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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안-11화 (11/385)

야안 11화

4. 불굴의 의지

지혜에 비해 쌓인 지식이 터무니없이 낮기에 그의 지식 욕구는 웬만한 학자들보다 더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히려 이런 어려운 문제가 생기자 그는 반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야안은 낮에는 새롭게 개척한 검의 길을 걸었으며, 밤에는 현자의 길에 입문했다.

* * *

베론 마을에 유일하게 자리한 상점 운영과 농업을 겸하고 있는 한스는 손님이 왔다는 부인의 말에 황급히 집 보수를 뒤로한 채 상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점이라고 하지만 창고를 개조하여 만든 어설픈 판잣집에 불과했다. 여기저기 뚫려 있는 구멍으로 바람이 숭숭 새는지라 여기가 안인지 밖인지 사방에 자리한 판자가 아니면 구분하기 어려울 것이다.

상점 안으로 들어선 한스는 자기보다 머리 하나 더 큰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서리 맞은 듯 하얗게 내려앉은 백발 너머로 보이는 무시무시한 얼굴이 한스를 보며 무뚝뚝 말을 꺼냈다.

“오크 가죽 둘에 멧돼지 가죽이 셋일세.”

크게 입을 연 것 같지 않은데 상점이 들썩거리는 음성이 그에게서 나왔다. 그에 한스는 매번 겪는 일이지만 적응이 안 된다는 듯 속으로 투덜거리다 그가 꺼내준 가죽을 살펴보았다.

“음, 이번에도 모두 한 발에 끝내셨군요. 오크의 관자놀이나 멧돼지의 미간을 맞히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인데. 대단하십니다. 바로 무두질을 안 하셔서 좀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이 정도면 상품이군요. 언제나 그런 것처럼 식량으로만 드릴까요?”

한스의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일부는 종이와 잉크, 기름을 준비해 주게.”

그의 말에 한스는 가끔 그랬던 것처럼 그 가치의 반을 식량으로 맞추고, 종이 300장, 잉크 1셀, 기름 20셀(셀은 리터와 단위가 같다)을 준비했다.

대륙의 종이는 비싼 편이라, 한스가 내주는 종이는 매우 하품이었고, 그 재질이 나빠 글을 쓰는 이들이 기피하는 제품이었다. 하지만 질보다 양을 선호하는 듯 그는 아무런 표정 없이 종이를 받았다.

한스 또한 이 무식하게 생긴 사내가 종이와 더불어 잉크를 사 가지만 공부를 할 것이라 상상키 어려워 매번 상단이 오면 이 종이만을 준비했을 뿐이다. 가격이 싸 실생활에 여러모로 쓰이기 때문이었다.

곧 종이와 잉크, 기름, 식량을 포장한 한스는 끙끙대며 그에게 건넸다. 하지만 힘들어하는 한스와 달리 사내는 가볍게 이를 들더니 마치 산책을 나가듯 상점을 나섰다.

“휴, 오랜만에 한 건 올렸군. 그나저나 가죽이 다섯 장이나 되니 이걸 언제 다 무두질하지?”

겨울을 앞두고 집 보수를 하느라 시간이 없는 그는 일복이 터진 지금 행복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심각히 고민해야 했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사내의 발걸음 폭은 웬만한 이들의 두 배에 달했다.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있음에도 산을 오르는 그의 발걸음은 늦추어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의 힘은 이기지 못하는 것일까? 조금씩 그의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숨이 크게 거칠어질 때쯤 자신의 거처에 도착한 사내는 창고에 가져온 것들을 채워 넣고, 집으로 들어갔다.

허술하게 보이던 것과 달리 집 안은 깨끗하게 보수가 되어 있었다. 다만 집의 3분의 1을 빼곡히 채운 종이 묶음들로 인해 집 안이 어수선해 보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그는 낡은 철 등잔에 기름을 채우고, 잉크 통에 잉크를 채운 뒤 손때가 많이 타 반질반질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묵묵히 펜을 들어 가져온 종이 위로 써 내려갔다.

