 감췄다. 주변에 서 있는 사용인들은 그걸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에스티아?”
에버하르트가 그녀의 어깨를 꽉 안았다. 그걸 느낀 듯 에스티아가 잠꼬대하듯 ‘우웅’ 소리를 냈다. 에버하르트의 심장이 희망으로 쿵쿵 뛰었다.
에스티아가 몸을 꼼지락거렸다. 마치 지금 상황을 알아차린 듯.
에스티아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미간에도 살짝 주름이 생겼다. 평소라면 악몽을 꾸나 싶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는 돌아오고 있었다.
침대 옆에 있던 이안도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도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으음…….”
에스티아의 잠꼬대가 더욱 선명해졌다. 무의식중에 하는 움직임도 더 눈에 띄었다.
그렇게 에스티아는 힘들게 먼 길을 돌아오듯 한참을 꼬물딱거렸다. 에버하르트는 그녀를 억지로 깨우지 않고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그 순간, 에스티아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드디어 꿈에서 돌아온 듯 에스티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메리가 그릇을 툭 떨어트렸다. 메리가 ‘아가씨’라고 외치며 주저앉았다.
에스티아의 눈꺼풀이 서서히 위로 움직였다. 그 아래로 남색 눈동자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메리는 물론 다른 사용인들까지 울음을 터트렸다.
에스티아의 눈빛은 아직 몽롱했다. 다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으응?”
에스티아가 당황한 듯 눈을 깜빡거렸다. 깨어나 보니 다들 울고 있었다. 무슨 일 있나?
정신이 점점 맑아지면서 에스티아는 더욱 당혹스러워졌다. 다른 사용인들은 물론 이안까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있었다.
“뭐야? 왜 다들…….”
고개를 움직이던 에스티아는 곧 자신을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 존재를 인식했다. 에스티아의 고개가 조금씩 위로 움직였다.
“에버하르트?”
아니, 왜 에버하르트도 울고 있지?
에스티아의 마음이 더욱 짙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에버하르트의 안면 근육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손톱만 한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렀다.
“에버, 왜 울어? 무슨 일 있어?”
에스티아는 답답했다. 물어봐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에버하르트는 왜 이렇게 서럽게 우는 걸까.
“왜 울어, 응? 무슨 일 있어?”
에스티아가 에버하르트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가 아이처럼 우는 걸 보니 왠지 그녀도 울고 싶어졌다.
“에스티아.”
“응응.”
그가 부르자 에스티아가 얼른 답해 주었다. 에버하르트의 목이 울음을 삼키듯 위아래로 움직였다.
“고생했어. 그리고…… 고마워.”
에버하르트가 두 팔로 에스티아를 와락 껴안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 다시 울기 시작했다.
곧 에스티아의 머릿속에 ‘라 빅터’를 꺾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아.”
에스티아가 탄식을 내뱉었다. 대충 그가 어떤 시간을 견뎌 왔는지 짐작이 되었다.
“에버.”
에스티아가 에버하르트의 등을 쓰다듬었다. 이제 괜찮다고 그를 달랬다.
“에버, 고마워 나도. 기다려 줘서.”
에버하르트는 우느라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그녀를 더욱 세게 껴안았다.
에스티아가 토닥토닥 그를 위로했다.
안심시켰다.
다시는 떠나지 않겠다고.
* * *
선선한 가을날이었다. 살짝 열어 놓은 창문에서는 바람이 흘러들어왔다. 분홍색 옅은 커튼이 바람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렸다.
비가 그친 가을 하늘은 청명했다. 바깥에서는 사용인들과 그들의 자식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들렸다.
오스카와 악마 안셀이 완전히 봉인이 된 이후로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장마가 뚝 멈췄다. 종종 소나기가 오긴 했지만 잠시 인사를 건네러온 듯 금방 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방 밖에서도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로셸이 황실 감옥 종신형을 선고받은 이후 더는 글레멘드 저택에는 그들을 업신여기는 ‘폭군’은 없었다. 대신 그들을 존중하고 아끼는 소중한 아가씨가 건강을 회복하고 있었다.
아가씨가 조금이라도 더 쾌적하게 지낼 수 있도록 사용인들이 저택 안을 깔끔하게 청소하고 있었다. 마음의 짐을 한시름 덜어 놓은 듯 복도에서도 웃음소리가 들렸다.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마치 여러 악기가 하모니를 이루듯 에스티아는 사람들의 행복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두꺼운 담요를 한 치의 틈도 없이 두르고 있었다. 좀 더 시원한 바람을 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답답해.”
에스티아가 입을 뽀로통하게 내민 채로 투덜거렸다. 그런 그녀를 에버하르트가 왼팔로 더 바짝 안았다.
“아직 조심해야 해. 좀 답답해도 당분간은 두껍게 입고 다니자. 웬만하면 창문도 열지 말고.”
“언제까지?”
에스티아가 짐짓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에버하르트는 미소를 지으며 안 그래도 그녀를 완전히 감싼 담요 끝을 더 안으로 끌어당겼다.
“너 완전히 다 나을 때까지.”
“나 다 나았는데?”
에스티아가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의원이 미열이 있다고 했잖아. 후유증인 거 같다고.”
에버하르트의 표정은 온화했지만 눈빛은 여전히 짙은 불안감이 감돌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그 눈빛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깨어난 뒤로 한 달이 흘렀지만 에스티아는 여전히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에버하르트가 눈에 불을 켜고 그녀가 나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버.”
“응.”
“아직 불안해?”
“응.”
에버하르트가 고민도 하지 않고 답했다. 에스티아는 그 모습에서 아직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소년을 발견했다.
에스티아는 큰 손을 만지작거렸다. 자신의 두 손으로 잡아도 한참은 더 큰 손이었다.
에스티아의 시선이 그의 약지에 꽂혔다. 아직은 아무것도 없는 그 손가락에.
“에버.”
“응.”
대답하는 기계처럼 에버하르트가 그녀에게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 이제 같이 있을까?”
“응?”
방금과도 같은 대답이었지만 이번에는 대답이 아니라 물음이었다.
“약혼 말고,”
“…….”
“결혼할까?”
에버하르트의 눈이 커졌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스러운 눈치였다. 그런 그가 귀여워 에스티아가 피식 웃었다.
“결혼하자구, 나랑.”
에스티아가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에버하르트의 눈가에 또 눈물이 고였다. 이제는 툭 하면 울었다. 에스티아가 담요를 살짝 풀고 팔을 올렸다. 작은 손이 부드럽게 눈가를 쓸었다.
“그래.”
에버하르트가 눈물을 흘리며 미소 지었다.
“결혼하자, 우리.”
에스티아는 찬란한 에버하르트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그가 그녀 쪽으로 몸을 숙였다.
“평생 같이 있자. 함께 살아가자.”
그 말을 하는 에버하르트의 숨결이 바로 코앞에서 느껴졌다. 그제야 그가 뭘 하려는지 에스티아가 뒤로 몸을 빼려 했다.
“에버, 나 아직 열이……!”
그를 밀어내려던 에스티아의 목소리는 곧 그의 입술 아래로 사라졌다. 혹시라도 그에게 열을 옮길까 피하려던 그녀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 결국 에스티아는 포기하고 그의 움직임에 몸을 맡겼다.
다정하고 짙은 입맞춤은 작은 프러포즈 끝에 햇빛처럼 반짝였다.
그와 그녀의 미소처럼, 찬란한 빛이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