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14화
5. 전설의 추종자
그저 기원을 담은 목걸이라고 하면 의심도 받지 않을 것이고, 아버지도 자신의 성의를 생각해 몸에 지니고 다닐 것이다. 그는 오늘 밤 건네줄 생각으로 일어서려다 이내 아직 희끗희끗한 창이 하나 남아 있음을 알고 창을 불렀다.
//룬 조각
습득률 : 0.021%
처음으로 시도한 룬 조각 작품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마법 물품을 만드는 데 성공한 당신에게 찬사를 보낸다. 뛰어난 그대의 감각은 능히 고대에 번영했던 룬 조각을 재림시킬 수 있을 것이다. 고대 전설적인 룬 조각사 알리의 뜻을 이어받아 세상을 풍요롭게 하라.
*습득률이 높아질수록 룬 조각의 완성도가 높아진다.
*훌륭한 재료를 바탕으로 만드는 경우 습득률을 더 높일 수 있다.//
야안은 그제야 자신이 공부한 분야가 고대에 룬 조각 분야라 불렸음을 알았다. 사실 책에서는 마법 물품을 만드는 법이나 그에 대한 기초를 배웠을 뿐이다.
또한 알리에 대한 자서전 등을 읽었을 따름이라 정확히 자신이 공부하는 분야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잠시 룬 조각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다, 내일부터는 어머니를 위해 이 룬 조각품을 만들어야겠다 생각했다. 여러 번 실패하겠지만 재료는 그에게 많았다. 마을 식량 저장고 전체가 재료니 말이다.
방문을 열고 나서니 아버지는 주무시고 있었고, 어머니는 그 옆에서 옷을 짓고 계셨다. 그가 다가가자 그녀는 입가에 검지를 대시며 고개를 저었다. 그에 야안은 발걸음을 죽이는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보이며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다가간 그는 보호의 나뭇조각을 아버지의 목에 걸어드렸다. 마리는 아리스의 축복이 적힌 나뭇조각을 보자 웃음을 보이더니 이제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귀여운 나의 아들, 기특하구나.”
야안은 그 손에 머리를 맡긴 채 미소를 보이더니 머리를 긁적이다 이내 묵례를 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마리는 아들의 기특한 모습을 통해 아들이 장성한 사실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정말 한번 한스네와 이야기를 해 봐야겠는데.’
이 시대의 사람들은 특별한 일이 없다면 스무 살 전에 결혼했다. 특히 시설이 부족하고 여러모로 위험에 노출된 시골 가문 영주성의 사람들은 더욱 그런 편이었다. 하니 야안을 결혼시키겠다는 그녀의 생각은 결코 빠른 것이 아니었다.
* * *
야안은 탈론 수련을 마치고 공동 저장고로 수련을 갔다 오던 중 갑자기 나타난 멜리나에 놀라 뒷걸음을 치다 우뚝 섰다. 자신을 향해 뛰어온 듯 흐트러진 멜리나의 모습은 다른 때보다 그의 심장을 더 자극했다.
멜리나는 평소와 달리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무언가 그에게 볼일이 있는 것인가 싶은 모습인지라 야안이 이마를 긁적이며 말했다.
“나에게 할 말이 있어?”
그 말에 멜리나는 움찔거리며 몇 발짝 뒷걸음질한 뒤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자 야안은 난처해졌다.
자신의 어투가 이상했던 것일까? 목소리가 화난 듯했나? 그저 우연적인 일을 내가 확대해석했던 것일까? 그는 왠지 모르게 자신이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 고민하다 이 어색하고 무거운 상황이 어려워 그는 다시 발을 놀렸다.
그때였다. 그녀의 음성이 그를 잡은 것은.
“어, 어. 괜찮다면 이야기를 했으면 하는데.”
그 순간 그의 총명한 머리도 이 순간에는 쓸모없어져 버렸다.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저 잠시 굳어진 상태로 멈추었던 그는 다시 멜리나의 목소리에 반응을 보였다.
“저, 저기.”
“으, 응. 그래.”
그러며 뒤를 돌아서던 그는 눈을 깐 채 그 긴 눈썹을 떠는 멜리나를 저도 모르게 매만졌다.
화들짝 놀란 멜리나는 큰 눈망울로 야안을 쳐다보았고, 야안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곤란한 표정을 보이다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미안해, 나도 모르게. 불쾌했어?”
야안의 말에 멜리나는 고개를 젓다 이내 긴 머리를 손가락으로 배배 꼬아댔다. 부끄러울 때 나오는 그녀의 버릇이었다.
잠시 그렇게 어색해하는 그들 중 야안이 문득 생각이 나 물었다.
