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9화
비록 고대의 기초적 마법 지식만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의 고위 마법 지식만큼 귀한 것이었다.
야안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마법서를 펼쳤다.
중간 지점을 펼쳤건만 책은 처음 도입 부분의 내용을 보였다. 책장을 계속 넘기자 그 뒤를 이은 내용이 이어졌는데, 신기한 것은 책의 부피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양쪽의 비율이 똑같다는 것이었다.
‘마법의 서적이라더니. 과연 정보 창에서 하는 말이 사실이었구나.’
잠시 마법에 대한 마음가짐과 현자가 지켜야 하는 윤리에 대해 살피던 그는 곧 몸이 은은한 진동에 휩쓸리자 황급히 책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어느새 마을 식량 저장고 앞에 나타난 야안은 노을이 지려는 기미를 보고서는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정문에 있던 마리는 들어서는 야안을 맞이했다.
“오늘은 다른 때보다 늦었구나?”
“죄송해요, 어머니.”
“아니란다, 다행히 식사 시간은 맞추었으니 그것으로 된 것이지. 어서 들어가자. 식겠구나.”
“네, 일단 씻고 따라갈게요.”
“그러려무나.”
그렇게 말하며 씻으러 가던 야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마리는 오늘따라 밝은 야안을 보고 내심 미소를 머금는다.
지난 몇 달간 그의 얼굴에 자리한 그늘은 마리에게 고통이었다. 의젓하기 그지없던 아이가 얼굴에 표시가 날 정도면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힘들어하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는 무력감이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야안이 몇 달 만에 밝은 표정으로 식사를 하게 되자 베론의 집은 따뜻한 화로만큼이나 푸근한 기운을 풍겼다. 또한 그로 인해 어느 때보다 긴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식사를 마치고 자신의 방에 들어온 그는 가부좌를 틀고 운기행공에 빠졌다. 잠시 후 마지막 숨을 길게 내뱉으며 눈을 떴을 때 어둠에 잠긴 방 안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손을 더듬거리며 자신의 생일에 부모님이 선물해 준 목 등잔에 불을 피웠다.
목 등잔은 여러 등 기구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이다. 다른 재질의 등잔과 비교하여 그 재료의 수명 상 한계가 있는 것이 단점이지만 가격이 싸고 만들기가 어렵지 않다는 점과 그 모양이나 크기가 다양할 수 있다는 점이 이를 상용화하게 했다.
그의 목 등잔은 널찍한 하반에 서너 개의 걸이용 단이 있는 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그 위로 넓적한 나무판이 등잔의 중앙에 자리해 어두운 곳에서도 책을 보기가 유용했다. 이 목 등잔은 상하 귀천의 구별 없이 가장 애용되는 실내 기구이기도 했다.
심지 타는 냄새가 나며 어두운 방을 환하게 변화시킨다. 야안은 최근 들어서 볼 책이 없어 선물을 받고도 아까워 목 등잔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막상 쓰게 되니 생각보다 좋은 제품인 듯 책을 보는 곳이 대낮 같았다.
곧 인벤토리에서 오늘 던전에서 구한 마법 서적을 꺼내 들었다.
다시 처음 보았던 마법에 대한 마음가짐과 현자가 지켜야 하는 윤리를 경건한 마음으로 읽어나가던 그는 그다음으로 마론의 일기를 접했다. 일기라고 하지만 그저 두어 장에 걸친 것이 전부인지라 그저 넋두리를 써놓은 것 같았다.
//대륙력 5,621년.
오늘따라 스승님이 생각이 난다.
예전 마지막으로 스승님을 뵙던 그 날, 그분께서는 비탄에 젖어 있었다.
언제나 굳건하던 그분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한없이 작고 연약해 보였다. 백발이 성성한 스승께서는 이미 두 번이나 대륙을 위해 죽음을 미루고 있었다.
죽음을 물리치는 역천의 마법을 또다시 펼친 것이다.
이 역천의 마법을 쓴 대가는 크다. 그분의 고고한 영혼은 그로 인해 산산이 부서져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니.
