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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안-15화 (15/385)

야안 15화

온통 그녀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조금 전 그 자리에서 한 시간이나 멍하니 있다 집으로 오고 있었는데 그 시간 동안 멜리나에 대한 이 이해되지 않는 감정에 가슴은 울렁거렸고 머리는 지끈지끈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를 마리가 반기다 야안이 다른 때와 달리 어쩐지 멍한 표정을 하고 있자 걱정되어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니.”

어머니의 말에 야안은 잠시 망설이다 이내 얼굴을 붉히며 오늘 그녀와 있었던 일에 대해 말했다. 그 말에 마리는 진지하게 듣다 이내 입가에 미소가 퍼져 나온다.

아들이 사랑에 빠진 것이다. 하지만 그 총명한 아이가 멍한 표정을 할 정도로 마음을 빼앗기니 왠지 모르게 아쉽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했다.

심술이 나기도 해 그녀는 야안의 코를 살짝 잡고 흔들며 말했다.

“이 녀석, 너도 이제 남자로구나.”

그렇게 말하는 마리는 그제야 본래의 눈빛으로 돌아온 아들에게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아직 점심을 먹지 못했지. 음식 데워놓을 테니 씻고 오렴. 아! 그리고 내일은 시간이 되면 한스네 상점에 가보려무나. 이번에 사냥꾼이 가져온 가죽이 제법 있는데 무두질을 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더라.”

그 말에 야안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어머니. 내일 간다고 말씀 부탁드려요.”

“그래, 알았다.”

마리는 야안의 밝은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날 밤, 그는 마법 물품 제작과 공부를 했지만 번번이 좋은 제품은 나오지 않았다. 재료가 좋아 간신히 F급은 넘어섰지만 잘 나온 작품이라 해도 E급이 한계였다. 머리가 복잡했다. 잠도 잘 오지 않았고, 하루빨리 내일이 왔으면 싶었다.

다음 날. 이른 시간에 일어난 야안은 오전 훈련을 끝내고 한스네 상점으로 갔다. 이야기가 되었는지 한스는 야안을 반겼다. 이른 아침부터 월동 준비를 하는지 자재 기구가 근처에 여기저기 자리했다.

“그래, 무두질은 할 줄 아느냐?”

“네, 예전에 배웠던 적이 있습니다.”

그 예전이라는 것이 농노 시절의 일이었다. 한스는 그 사실을 짐작하는 듯 말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농노였다지만, 지금은 아니니. 리나(멜리나의 애칭)도 촌장님 댁에 시집을 가면 행복할 거야. 아이 행실도 좋으니. 더구나 머리가 좋다고 하니 언젠가 관리직에 뽑힐지 모를 일이지.’

그는 바쁜 일을 핑계로 멜리나와 야안을 엮을 생각을 했다.

농노였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사실 이런 외곽 시골에서 농노와 평민은 크게 차이가 없었다. 만약 도시 쪽이었다면 농노 출신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꺼리겠지만 다행히 시골 영지였다. 그 차이에 대한 인식이 낮다는 이야기이다.

더구나 그는 벌써 20년이 넘은 그 영지 전쟁의 비극을 맛보았던 사람이었다.

촌장의 풍부한 재산이나 권력도 좋지만, 관리직에 들어선 자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니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최소한 자신의 아이가 과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니.

요즘 두 영지 사이에 다시 사이가 나빠지는 일들이 생겨 불안한 지금 그런 점이 더욱 부각되었다.

그는 다행이라는 말을 하며 오크의 가죽 하나를 꺼내 건네주었다.

“일단 이 오크 가죽부터 부탁하마. 나는 집수리가 좀 급해서 이만 나가마. 곧 딸내미가 상점에 나올 것이니 같이 말동무나 하며 있어라.”

야안은 멜리나가 온다는 말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사랑에 빠진 소년의 모습에 한스는 기분이 좋았다.

