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19화
새벽이 다 되어서야 마나를 집약하는 것을 끝낸 그는 룬 문자를 읊다 이내 거대한 마나의 유동을 느꼈다. 동시에 자신의 마나 대부분이 그 나뭇조각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눈을 어지럽히는 빛을 발하던 나뭇조각이었지만 야안은 눈 한 번 깜짝이지 않고 그 모든 과정을 침착히 살펴보았다.
이에 쓰이는 심력에 온몸의 미세한 털들이 다 일어났고, 일순간 마력을 잃어 며칠을 굶은 듯 허기진 느낌에 공허했지만 그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곧 모든 힘을 잃은 듯 다시 평범한 나뭇조각의 모습으로 돌아오자 이내 눈앞을 어지럽히는 정보 창이 띄워졌다.
//마케의 나뭇조각
등급 : D―
아직 미숙한 그대가 만들었다고 믿기지 않는 대단한 마법 물품이다. 그대의 운이 절정에 달해 아리스가 보살핀 끝에 만들어졌다. 회복 마법인 마케가 5년의 지속 시간으로 약하게 걸려 있다. 이것을 몸에 가까이한 자는 노화의 진행이 느려져 수명이 늘어난다. 또한 신체 리듬이 안정적이 되어 쉽사리 평정심을 벗어나지 않는다.
*회복의 나뭇조각은 단순히 자신만이 아닌 그의 근처에 있는 존재들에게 영향을 준다.
*번개 맞은 천년의 소나무라는 좋은 재료와 더불어 어떤 자도 시도하지 않을 모험을 한, 높은 운을 소지한 것이 이 물품을 만드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왠지 이번에는 느낌이 좋다고 생각을 했지만 설마 이런 대단한 작품이 나올 줄은 몰랐던 야안은 이 하나만으로도 자신이 운에 포인트를 몰아주기를 새삼 잘 결정했다 생각했다.
회복 마법 중 하나인 마케는 힐링과 그 성질이 달랐다. 힐링이 상처를 회복하는 재생력에 영향력을 끼친다면 마케는 사용자의 상태를 최상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고대 마법으로 지금은 잊힌 마법이었고, 알리가 남겨준 마법 서적에서 찾은 마법 중 하나이기도 했다.
예전 보호의 나뭇조각을 만들 때 운이 영향을 미쳤다고 읽었지만 설마 이번에도 이 같은 작용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는 펜을 들어 저번과 마찬가지로 성경에 있는 말씀의 일부를 적었다. 이후 색을 알록달록하게 칠한 그는 그럴듯한 노리개가 만들어지자 미소를 머금었다.
“이 정도면 괜찮겠는데.”
야안은 떠나기 전에 이것을 아버지께 선물하기로 하고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인벤토리는 예전과 달리 세 칸이 채워져 있었다. 책들과 현자의 지팡이에 넣어진 전설의 검, 그리고 그동안 그가 만들다가 실패한 나뭇조각들이 담긴 주머니였다.
실패한 작품이라 해도 희미한 마법이 반영구적으로 걸려 있어, 미약하나마 마법 물품이라 할 만했다. 비록 등급이 F+급에서 가장 좋은 것이 E―급이지만 신체 활동에 좋은 영향을 주는 물품인 것이다.
야안은 이 물건을 도시에 있다는 마법 물품 상점에서 거래할 생각이었다. 지금도 마법 물품은 현자의 실험 연구 비용 마련을 위해 쓰이고 있었다.
현자는 크게는 세 단계로, 세밀하게는 아홉 단계로 나뉘는데, 이는 룬 문자를 몇 가지 복합적으로 사용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이제 막 입문한 현자는 두 가지의 룬 문자를 수식으로 풀어 사용할 수 있으며, 다음 단계는 네 가지, 여덟 가지, 열여섯 가지 형식으로 나눈다.
여덟 가지 룬 문자를 다루는 현자까지를 초급 현자로 정하고, 그에 다시 비기너, 익스퍼트, 마스터로 나눈다. 초급의 다음 경지를 중급 현자, 고위 현자라 하고, 앞서와 같이 나눈다.
고위 현자에 들어선 현자들은 검사로 치자면 비기너에서 익스퍼트를 거쳐 마스터로 나뉜다. 고위 현자의 마스터는 알려진 역사에서는 오직 대현자 테무드가 유일했다.
