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2화
1. 베론 마을의 야안
새벽의 기운이 다가오고 있었다.
새벽의 여명에 그을린 곰팡이 핀 낡은 집에서 왜소한 체격을 지닌 더벅머리 아이가 모습을 보인다.
잘 먹지 못해서인지 또래 아이들보다 키도 덩치도 작은 그 아이의 몸에는 넝마 같은 옷 하나만 덮여 있을 뿐이었다.
코를 찡하게 하는 차가운 공기에 눈물이 핑 돌던 아이는 낡아 구멍이 송송 뚫린 옷을 더욱 추스르다 어제 맞은 부위에 손을 올렸다.
갈비뼈에 금이 간 것인지 멍이 심하게 들었는지라 아이는 손 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러워 이내 손을 내렸다.
야안은 어제 운 좋게 눈을 맞지 않아 어둠 속에서도 용케 물통을 찾을 수 있었다.
자기 키만 한 항아리에 물을 채우려면 열 번을 더 왔다 가야 하는 고된 일이었지만, 야안은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 마을 밖의 강에서 물을 퍼 올렸다.
원래 오늘 당번은 한스였지만 저번 달, 농노 관리자인 브란에게 잘못 맞아 머리가 터져 죽은 뒤 그의 당번 일은 야안의 몫이 되었다.
“하아, 하아. 이러다 큰일 나겠네.”
야안은 조급한 표정으로 물을 가득 채운 물통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
갈비뼈 부위가 욱신거렸지만 그런 고통에 신경을 쓸 여유조차 없었다. 관리자 브란이 깨어나 항아리에 물이 다 채워지지 않았음을 안다면 자신은 오늘 아침을 굶게 되는 탓이다.
하루 두 번 나오는 식사 중 한 끼를 거르게 된다면 점차 늘어나는 할당량을 채우다 말라 죽을지도 모른다.
맞아 죽는 것은 일순간이지만, 3년 전 농노 선배 중 한 명이 브란에게 찍혀 말라 죽는 것을 본 야안은 그 비참한 최후를 잊을 수 없었다.
광대뼈와 갈비뼈는 앙상했고 두 눈은 누가 뽑아내기라도 한 듯 툭 튀어나왔으며, 배는 예전 영지 순찰에서 보았던 영주의 배처럼 부풀어 있었다. 눈가에서는 구더기가 튀어나왔고, 치아, 손톱, 머리털도 모두 빠져버렸다.
만약 그의 왼쪽 뺨에 있는 커다란 반점이 아니었다면 야안은 그가 건장했던 선배와 동일 인물임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또다시 그때의 그 몰골이 생각이 나 소름이 끼쳤던 야안은 서둘러 무거운 다리를 움직였다. 운이 좋았던지 다행히 어제 마신 술 때문에 브란은 해가 뜬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헉헉헉. 다, 다행이다.”
항아리에 물을 채운 그는 갈증 때문에 물 가져오라는 브란의 심부름을 듣고 서둘러 물을 떠다 바쳤다.
벌컥벌컥 마신 브란은 숙취에 얼굴을 찡그렸다.
물을 마시고 있음에도 마치 술을 마시는 듯한 기분이다. 불쾌한 기분을 느끼며 가늘게 눈을 뜨니 4년 전 20브람을 주고 사 온 꼬맹이가 벌벌 떨며 자신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겁을 잔뜩 먹은 아이의 모습에 잠시 기분이 좋아진 그는 이내 어제 노름에서 잃은 돈 때문에 짜증이 일어나 반쯤 남은 물그릇을 내던졌다.
“물맛이 왜 이런 거냐, 이 버러지 같은 녀석.”
퍽.
나무 그릇에 머리를 부딪친 야안은 그릇을 서둘러 집어 들고 고개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다, 다시 떠 오겠습니다.”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떠는 야안의 모습에 브란은 그제야 조금은 기분이 풀린 듯 손을 저었다. 그만 밖으로 나가라는 뜻이었다.
야안은 다행이다 생각하며 서둘러 밖을 나섰다. 곧 방 안에서는 다시금 브란의 코 고는 소리가 났고, 야안은 조심스럽게 들어가 떠 온 물을 두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그릇에 맞은 머리 부위가 욱신거렸지만 야안은 히죽 웃음을 지었다. 운이 좋았다 생각한 것이다. 모서리에 맞았다면 나무 그릇이라도 피가 터졌을 터인데 오늘은 빗겨 맞았던지라 작은 멍 말고는 별다른 고통은 없었다.
그렇게 히죽거리며 배급을 하러 온 야안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배급소에서 감자 두 알뿐만 아니라 별도로 옥수숫가루를 탄 수프가 배식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이런 추운 겨울날 따뜻한 수프는 축복과도 같았다.
