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12화
현자의 탑을 나서는 그의 모습은 겉으로 보기에는 고고한 현자의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마치 잘 단련된 사냥꾼을 보는 듯했다. 이는 고대의 유적을 찾는 데 필요한 많은 것을 습득하기 위해 여러 비기를 몸에 익히느라 변한 모습이었다.
다행히 신은 그에게 연산 능력은 주지 않았지만 대신 장대한 기골을 주었기에 10년의 세월 동안 일을 수행할 만한 능력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거의 10년 만에 가문에 돌아온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접했다. 아들의 의지를 존중한 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이 아들의 의지를 흔들 수 있음을 생각해 일부러 소식을 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집사에게 들은 마론의 의지는 더 확고하게 굳어졌다.
반드시, 반드시 찾겠다. 이루고 말겠다.
그렇게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20년이 다시 흘렀고, 그는 그동안 자신이 공부하여 얻은 수십 개의 던전을 탐험했다. 그 과정에서 그의 가문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얻은 것이라고는 또 다른 던전의 위치나 고대의 비사 정도에 불과했다.
그렇게 얻은 것을 제외하고는 그에게 남겨진 것은 이제 중년이 된 몸뚱이 하나뿐이었다. 이쯤 되면 모든 것을 비난하며 자기 연민에 빠질 법도 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용병 일을 하면서 돈을 벌거나 그 과정에서 고대의 일을 조사해 나갔다.
그렇게 생활한 지 5년이 지났을 무렵. 그는 우연히 다시 들어선 던전에서 새로운 비밀과 지팡이를 찾을 수 있었다.
그 지팡이는 전설의 시대 것으로 대현자 테무드가 제자에게 내려준 것이기도 했다. 세계수의 가지에 드래곤의 정기를 담아 만든 현자의 지팡이였다. 그것은 현자에게 다시 없을 보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얻은 현자의 지팡이로 인해 라임은 두 개가 한계였지만 마법을 시전하게 되었다.
영성을 가진 지팡이인지라 따로 수식을 완전히 계산치 않아도 마법 시전이 가능한 것이다. 다만 그의 머리로는 그런 조건을 놓는다 해도 계산할 수 있는 마법이 하위 마법 중 가장 기본적인 공격 마법인 매직 애로와 치료 마법인 힐뿐이었다.
그래도 마법을 할 수 있다는 바람을 이루자 그는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 죽음 때도 흘리지 않은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현자의 지팡이는 그것 말고도 마법을 증폭할 수 있는 기능이 있었다.
‘놀랍다. 이런 것이 있을 줄이야.’
또한 알게 된 고대의 비사 또한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이곳이 테무드가 숨긴 다섯 제자 중 한 명의 던전이며, 그가 하고자 한 일이 전설의 현자의 길을 잇는 것임을 알고 다시금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오랫동안 고대의 역사를 찾던 중 고대의 비사에서 전설의 현자에 대한 정보도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이전 전설의 시대에서 단 세 번 그 모습을 보였다는 진정한 현자. 대우주의 의지를 잇는 이이기에 드래곤들조차 그를 경배했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그였다.
마론은 처음 이런 정보를 찾았을 때 믿지 못할 거짓이라 생각하며 크게 아쉬워했는데, 진정 이 전설의 현자가 사실임을 알게 되고, 그 실마리를 찾게 되니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때부터였다. 그의 나이 쉰. 일반인이라면 노후를 걱정할 시기이건만 그는 이 새로운 일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이유는 없었다. 사실 두 가지뿐이지만 마법을 펼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는 현자로서 가치가 생겼다. 이로 인해 귀족의 직위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뒤돌아본 그의 인생은 던전을 탐험하고 용병 일을 하면서 상처투성이가 된 그의 몸과 같았다. 가족도 없고, 그의 가문도 사라졌으며 즐거웠던 추억 한 점도 존재치 않았다.
그래서일지 모른다. 그가 다시 불굴의 의지를 이끌고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을지 상상하기 힘든 길로 발을 내민 것은.
그는 그렇게 10년을 떠돌아 세 가지의 던전을 더 찾았으며 마지막으로 던전이 있는 베론 마을에 들어섰다.