달필인 듯, 그의 펜은 거친 종이임에도 매우 빠르게 채워나갔다. 빼곡히 채워가는 종이에 쓰이는 것은 일반인들이라면 이해하지 못할 종류의 것들이었다. 이는 다름 아닌 현자의 언어라고도 하는 룬 문자와 수식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날이 어두워지자 철 등잔에 불을 피우고, 다시 일을 진행하려던 도중 밖에서 일어난 요란한 소리에 혀를 차며 일어났다. 그리고 책상 옆에 있던 한 자루의 지팡이를 들고 밖을 나섰다.

지팡이의 재질은 나무로 마치 염색을 한 듯 전체적으로 짙은 검은색이었다. 그 강도는 일반 나무와 다른 듯 지팡이가 바닥을 찍을 때면 철이 부딪치는 듯 요란한 소리를 냈다.

밖을 나선 그는 오크 한 마리가 목책을 부수고 넘어서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크는 덩치가 성인 남자와 비슷한 갈색 오크로 황금빛 눈에 핏빛이 일렁거리는 것이 상당히 흥분했음을 알 수 있었다. 힘이 좋은 듯 나무에 커다란 차돌을 묶어 놓은 것을 휘두르는데 마치 갈대를 흔드는 것 같은 속도를 보였다.

곧 집 밖으로 나온 인간을 보자 오크는 둔해 보이는 몸으론 생각할 수 없게 매섭게 무기를 휘두르며 그에게 달려왔다.

웬만한 나무 방패도 한 방에 부서질 것 같은 위력을 보이는지라 그 모습이 사납기 그지없건만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가져온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었을 뿐이다.

곧 두 걸음을 남길 때쯤 그 지팡이에서 갑자기 번쩍거리며 기운이 일어나더니 이내 오크의 관자놀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지팡이에서 나온 힘이 매서웠던지라 무너져가는 오크 뒤로 목책까지 날아가 작은 구멍을 내며 그 힘의 여파를 잠재웠다.

쓰러진 오크의 죽음을 확인하고 잠시 목책 주위를 살피던 그는 이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금 언제 무슨 일이 생겼냐는 듯 조용히 책상으로 돌아가 일을 시작했다.

일을 시작한 지 한나절이 지나 새벽이 될 무렵에서야 그는 펜을 놓았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노화 탓에 눈이 뻑뻑해 앞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피로한 눈 때문에 최근 두통은 부쩍 심해져 진통제를 달고 살아야 했다. 진통제라고 해봐야 은행나무 껍질을 삶은 물이 다였다.

어제 끓여놓은 물을 한 잔 마시던 그는 밖을 나섰다. 눈 상태가 돌아올 때까지 자잘한 일들을 처리하려는 생각이었다.

바깥에는 밤새 차가운 날씨에 굳은 오크가 있었다. 그는 익숙한 듯 오크를 잡고는 발목에 매달아둔 단검을 꺼내 가죽을 벗겨냈다. 질기기로 유명한 오크 가죽이지만 그의 단검이 지나갈 때면 여지없이 힘을 잃고 찢어져 갔다.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끝을 낸 그는 가죽을 뺀 나머지를 모아 불을 지펴 태웠다. 혹시나 오크의 피 냄새에 다른 몬스터들이 자극을 받아 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을 보던 그는 창고로 가 어제 구입한 음식들을 가져왔다.

음식 대부분이 밀가루나 치즈 따위였는데, 그는 미리 숙성해 놓은 반죽을 꺼내 일부를 잘라 얇게 펴 치즈와 함께 피워놓은 불에 구웠다. 고소한 빵 냄새와 치즈 향이 코를 자극했지만 그의 눈가는 작게 일그러져 있었다.

흐릿한 눈 안에 보이는 불은 어느 순간 그를 과거로 돌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본래 이곳 마일드 왕국이 아닌 프랑크 왕국의 상인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군대에 물품을 넣는 군수산업을 하는지라 평민치고는 그 인맥이나 재산이 적지 않았다.

형제는 없었고, 어머니도 아기일 때 질병에 죽었으며, 아버지는 군수산업에 시간이 빼앗겨 외롭게 커야 했지만, 다행히 그에게는 어머니와 같은 유모가 있었다.