“이야기를 하고 싶다 했지.”
“으, 응.”
“자리를 옮길래?”
“으, 응.”
야안은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 가끔 놀러 가던 나무가 생각났다. 그 나무 위로 오르면 마을이 한눈에 다 보이는, 가슴이 뚫리는 기분이 드는 멋진 경치가 보인다. 문득 그 경치를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이 들자 야안은 앞서 걷기 시작했고, 그녀 또한 그 뒤를 따랐다. 야안은 평소처럼 걸음을 옮기다 그녀의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고 아차 싶었다.
이내 그는 걸음 속도를 그녀의 발걸음에 맞추며 걸어 나갔다. 멜리나는 문득 앞서가던 야안의 걸음이 느려지자 입가에는 싱그러운 미소가 자리했고 눈가에는 긴 호선이 그려졌다.
나무에 도착한 그는 낯설어하는 그녀를 잡아 이끌고 나무 위로 올라서게 했다. 멜리나는 어릴 적 크게 병을 앓았던 탓에 시골에 몇 없는 놀이 중 나무 타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엄두가 안 나 어려워했지만 야안이 미소를 보이며 손을 잡아주자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일어났다.
“와아.”
멜리나는 넓게 뻗은 코스모스 길을 필두로 한눈에 보이는 마을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감탄을 보였다. 나뭇가지도 밑에서 본 것과 달리 튼튼하기 그지없어 두렵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자신 옆에 야안이 있어 마음이 놓였다.
야안은 말없이 마을을 보다 곁눈으로 멜리나를 바라보았다. 가끔 불어대는 바람에 그녀의 향기가 그의 코를 간지럽힐 때면 껴안고 싶기도 하고, 만지고 싶기도 한 충동이 일어 마음을 어지럽혔다.
야릇한 기분에 그는 억지로나마 돌리고 싶은 눈길을 다잡으며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어색하기도 하고 좋기도 한 그 순간이 지나자 그때부터 더할 나위 없이 마음이 편해졌다. 푸른 가을 하늘도 아름다웠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도 귀여웠다. 저 너머 자신의 집이 보였고, 그 너머로 그녀의 집이 보였다.
기분이 좋아졌다. 들뜬 나머지 주위를 살펴보다 낮달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그에 대한 전설을 이야기해 주었다.
“옛날 로키라는 사람이 살았대. 그는 언제나 긍정적인 사람이었어. 자신은 너무나 행복하다 했지. 인생은 너무 멋진 것이라고. 그는 마치 입버릇처럼 이야기하곤 했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를 보며 불쌍하다고 했어. 그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거든. 거기다 그에게는 나이 차이가 많은 여덟 명의 어린 동생이 있어 매일 힘들게 일해도 재산을 모을 수가 없었지. 하지만 그는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았어. 시간이 흘러 그의 품에 있던 동생들이 하나둘씩 품에서 떠났어. 결국 막냇동생마저 그의 품에서 떠나자 그는 혼자가 되었지. 혼자가 된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어. 어린 동생들을 돌보느라 자신의 가정을 꾸리지 못했거든.”
멜리나는 머릿속으로 혼자 남은 로키의 모습을 그려보는 듯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그 이후에도 어려운 사람을 보면 없는 살림에도 이를 나누어 도와주었어. 그런 그의 희생에 누구 하나 감탄한 이는 없었지. 오히려 멍청하다고 손가락질을 했을 뿐이야. 나이가 들고 일하기가 더 힘들어졌지만 그는 웃음을 잃지 않았어. 그리고 점점 더 행복하다 했지.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지. 그렇게 그는 평생 고생만을 하다 생을 끝내고 말았어. 로키는 죽은 뒤 주신 아리스를 만나게 되었지. 주신 아리스가 물었어. 너는 왜 평생을 그렇게 행복하다고 했느냐? 너의 삶에서 너의 것은 없었고, 편안한 휴식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너의 인생은 다른 이에 비해 불행하다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멜리나는 이야기에 빠져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에 로키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어. 저의 마음을 누구보다 주신께서 더 아신다 생각합니다. 주신 아리스 님의 삶이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주신 아리스께서는 미소를 짓더니 너는 나보다 더 인간을 좋아하는구나. 너는 밤에도 인간을 내려다볼 수 있는 존재가 되어라. 그렇게 로키는 달이 되었어. 가끔 저 하늘에 보이는 낮달은 로키가 인간이 보고 싶어 조급함을 참지 못해 나타나는 거래.”
그러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야안에 멜리나는 감탄을 터뜨렸다. 마치 얌체같이 나타난 달이 정말로 그의 손가락 끝에 자리했기 때문이다.