더구나 스승께서는 진정한 진리의 추종자. 그 의미를 어느 누구보다 더 잘 알 것이었다. 하지만 그분은 역천의 마법을 쓰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분이건만, 그런 위대한 정신을 가진 그분이건만, 그런 그가 오늘 비탄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허공을 바라보는 그분의 시선은 너무도 공허했고 터져 나오는 한숨은 깊고 탁했다.
그분의 숨겨진 다섯 제자 중 하나인 나는 그가 그토록 비탄하는 이유를 최근에 들어서야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번뇌의 원인은 죽음의 지배자, 그가 부활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면서였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전설의 시절에 남은 기록에서 그의 무서움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설의 시절이라 불리던 그때 세상은 조율자들에 의해 암묵적으로 질서가 형성되어 있었다.
신화시대의 마지막의 잔재들이라, 그들은 당시에도 신이라고 불리기도 했고, 지금에 와서는 주신 아리스의 자식들이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인간들은 그들을 위대한 존재라 하여 높이 이름을 부르니 이를 명명하여 드래곤이라 불렀다.
그들은 죽음의 지배자의 침략에서 그와 치열한 전쟁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전설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런 희생을 끝으로 죽음의 지배자 또한 대부분의 힘을 잃고 봉인되어야 했다. 위대한 존재들도 멸하지 못하고 봉인에 그친 존재.
그런 위험한 존재가 부활의 조짐을 보이니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 당시 드래곤들은 아직 힘을 회복하지 않아 봉인이 된 상태. 현재는 오직 인간과 유사 인종의 힘으로만 이를 막아야 했다.
하나 주신 아리스께서는 대륙의 생명체들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죽음의 지배자가 부활하기 10년 전 하나의 축복을 내렸다. 세 번의 숨을 지닌 이방인들이 대륙에 모습을 보이리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들은 죽음의 지배자처럼 죽어도 죽지 않는 불사인이며, 그들의 처음 모습은 보잘것없으나 하나하나가 용사가 되기 위한 충분한 소질을 가지고 있다 했다.
그들 모두는 현자가 될 수도 있으며, 또한 검의 길을 걸으면 익스퍼트의 경지에 올라설 수 있다 했다. 또한 그들 중 신관의 길을 가는 이가 있으면 1,000년 만에 성기사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단순히 그뿐 아니라 그들은 모든 종사지에 들어설 수 있는 재능을 지니고 있고, 그들의 한계는 끝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 말씀하시며 대륙의 모든 존재는 이 이방인들을 잘 이끌어 그들의 기반을 잡는 것을 도우라, 말씀하시니 대륙은 이 거룩한 주신 아리스의 축복에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정작 그 말씀이 있은 지 1년이 지나고 다시 5년이 지나도 이방인들을 보았다는 소식은 접하지 못했다.
무엇 때문일까? 주신 아리스께서 하시는 일에 감히 무엇이 방해를 했다 말인가?
결국 이방인이라는 존재 없이 스승께서는 제국과 일곱 왕국을 연합하여 죽음의 지배자와의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
스승께서는 두려웠을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바친다 해도 이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할 수 없음이 말이다.
전설의 현자의 유물을 일부분 얻어 대현자의 길에 오르신 그분께서는 이방인이라는 주신의 축복이 없다면 일말의 가능성이 없음을 이미 그때 아셨던 것이다.
그러나 주신 아리스께서 전과 다른 축복을 내리신 것일까? 전쟁이 일어난 지 50년이 지난 지금 부활한 죽음의 지배자는 기록에서 본 것과 달리 그 힘이 전설에 비해 미약하기만 했다.
아무래도 그자 또한 전설의 시대에서 드래곤들에게 빼앗긴 힘을 복구하지 못한 듯 그 일부의 힘만을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일부에 불과한 힘이라 할지라도 그 힘은 대륙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위협하기에는 충분했다. 만약 스승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이미 일찌감치 대륙은 죽음의 지배자의 손에 들어섰을 것이다.