유모는 벌써 그의 가문에서 3대째 이 일을 하고 있었고, 아버지나 이미 돌아가신 할아버지도 그녀의 손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인지 그녀에게 이 가문은 또 다른 가정이었고, 그 또한 그녀의 증손자나 다름없었다.

그의 이름을 지어준 것도 그녀인데, 그녀는 대현자가 죽음의 지배자와 맞선 고대부터 성자로 칭송받은 이의 이름을 따 마론이라 이름 지었다.

본래 그의 가문은 범인과 비교할 수 없이 머리가 좋았는데, 유모는 마론이 말을 하기 시작할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 3대째 이곳에서 유모를 하고 있지만 마론의 머리는 자신의 상식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유모는 즉시 이 일을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고, 아버지는 크게 놀라 일도 팽개치고, 집으로 달려왔다. 직접 확인한 마론의 머리는 그야말로 천재라 할 수 있었다. 그저 쓱 스쳐본 것뿐인데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다 외워댔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드디어 자신의 가문에 꽃이 필 날이 왔음을 직감했다. 언제나 계급의 차이로 귀족들과의 거래에서 별다른 이익을 보지 못했건만, 드디어 귀족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바로 현자의 길이 그것이었다. 아이가 현자가 된다면 그 가문은 귀족가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

그는 아이를 현자의 탑으로 보내기 위해 모든 인력과 힘을 동원했다. 현자의 존재가 국가에서 관리하는지라 만나기도 어려웠고, 또한 어중간한 실력자 밑으로 아이를 보낼 수 없다 생각했다.

그랬기에 그는 3년이 지나서야 그 조건을 만족할 여건을 마련하여, 아이가 아홉 살이 될 무렵 현자의 탑으로 아이를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마론은 분명 일반인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천재라 할 수 있으나 현자의 입장에서는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그가 25만 가지의 룬 문자를 정복했을 때 많은 이들이 놀라워했다. 일반적으로 천재라 하는 이들도 개인 차이는 있겠지만 7에서 1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한데 그는 단 5년 만에 이를 해낸 것이다.

놀라운 일. 이는 그들 역사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암기 능력이었다. 하지만 신은 공정했다. 그에게 뛰어난 암기 능력은 주었지만 그것을 응용할 연산 능력은 주지 않았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처음 그를 부러워하거나 질투를 하던 이들에게 그는 멸시를 받아야 했고 그나마도 1년이 지나자 사라져 투명 인간 취급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열다섯.

누구나 그 나이 특유의 감수성에 마음을 잡기 어려운 시기. 비범한 자도 결국 이 지독한 현실에 눌려 현자의 탑에서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태어나 한 번도 뒤로 물러선 적이 없었다. 신이 그에게 반쪽짜리 능력을 주었지만 그보다 더한 것을 그에게 내주었던 것이다.

바로 결코 식지 않는 뜨거운 가슴, 불굴의 의지를 말이다.

불굴의 의지. 그의 치열한 삶을 표현할 때 이보다 더 어울릴 말은 없을 것이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없다고? 불가능하다고? 아니야, 답은 있어!

그리고 그는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 답을 향한 길을 찾아냈다. 그 길은 현자의 탑에 있는 끝없는 책 중 한 권의 역사책에 있었다.

그 역사책은 검과 마법이 난무했던 1,000년 전 대륙의 현자들을 다룬 것으로 일반적인 인물이나 대륙에 대한 전설이 있는 이야기가 아닌 딱딱한 인구 조사 기록이었다.

보통은 그냥 스쳐 지나갈 만한 내용이었지만 그는 지나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당시 현자의 숫자가 지금과 달리 1,000분의 1의 비율이었기 때문이다.

1,000분의 1. 이 숫자가 가지는 의미는 컸다.

현자가 되는 건 만분의 1의 확률이라고 하지만 사실 현자의 비율은 그보다 수십 배는 높다. 그 이유는 대륙의 신분제도로 인해 그들의 스승인 현자를 만날 수 있는 확률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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