“아, 그래서 달을 보고 로키라고도 부르는구나.”
멜리나의 마음도 야안과 다르지 않은지 어쩐지 편안한 표정이었다. 입가에 저절로 미소를 띤 멜리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이내 눈을 앞으로 하며 말을 꺼냈다.
“오늘 너의 어머니께서 우리 집에 오셨어.”
“어머니가?”
“응, 그런데 차를 내드리고 이것저것 물으시는 너의 어머니에게 답변을 해드리고 나오다 다시 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길래 몰래 듣게 되었어.”
그러며 멜리나는 야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야안은 왜 어머니가 한스네 집에 갔는지 이유를 모르는 듯했다.
그런지라 멜리나의 얼굴은 장미 꽃잎처럼 붉게 물들어갔다.
그런 멜리나의 변화에 야안은 왜 그러지 생각하다 이내 문득 생각이 난 것이 있어 멜리나처럼 얼굴이 익어갔다.
“어머니도 참. 미안해.”
그 말에 멜리나는 고개를 저으며 모깃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아니야.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그녀의 말에 야안은 이마를 긁적이며 침묵한 지 한참이 지난 뒤에야 말문을 열었다.
“그나저나 정말 오랜만이지 않아?”
“뭐가?”
“너랑 이야기하는 거 말이야.”
“그거야, 너는 언제나 바빴으니깐. 아니, 그보다 어릴 때부터 너는 이상하게 아이들이 어려워했어. 나도 그랬지.”
“그랬나. 확실히 이것저것 바쁜 일들이 있었지. 하지만 그럴 가치가 있었어.”
야안은 그렇게 말을 하다 문득 불어오는 바람에 고개를 돌리던 중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화들짝 놀란 그와 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이내 다시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멜리나는 또래 다른 사내아이와 달리 차분하면서도 어른스러운 야안의 분위기가 좋았다. 더구나 아버지보다도 한 뼘 정도 큰 키에 단단한 그의 체구는 소녀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얼굴은 전형적인 시골 사람처럼 검게 탔고 평범했으며 머리는 정리를 안 해 늘어져 헝클어져 있지만 그 사이로 보이는 눈은 저도 모르게 빠져들 만큼 맑고 깊었다.
야안 또한 멜리나와 크게 다른 감정이 아니었다. 저 조그만 얼굴에 커다란 눈망울과 코와 입이 자리하는 것이 신기했다. 목소리도 얼마나 청아한지 그에 비해 걸걸한 자신의 목소리는 오크들이나 내는 소리와도 같았다.
시골 여자아이답지 않게 하얀 피부에 꽃이 핀 듯 붉은 낯이라니 그 모습은 저도 모르게 손이 올라갈 정도로 아름다웠다. 야안은 바람에 의해 그녀의 얼굴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너 정말 예쁘구나.”
직설적으로 던지는 야안의 말에 멜리나는 깜짝 놀란 듯 버둥거리다 나뭇가지에 떨어졌다.
“아아…… 악.”
나뭇가지의 높이가 성인 어른이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높이이기에, 그녀는 충격에 겁먹어 두 눈을 감았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정신을 차려보니 야안의 단단한 팔에 자신이 안겨 있음을 알았다.
그의 넓은 가슴에서 들려오는 심장 소리인지, 아니면 자신의 심장에서 나는 소리인지 모르지만 크게 귓가를 울리는 그 소리에 그녀는 오히려 눈을 꼭 감고 말았다.
야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엽기도 했지만, 또한 미안한 마음이 일어났다. 의지와 상관없이 튀어나온 쓸데없는 말에 그녀가 놀랐으니 죄책감이 들었던 것이다.
야안은 어떻게 해야 할까 싶어 고민하다 그녀가 실눈을 뜨는 모습을 보며 천천히 그녀를 근처에 있는 바위 위에 앉혔다.
“미안해, 나 때문에. 내가 왜 그랬지. 아니, 아니. 그나저나 너 좀 먹어야겠다. 너무 가벼워서 깜짝 놀랐어.”
횡설수설하는 야안의 모습에 그녀는 미소를 보였다.
“바보.”
짧게 한마디를 내뱉던 그녀는 어벙한 표정을 보이는 야안의 가슴을 힘없이 툭 밀치더니 이내 뒤돌아 달려갔다.
야안은 금방이라도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녀를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힘에 붙잡혀 그저 멀뚱히 뒷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이해할 수 없군, 정말.”
멜리나는 하룻밤 사이 재밌는 존재에서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바뀌었다. 야안은 마치 그녀가 마법을 부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