이 옥수수 수프는 날이 추운지라 베론 마을 촌장의 첫째 부인인 마리가 사비를 들여 내준 것이었다.
마리는 올해로 50세를 맞이한 중년의 여인으로 15년 전 일어난 영지전에 세 명의 아들을 모두 잃은 뒤 힘든 이를 보면 쉬이 넘기질 못했다.
촌장 또한 그때의 충격으로 새로운 부인을 두어 자식을 보려 했지만 당시 쉰이 다 된 노인에게 아이가 생길 리 만무했다.
그렇게 대를 이을 수 없게 되자, 최근 들어 우울증에 걸린 촌장은 마을의 일에 나서지 않게 되었고, 대신 첫째 부인인 마리가 얼마 전부터 그 일을 맡아 나서고 있었다.
촌장이라지만 베론 마을은 다른 마을과 달리 규모가 큰 편이었다. 다른 마을이 고작 30가구가 전부인 데 비해 100여 가구가 사는 큰 마을인 것이다.
그런지라 그 재산도 적지 않았다. 또한 대대로 내려오는 사경지도 다른 곳의 촌장보다 배 이상 넓어 마을에서 그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할 수 있었다.
늦게 온 만큼 마지막으로 야안의 차례가 오자 야안은 서둘러 자신의 급식 그릇을 내밀었다.
하지만 마리는 뒤늦게 온 야안을 못 봤던지라 아차 싶은 표정으로 야안을 바라보았다. 측은지심에 조금씩 더 나누어주다 보니 야안에게 갈 몫마저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만 것이다.
야안은 마리의 표정에서 무언가 꺼림칙함을 느껴 다가오다 비워진 배식 통을 보고는 눈물이 핑 돌았다. 맞는 것도 괜찮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 늦게까지 일하는 것도 괜찮았다. 하지만 이도 먹어야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차라리 한차례 맞는 것이 낫지 음식을 먹지 말라는 것은 그에게 더할 수 없는 고문과 같았다.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입술을 꼭 다문 야안의 모습에 마리는 작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 모습이 25년 전 자신의 막내아들인 베론 야론이 삐치는 모습을 연상시킨 탓이었다.
그런지라 야안이 아쉬움에 한참을 망설이는 모습을 바라보던 마리는 이내 무겁게 뒤돌아서는 야안의 뒷모습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이 추운 겨울날에 구멍이 숭숭 뚫린 넝마 같은 옷을 입은 모습이라니.
‘오, 아리스이시여!’
마리는 저도 모르게 야안을 붙잡았다. 그 힘에 야안은 휘청거리며 두려움에 떨었다. 누군가 자신을 이렇게 잡을 때는 큰 고통이 있음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이 아줌마가 미안하구나. 이름이 무엇이지?”
야안은 철들고 난 뒤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크게 당황스러웠다.
더구나 그 걱정 어린 눈빛이라니. 야안은 그 생소한 감정에 놀랐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차라리 브란의 그 무서운 눈빛을 대하는 것이 나을지 몰라.’
야안은 그리 생각하며 이내 입을 몇 번이고 달싹거리며 답했다.
“야, 야안이에요.”
“그래, 야안이구나. 좋은 이름이다…….”
마리는 주름진 손으로 야안의 멍든 머리 부분을 쓰다듬었다.
마리의 그 따스한 손에 야안은 뱃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울컥함을 막기 힘들었다. 정에 너무 굶주려 자신이 외롭다는 사실도 모르는 야안으로서는 그 작은 호의조차 견디기 어려웠다.
‘아프지도 않은데 왜 이렇게 괴롭지. 때리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가만히 머리를 만지시는 것뿐인데.’
움찔움찔.
온몸으로 떠는 야안의 모습에 마리는 측은지심이 크게 동해 자신이 감은 낡은 목도리를 풀어 야안의 목에 감아주었다.
“이렇게 하면 추위는 좀 가실 게야.”
평생 한 벌의 옷으로 살아가는 농노의 경우 이런 천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야안은 마음도 몸도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몇 번이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입을 열면 울음을 터져 나올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고마움을 표하는 방법이었다.
야안이 그토록 울지 않으려 하는 것은 오래전 두들겨 맞다 울음을 흘리자 시끄럽다고 몇 차례나 더 맞은 뒤부터였다.
마리는 잠시 그런 야안의 모습이 안쓰러워 다시금 머리에 손을 올리려 했지만, 결국 야안이 화끈거리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서둘러 돌아서는 바람에 손은 허공에서 어색하게 멈출 수밖에 없었다.