다행히 다시 시작한 그의 길은 하나의 던전을 찾으면 그다음의 던전을 찾을 수 있는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평생을 던전에 희생하여 얻은 지식과 경험이 없었다면 다른 이들은 평생을 바쳐도 불가능할 일일 것이다.
그는 운명이라 생각했다.
신이 자신에게 내린 운명. 그랬기에 신은 자신에게 반쪽 현자의 재능만을 주었고, 대신 불굴의 의지를 주어 던전에 한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전문가가 되게 이끄셨다.
그 모든 과정이 이 전설의 현자의 유물을 모으고 조사하는 일을 맡기 위해 신이 자신에게 내린 운명이라 생각한 것이다.
올해로 일흔여섯인 그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었다. 가까이할 이 하나 없는, 언제 허무하게 죽을지 모르는 노인이 되었지만 그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신께서 자신이 할 일을 끝내기 전에는 데려가지 않을 것임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믿음은 그의 의지만큼이나 확고했다. 결코 타협이란 것은 없었고, 탐욕과 시기의 악마조차 그의 확고한 믿음에 질려 도망쳐 버릴 것이다.
모락모락.
어느새 반죽이 부풀어 올랐다. 치즈도 먹기 좋을 만큼 녹아 반죽과 버무려져 있어 식욕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마치 감정이란 것이 없는 이처럼 말없이 음식을 뜯어 먹으며 천천히 식사를 하던 그는 불이 사그라질 때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져온 삽으로 땅을 파 남은 재를 묻은 그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그의 집 안에는 펜 흘러가는 소리만이 고요함을 일깨운다.
* * *
야안이 마법의 기초를 닦는 데 걸린 시간은 그로부터 5년이었다.
고대의 시절에 만들어진 마법의 기초였기에 그는 이처럼 빠른 시간에 도달할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지혜가 9스탯이나 올라가면서 속도가 붙었던 이유도 있었다.
누군가 생각하기에는 오히려 5년이란 시간이 걸렸다는 것은 너무 느린 것이 아닌가 생각하겠지만, 사실 시간의 3분의 2를 검 수련하는 데 쓰기에, 그의 배움은 대단히 빠른 것이었다.
무엇보다 변하지 않는 그의 부지런함과 이 모든 것을 배우는 데 즐기며 감사하는 그의 태도가 이런 기적과도 같은 일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일반 유저들이 플레이를 했다면 반의반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검의 길을 함께 가는 어리석음을 보이지 않을 것이고, 또한 레벨이라는 시스템을 적극 이용해 아무런 칭호도 없는 상태에서도 1년도 채 안 되어 현자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으리라.
또한 레벨 10을 넘기면서 지망하는 직업에 현자라는 직업을 선택하여 얻는 칭호의 이득이 상승효과를 내며 열성적인 유저라면 반년이면 충분할 일이었다.
그래도 1레벨에 현자의 기초를 닦는 것을 끝냈다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이방인으로서는 기적 같은 일이다.
물론 최초의 이방인이라는 칭호가 있었다지만 여전히 레벨을 올릴 수 없어 직업을 선택하지 않은 채로 현자의 길에 들어섰으니 이 어찌 대단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게 열일곱이 된 야안은 머리만이 아닌 몸도 성장기라는 말이 확실히 느껴질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뼈마디가 여기저기 비명을 지를 정도로 성장하는 야안은 언제부터인가 그의 아버지의 키를 넘어섰다.
마리는 그렇게 성장하는 야안 덕분에 새로운 취미가 생겼는데, 다름 아닌 그의 옷을 짓는 것이었다. 시간이나 살림이 넉넉하지 않은 집안이라면 그저 성장할 것을 생각해 품이 크고 넉넉한 옷을 만들어 입혔겠지만, 마리는 그러지 않았다.
무엇보다 시간이나 살림도 여유가 있었고, 천도 그녀보다 먼저 가버린 아들이 남긴 옷에서 얻을 수 있었다. 야안이 조심스럽게 수련을 한다지만 격한 움직임을 하는데 남아날 옷이 있을 리 없었기에 그녀는 야안의 옷을 만들기 바빴다.