이 시대에 존재하는 초인은 아홉 명이었다.
그중 소드 마스터가 두 명이며, 익스퍼트에 올라선 고위 현자가 세 명, 상급 정령사가 세 명, 아리스교의 성자가 한 명이었다. 이들의 실력은 비슷하다는 평이 있을 뿐이며, 나라에서는 이들이 직접 붙는 것을 꺼리는 편이었다.
만약 붙어 이긴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진다면 나라에서는 이만저만 손해가 아니었다. 더구나 목숨을 잃기라도 한다면 그 뒤를 상상키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나마 이 중 지옥의 불이라 불리는 고위 현자 길라드와 상급 정령사인 바람의 정령사 로인은 원수지간인지라 세 번을 붙어 1승 1무 1패를 보였다.
이들로 인해 사람들은 그들 초인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힘을 지녔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여하튼 본래 이야기로 돌아와 현자들은 자신의 지식을 채우기 위해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 실험을 하려면 귀한 물건들이 필요했으며, 고서를 구하고 이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인력을 쓰기 위해서는 상당한 자금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나라에서 전폭적으로 자금을 지원하는 최소 백작에 달하는 직위를 갖는 중급 현자 마스터 이상이 아니라면 현자들은 돈을 벌어야 했다. 일반적으로 이 돈을 벌기 위해 마법 물품을 제작하여 이를 팔았는데, 현자들의 수준에 따라 그 가격도 차이가 상당했다.
하지만 마법이 깃들어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질 낮은 마법 물품조차 일반인들은 구입할 엄두도 못 낼 가격이 매겨졌다.
그렇기에 야안은 이런 질 낮은 마법들이 자리한 물품이라도 어느 정도 가격을 받을 수 있다 생각했다. 그는 이 돈으로 생활비를 얻고 이런 시골에서는 구하기 힘든 여러 물품들을 구입할 생각이었다. 그에게는 이 인벤토리가 있으니 양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이번에 가면 리나에게 줄 반지도 맞추어야겠어.”
그녀에게 호감이 있었고, 집안 사이도 이미 말을 맞춘 뒤라 그는 그녀와 결혼할 것에 대해 의심치 않았다. 이번에 갔다 오면 그녀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할 것이라 생각하는 바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그는 대현자의 서와 현자의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마법을 공부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최근 들어 대현자의 서에 자리한 마법 중 전설의 시대 마법인 진실의 눈과 고대 마법인 이미지 마법을 익히고 있었다.
이 중 진실의 눈은 초급 현자의 마법에서도 비기너에 달하는 두 가지 룬 문자에 여섯 개의 수식으로 이루어진 간단한 마법이었다.
야안의 지혜는 이미 초급 현자 마스터에 달한지라 아직 마법을 유동하기에 익숙하지 않았음에도 쉽사리 펼칠 수 있었다. 다만, 그는 이 진실의 눈을 순간적으로 펼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연습 중이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고위 현자가 아니고서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다행히 그에게는 룬 문자를 축약한 고대 룬 문자라는 바탕이 있기에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3주간의 노력으로 이 진실의 눈은 중급 현자 익스퍼트 이상이 아니고서는 눈치를 채지 못할 만큼 빠르게 펼칠 수 있었다.
다음의 이미지 마법은 테무드 대현자가 즐겨 쓰던 것으로 상대의 호감을 유도하는 매혹 마법이었다.
사람은 첫인상이나 성격의 차이 등 여러 조건으로 인해 호감이 가는 사람과 관계를 피하려는 사람을 구분한다. 받는 것 없이 호감이 가는 사람들은 처음 만남에도 그들로부터 쉽사리 도움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야안은 어린 시절 농노로 살았고, 수련을 하느라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았던 터라 스스로가 대인 관계에 서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사람은 상대의 오해를 많이 불러일으키는 것도 알기에 그는 진실의 눈 다음으로 이 마법을 수련하고 있었다.
다만 이 이미지 마법은 중급 현자에서 비기너에 속하는 마법인지라 못 할 것은 없지만 아직 마법 유동이 어려운 그에게 세 번 중 한 번은 실패를 하는 법이었다.
이도 그가 운 스탯을 올리지 않았으면 다섯에 한 번 성공하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그나마 이것도 고대 룬 문자를 익혔기에 확률이 높아진 것이었다.