영주의 농노들은 마을을 원정하며 일을 한다.
15년 전 영지 전쟁으로 인해 남자들의 수가 많이 줄어든 뒤 밭에 고랑 파는 일을 맡기기 위해 만들어진 정책이었다.
베론 마을에 농노들이 들어선 것은 2개월 전이었다.
아직 2월 말, 이른 시기부터 밭을 가는 이유는 농노의 수에 비해 밭의 면적이 넓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농가에서 밭 가는 일같이 많은 힘이 필요한 일만 아니라면 여자나 노인이라 해도 충분히 제 몫을 해낼 수 있었다.
야안은 밭을 가느라 지끈거리는 허리 통증에 잠시 허리를 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흙 묻은 손으로 닦아내던 야안은 히죽히죽 웃었다.
오늘 아침 마리가 건네준 목도리는 야안의 목에 걸려 있지 않았다. 이런 귀한 것을 들고 있으면 사달이 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던 야안이 목도리를 풀어 배와 허리를 감쌌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추위가 가셨고, 또한 그로 인해 금이 간 갈비뼈에 무리가 덜 가 고통이 많이 완화되었다.
야안은 땀을 닦다 이내 오늘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마리 아주머니의 손길을 다시 느껴보려 머리를 쓰다듬어 보았다. 하지만 아침에 느꼈던 그 불편하면서도 기분 좋은 감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야안은 이내 브란의 잔소리가 들리자 황급히 농기구를 쥐며 다시 일을 시작했다.
노을이 질 무렵에서야 브란은 일을 끝내는 종을 울렸다.
농노들은 그 종소리에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고된 일에 배가 많이 고팠기 때문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배급을 받으러 가는 그들 무리에 야안도 있었지만 아침도 먹지 못한 야안은 다른 때와 달리 발걸음을 재촉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꼬르르륵.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배 울음소리에 야안은 배에 손을 올린 채 땅을 보며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나름대로 서둘러 움직이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야안을 붙잡았다.
“배가 많이 고팠나 보구나. 불쌍하기도 하지. 어여, 받아라.”
목소리의 주인공은 오늘 아침 배식을 나누어주던 마리였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추위에 코와 볼이 빨갛게 물든 마리는 측은한 눈빛으로 품에 넣어둔 빵을 내밀었다.
빵은 평민들이 먹는다는 검은 빵으로 딱딱하여 한참을 침으로 녹여 먹는 것이었다. 소화가 느린지라 포만감이 오래가는 음식이기도 했다.
농노들의 취급은 가축과 같아 돼지들이나 먹는 감자로 끼니를 때우게 했는데 감자는 쉽게 배가 꺼져 농노들은 항상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 사정으로 징집을 당하지 않고는 농노들이 검은 빵을 먹을 기회는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야안 또한 그러하여 멀리서나마 검은 빵을 보았지 실제로 눈앞에서 검은 빵을 본 적은 처음이라 크게 놀랐다.
놀란 탓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말없이 그저 고개를 숙이고만 있자 마리는 야안의 손을 덥석 잡아 검은 빵을 쥐여주었다.
야안은 검은 빵을 손에 쥔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먹어도 되는 것은 알지만 너무 아까워 먹을 수가 없었다. 겨우 검은 빵이었지만 그에게 있어 너무 귀한 것이었다.
마리는 그런 야안의 마음을 이내 알고는 빵을 뜯어 야안의 입에 넣으며 말했다.
“나중에 빼앗기면 어쩌려고 그러니. 그러니 지금 다 먹으려무나. 내일도 줄 터이니 아쉬워하지 말고. 어여.”
야안은 마리의 그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입을 오물거렸다.
야안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리는 그런 야안의 눈을 닦아주며 머리를 쓰다듬는다. 어느새 마리의 눈가도 조금씩 촉촉하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야안은 처음으로 배고픔을 잊을 수 있었다. 검은 빵은 감자와 달리 쓰기는 했지만 확실히 포만감이 오래갔다.
‘오늘 밤은 잠이 잘 오겠구나.’
그날 배고픔을 잊고 깊은 잠에 빠진 야안은 거대한 충격이 자신의 몸을 강타하는 것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야안은 그 거대한 충격에 크게 두 바퀴나 땅바닥을 나뒹굴어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눈을 뜬 야안은 브란이 핏대 선 눈을 한 채 주정을 부리고 있음을 알았다.
무언가에 대단히 화가 난 듯했고,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는 이미 다른 농노들은 자리를 빠져나간 뒤였다. 단지 깊게 잠이 든 야안만이 물건을 부수고 소리를 지르는 그의 주정을 듣지 못하여 미처 피하지 못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