자신의 딸이 야안을 맘에 두고 있다는 것을 부인에게서 들어 아는 바였다.

다 큰 계집애가 남사스럽게 사내를 맘에 둔 채 끙끙댄다는 것을 알자 배가 아팠는데, 야안도 자신의 딸을 좋아하는 눈치이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일방적이지 않으니 그것이 또 맘에 들었다.

그는 다시금 잘 부탁한다고 말하더니 이내 상점을 나섰다.

야안은 저도 모르게 올라가는 광대 부위를 손등으로 매만지다 천천히 오크 가죽을 살폈다. 그리고 작게 감탄했다.

상당한 솜씨였다. 한 발에 관자놀이를 통과해 죽인 솜씨는 명궁이라 할 만했다. 다만 상처 부위의 가죽이 살짝 그을린 것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크에게서 얻는 실생활에 쓰이는 가죽의 등급은 제작자의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가죽의 차이는 원피 재료만이 아니란 말이었다. 대체로 피혁 제품의 질을 정하는 데 우선순위는 무두질의 솜씨, 원피 재료, 그다음에야 염색 순이다.

가죽 제작의 간단한 흐름은, 먼저 동물에서 거죽을 벗겨내어 그 후 건조 과정을 거치는 것인데 이 건조 과정에서 피혁 제품에 필요 없는 동물성 지방층이나 피하조직을 제거, 탈모하는 등의 복합 과정을 거친다.

다행히 사냥꾼이 벗겨낸 솜씨는 능숙해 피혁 제품에 필요 없는 부분이 어느 정도 정리되어 있었고, 한스가 짬짬이 가죽을 태닝 하려 한 흔적이 보였다.

자신은 그 뒤를 이어 태닝을 하거나 필요 없는 부분을 잘라내거나 염분을 빼는 등의 자잘한 일을 맡았다.

오랜만에 하는 일이라 익숙하지 않았지만, 하다 보니 조금씩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고르지 않은 부위를 두들기며 일을 진행하던 그는 상점 문이 열리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멜리나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점에 들어선 사람은 멜리나가 아니었다. 석양의 그림자처럼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들어선 그는 다름 아닌 멀리서 본 그 괴팍한 사냥꾼이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5년 전 자신이 오랫동안 그 흔적을 찾아다녔던 이였다. 그로써 그의 진정한 정체에 한발 다가갔던 야안이었지만 더 이상 그에 대한 관심은 접은 뒤였다.

전설의 현자의 흔적을 찾고 있는 알 수 없는 존재에게 다가갈수록 어떤 거대한 파급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의 현실이 너무나 행복했고, 지금의 행복이 변하지 않기를 바랐던지라 그 파급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지 두려웠기에 한때 그를 지배했던 호기심에서 물러설 수 있었다.

과연 가까이서 본 그는 야안보다 한 뺨만큼이나 더 큰 거구였고, 얼굴에는 흉측한 상처가 있었다. 하지만 노인의 눈을 본 순간 야안은 저도 모르게 감탄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눈빛은 노인의 눈이라 하기보다는 그가 본 어떤 이의 눈보다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 찬 정열의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맑고 깊어 그 눈만을 보노라면 자신이 머릿속에 그리는 현자의 이미지와 너무도 비슷했다.

마론 또한 야안을 본 순간 알 수 없는 충격에 빠졌다. 그것은 진정 기이한 경험이었다. 소년의 겉모습은 여타 시골 아이와 다름없어 보였지만 그의 흐트러진 머리 사이에 보이는 눈빛은 오래전 스승에게서 보았던 현자의 눈빛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야안을 보는 순간 반세기 전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당시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자리한 이 소년을 발견한 그는 전설의 현자의 조각을 맞추던 중 우연히 얻게 된 마법을 펼쳤다.

그것은 유일하게 그가 현자의 지팡이가 없음에도 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 그 마법은 전설의 시대 언어로 진실의 눈이라 불렸다.