매번 옷을 찢는 야안은 그런 어머니에게 미안하고 고마워 옷을 받는 날이면 한참을 서성이며 볼을 긁적였다.
최근 야안에게는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겼다.
최근 들어 아버지의 몸에 이상이 왔기 때문이다. 눈도 침침해져 예전처럼 책도 잘 읽지 못했고, 소화가 잘 안 되어 고기와 같은 위에 부담되는 것은 기피했다. 자연스레 살이 빠지고, 활동량이 적어 몸의 근육도 쇠퇴해져 갔다.
점점 건강이 안 좋아지는 아버지를 위해 그는 성수라는 것을 구하기 위해 작년에 온 상단에 부탁을 한 상태였다. 듣기로 중상을 입은 이도 성수가 있다면 별 무리 없이 움직일 수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어마어마한 가격을 부르는 터라, 야안은 그 성수를 구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그의 마음은 가시밭 위에 선 양 더욱 답답하고 불안했다.
베론 가한은 자신을 안타깝게 보는 아들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라. 네 녀석 장가가는 꼴 보기 전에 절대 눈감을 일 없으니 말이다.”
그 말에 야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저는 장가를 가지 않겠어요.”
그 말에 베론 가한은 짐짓 노한 표정을 짓는다.
“이놈, 가문의 대를 끊어버릴 생각이더냐. 무엇보다 내 나이의 늙은이는 손주 보는 맛에 사는 법이야. 네 녀석도 이제 다 커서 귀엽기는커녕 능글맞기만 하니.”
“하하, 아버지도 참. 정 그렇게 손주가 보고 싶다면, 옆집의 멜리나는 어떤가요? 고것이 요즘 내 주위를 돌면서 힐끗힐끗 보는 게 저한테 마음이 있는가 본데요.”
야안의 능글스러운 말에 언제 들어왔는지 마리가 따뜻하게 데운 수프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호라? 너도 벌써 그럴 나이가 되었구나. 그래, 너는 어떠냐? 네가 맘에 든다면 내 한번 한스네에게 말해 보마.”
“어머니도 참,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흠흠, 저는 이만 공부하러 방으로 갈게요.”
아들이 도망치듯이 빠져나가자 마리와 베론 가한은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하기야 야안도 벌써 어른티를 내는 듯 수염도 까칠까칠 났으니. 참 세월이 빨라요.”
그 말에 베론 가한은 웃다 짧게 기침을 흘리며 입가를 닦았다.
“크흠, 흠, 그래. 세월이 참 빠르군.”
어린 시절 엉성한 눈빛으로 놀라며 자신을 바라보던 아이가 저렇게 장성하게 될 날이 올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야안은 귀까지 빨갛게 물들어버린 채 자신의 방으로 황급히 들어섰다.
그는 어머니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최근 자신이 수련을 하러 갈 때 마을에서 가끔 보는 멜리나를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그런가 싶어 곰곰이 생각한 결과는 그녀가 재밌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손바닥만 한 그 작은 발로 움직이는 것도 재밌고, 조그마한 입에서 나오는 말랑말랑한 목소리도 재미있었다.
또 자신의 어깨밖에 오지 않는 작은 몸으로 이리저리 움직인다는 것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눈도 크고 거친 자신의 피부와 달리 매끄러웠다. 길게 늘어진 머리에서는 사람을 야릇하게 만드는 향이 나 저도 모르게 콧구멍을 벌름벌름하기도 했다.
그러다 가끔 저도 모르게 그녀를 바라보다 눈이라도 마주칠 때면 어찌나 낯이 뜨겁던지. 마치 불에 덴 것 같은 화끈함을 느끼곤 했다.
그러다가도 그녀가 그 작은 몸으로 허둥지둥하며 뛰어가는 모습을 보자면 어찌나 귀엽고 재미있던지.
‘고것참,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 재밌는 존재가 있는 것이지.’
야안은 잠시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웃음을 짓다 지는 노을을 보고 마음을 잡았다. 그리고 인벤토리를 열어 책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