……중략……
아! 앞으로 이 전쟁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중요한 것임을 알지만 대륙의 모든 것이 위험한 지금 아무것도 못 하는 스스로가 너무나 고통스럽다.//
일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야안은 고대 이전 신비로 남은 전설의 시절이 있음을 신기하게 여기다 이방인이라는 글자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이방인.
그것은 글자는 다르지만 그가 자신의 상태 창에서 본 최초의 이방인에서의 이방인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한 대로 이방인이라는 존재는 아리스의 축복임이 사실임을 알게 되자 그는 다시금 주신 아리스를 외쳤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이방인에게 준 아리스의 권능에 대한 표현에 그는 말문을 잃었다. 어떤 일이든 통달할 수 있는 재능을 지녔다는 것 또한 놀라웠으나, 그보다 죽어도 죽지 않는 존재인 불사인이라는 말은 진정 믿기 어려웠다.
세상에 죽음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비록 세 번의 숨을 지녔다는 문구를 보아 추측하건대 그들 또한 세 번의 죽음까지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세 번이라는 숫자만으로도 이들은 불사인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다.
이것은 모든 법칙을 혼란에 잠기게 할 무시무시한 일인 것이다. 진정 아리스의 축복이라는 말이 아니고서는 믿기지 않는 일이다.
세상을 지탱하는 양변성 법칙과 끝없이 안과 밖을 도는 뫼비우스 띠 법칙에 의한 세상의 정화 과정을 무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고대 대현자의 제자가 아리스의 말씀을 거짓으로 적었을 일이 없으니, 이는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죽어도 죽지 않는…… 불사인. 정말일까?’
야안은 섬뜩한 불안감과 긴장감에 저도 모르게 고인 침을 삼켰다.
한낱 농노에 불과했던 자신이 그런 대단한 존재였음을 알자 그가 느낀 감정은 기쁨보다는 두려움이었다.
그랬다. 그는 이 사실이 두렵기 그지없었다. 만약 최초의 이방인이라는 칭호에 의해 자신의 지혜의 스탯이 올라가지 않았다면 그는 아리스가 내린 축복 속에서 지금도 허우적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이 축복에 적응이 되어가건만, 그 이방인이라는 말에 담긴 진실이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선을 넘어서자 그는 ‘무지에서 오는 공포’에 등골이 오싹했고, 그 불길한 예감은 곧 현실로 다가왔다.
‘믿기 힘든 일이지만 나는 불사인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 확실할까? 이것에 대한 진실이 몹시 궁금하지만 그렇다 하여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사양할 일. 어쩌면 그로 인해 나는 내가 아닌 기괴한 존재로 부활하게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것은 안 될 일이지. 하지만 여분의 목숨을 가진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들뜨게 되는군.’
바로 탐욕과 자만이라는 악마가 고개를 든 것이다.
‘아니, 이것은 무척이나 특별한 일이지. 나는 어떤 의미로는 무적이나 마찬가지라고, 벌써 그로부터 1,000년이 지났어. 그동안 역사에 이방인이라는 존재가 나타난 적은 없었어. 있었다면 대륙에서 그 이름을 남기지 않았을 리가 없지. 그렇다면 나는 유일한 이방인. 아리스의 고귀한 축복을 받은 유일한 존재. 나는 모든 존재의 위로 올라설 자격이 있어.’
온갖 번뇌가 머릿속을 휘저어 댔지만 그는 그 속에서도 넘어가지 않고, 그간의 고된 훈련과 아리스를 향한 신앙으로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몇 번이고 붙잡았다.
그 과정은 너무도 지독했고 고독했다. 보이지 않는, 실체가 없는 존재와 주먹 다툼을 하는 것 같다고 할까? 때릴 수 없고 오직 두들겨 맞으며 쓰러지지 않도록 버티기만 해야 하는 싸움이었다.
그의 눈은 고통을 참는 과정에서 핏대가 터져 뻘겋게 젖어 들었고, 그의 몸은 고통 속에서 흘러나오는 땀에 의해 온통 젖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