이 진실의 눈이라 칭하는 마법은 상대의 역량을 파악할 수 있는 마법이다. 공격 마법도 아니고 다른 여타 회복도 안 되는 물질적인 것과 관계없어 볼품없는 것이었지만 실상 깊게 생각한다면 이 마법은 상당히 유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적과 마주하는데 상대는 나의 능력을 모르지만 자신은 상대의 능력을 안다면 상당한 고지에서 적을 맞을 수 있게 된다.

그뿐 아니라 여러 거래에 유리하고, 수하들의 능력을 적재적소로 파악할 수 있으니 과연 전설의 현자의 파편에서 나올 만한 위대한 마법이라 할 수 있겠다.

야안은 사냥꾼의 분위기에 압도되다 이내 그가 마나를 유동시키며 마법을 펼치는 것을 느끼자 황급히 몸을 뒤로 피하며 공격을 되받을 준비를 끝냈다.

잡고 있는 몽둥이는 검으로 변했고, 발검의 자세를 취하던 그의 기세만으로도 순식간에 시골 소년에서 절정의 검객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사냥꾼의 심장 부위에서 일어난 마나의 유동은 그의 몸을 감싸듯 지나갈 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다.

갑자기 야안이 매서운 기세를 보이며 절정의 검객으로 둔갑하는 모습은 충분히 놀라울 만한 것이지만 마론은 한 점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접하게 된 야안의 능력을 인지한 뒤에는 그런 그조차도 얼굴을 일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절정의 검객, 거기에 현자의 능력. 믿을 수 없군.”

마치 사자가 포효한 것 같은 마론의 감탄사는 일반인이라면 저도 모르게 움츠리게 할 만한 것이나 야안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발검의 자세를 풀지 않았다.

자신을 경계하는 야안의 모습에 그는 무어라 말을 꺼내려 하다 이내 누군가의 개입에 말을 잇지 못했다.

마론의 말소리에 놀란 한스가 상점에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한스는 둘의 대치에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젓다 웃음을 보이며 야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하, 놀랐나 보구나. 걱정하지 마라. 겉보기보다 좋은 분이시니. 이런, 물건이 벌써 떨어지셨나 보군요.”

한스의 개입에 분위기가 부드러워지자 마론은 마치 조금 전의 일이 거짓이라도 되는 양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오크 가죽 두 마리분을 건넸다.

“종이가 떨어졌네. 그리고…….”

잠시 야안을 스쳐보던 마론은 입가를 올리더니 말을 이었다.

“술도 있으면 한 통 주시게.”

그 말에 한스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술 말씀이십니까?”

“그러네. 혹시 담근 술이 없는가?”

마론의 그 말에 한스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없기는요. 재작년에 담은 위스키가 맛이 좋습니다.”

“그런가? 운이 좋군. 부탁하네.”

“네, 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봅니다. 그동안 찾지 않던 술도 찾으시고.”

그 말에 마론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스는 그 모습에 히죽 웃음을 보이더니 곧 종이 200장과 20셀에 달하는 위스키 한 통을 건네주었다.

마론은 가볍게 그것을 들고는 이내 ‘잘 있게.’라 한마디만을 남기고는 밖을 나섰다. 한스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말없이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 번도 인사 같은 것은 하지 않았던 그였건만 오늘따라 인사를 하며 떠나는 그의 모습은 다시는 보지 못할 이별을 고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저 양반이 웬일이시지.”

그렇게 중얼거리던 한스는 다시 야안이 하고 있는 오크의 가죽 무두질 진행 상태를 보며 감탄했다.

“솜씨가 상당하구나. 어떻게 보면 나보다 솜씨가 더 좋은 것 같은데.”

확실히 생산직에도 그 재능이 뛰어난 이방인의 능력을 지닌 야안답게 예전에 해본 과정을 생각나는 대로 했을 뿐이건만 깜짝 놀랄 만한 솜씨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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