그는 며칠 동안 이 이미지 마법에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하여 최소 80%의 성공률로 올리려 했다.
사실, 야안은 몰랐지만 이처럼 마법과 검을 함께 수련을 하는 것은 앞으로의 길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일이었다.
실제, 여러 재능이 있는 이라 해도 그 길들 중 하나만을 선택하여 나아가는 것이 정석이었다.
서로의 길에서 추구하는 진리가 다르기 때문인데, 마법에서 통하는 진리가 검에서는 말이 되지 않으니 높은 차원의 경지에 올라서는 데 큰 방해가 된다.
실제 게임으로 친다면 이도저도 아닌 망캐라고도 할 수 있는데, 다행히 야안에게는 전설의 추종자라는 히든 직업이 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직업으로 인해 그 길이 다름에도 이질적임을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세상을 파멸로 만들 죽음의 지배자라는 신적 존재를 막기 위해 전설의 현자는 모든 분야에 능통해야 했다. 단순히 그 힘만이 아닌 그 힘들로 이루어지는 상승작용을 통해 죽음의 지배자를 봉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전설의 추종자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야안이 혜택을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새 새벽이 다가오는 시간이었지만 야안의 집중은 흐트러짐 없이 오히려 더욱 깊어져만 갔다.
* * *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 야안은 영주성에 있는 상단에 도착했다. 도착하니 이미 상단은 떠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지만, 지금부터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으면 자칫 나흘간의 야숙이 닷새간의 야숙으로 늘어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시골 영지의 단점인 영지와 영지 사이의 거리가 너무 길고 험하다는 것에서 일어나는 문제점이었다.
야안은 어제 울었던 탓인지 눈이 퉁퉁 부은 채 따라나선 멜리나에게 여행자 망토를 받게 되었다. 보아하니 저번에 상인에게 받았던 천으로 만든 듯했다.
망토에는 큰 후드가 달려, 비바람을 피하는 데 유용해 보였다. 또한 망토를 두 겹으로 한지라 야숙 시에도 제법 푸근한 잠자리를 만들 수 있을 듯했다.
야안은 그 자리에서 망토를 걸치고 몸을 한 바퀴 돌리며 물었다.
“멋진데. 어때, 잘 어울려?”
멜리나는 토끼같이 붉어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잘 어울려서 다행이야.”
“고마워, 이번에 올 때 좋은 선물 사 올게.”
멜리나를 꼭 껴안으며 말하는 야안에게 멜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저, 그저 무사히 돌아와 줘. 그거면 돼.”
“그래, 그래.”
잠시 포옹을 하던 야안은 부모님과도 포옹을 하며 아쉬움을 달래다, 나흘 전 만들었던 마케의 나뭇조각을 아버지의 허리춤에 걸어드렸다. 생각보다 색이 화려해 튀었지만, 베론 가한은 만족한다는 듯 장성한 아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어머니에게도 그보다 낮은 등급이지만 마케의 나뭇조각을 목걸이로 만들어 놓은 것을 걸어드렸다.
마리는 아들의 선물에 미소를 머금으며 고맙다고 말하고는 이내 튀는 행동을 하지 말고 조심히 다녀오라며 몇 번이나 당부했다.
곧 상인이 떠나는 듯해 다시금 인사를 나눈 야안은 서둘러 말의 안장에 몸을 올리며 상단의 행렬을 따라나섰다.
야안이 타고 있는 말은 재작년에 태어난 젊은 말로 어렵게 영주성에 있는 군마와 교배해 낳은 것이라 품종이 나쁘지 않았다.
다만 자존심이 강한 편이라 길들이기 어려웠는데, 야안은 혹시나 상단에 피해를 줄까 싶어 말에게 이미지 마법을 걸어두었다.
확실히 이미지 마법이 걸린 뒤부터 말은 야안을 주인으로 모시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다행히 훈련의 성과가 있었던지 그동안 이미지 마법의 성공률이 아슬아슬하게 반은 넘게 되었다.
상단은 해가 중천에 들어서기 전에 영지를 벗어났다. 야안은 이 상행을 맡고 있는 상주와는 만날 수 없었지만, 자신이 속한 상행을 책임지고 있는 상인에게는 이미지 마법을 걸었다.
비록 마론의 책으로 환경에 적응하는 법을 배웠다지만 결국 이론인지라 실전과 다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