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21화
잠시 후 대여섯 마리의 코볼트가 개 울음소리를 내며 도망치면서 전투는 끝이 났다. 방패수 두 명과 검사 한 명이 부상을 입은 거 빼고는 큰 피해는 없었다. 50마리의 코볼트 무리와 붙은 것에 비해 피해는 미비하다 할 수 있다.
파일은 이 모든 공이 야안에게 있음을 알았다. 그가 활약해 주지 않았다면 스무 명의 용병 중 목숨을 잃은 이도 대여섯 명 나왔을 것이다. 감사를 표하려 야안에게 다가가는데 그는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하면서 걸음을 멈추어 섰다.
야안의 옷에 한 점의 피도 묻지 않았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아는 파일은 저도 모르게 고인 침을 되삼켰다.
“믿을 수 없군. 스승님께서 하신 이야기가 진실이라면.”
그가 야안이 검을 펼치는 모습을 보았을 때보다 깨끗한 그의 옷을 보고 더 충격적으로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이든 몬스터이든 색이 다를 뿐 피가 흐르고 있다. 검을 찔러 넣어 두었다면 상관이 없을 일이지만 검을 찌르고 뺀 뒤에 생명체는 피의 압력으로 인해 분수같이 피를 뿌리게 된다. 압력이 강한 심장 부분은 더욱 그러했고, 목도 그러했다.
그러하기에 지금 자신도 그렇고 용병들도 그러하듯 몬스터의 뜨거운 피를 뒤집어쓴 채였다. 한데 검을 찔렀다 빼어도 피가 안 터져 나오는 경우가 있다.
바로 검기가 실린 검으로 찔렀을 때이다. 검기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다. 체내의 기운이 검에 발현되어 나오는 무의 유산이다. 현자나 익스퍼트에 올라서는 자가 아니고서는 이것을 느끼지 못한다.
검기의 특성상 세포조직마저 태우는 위력을 보이는데 이로 인해 검기에 베인 상처는 피가 분수같이 터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검기에 베인 상처가 안전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포가 죽어 상처가 치료가 안 되어 상처 부위가 오염이 되어 죽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파일은 이 이야기를 유렌에게서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런지라 야안의 몸에 피 한 점 묻지 않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안 것이다.
‘괴물이로군.’
천재라는 말로는 부족한 이였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구존이라도 저 나이에 저런 경지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파일은 어쩌면 자신이 전설이 될 존재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라 직감했다.
야안은 이번 전투를 통해 여러 가지를 시험해 보았다. 검기를 최소량으로 조절하는 방법이나, 이제 마스터에 다가가는 이화접목이나 사량발천근을 실전에서 어떻게 써먹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붉은 오크를 토벌하러 가기 전 이 경험 많은 용병들 사이에서 자신의 실력을 점검해 본 것이다. 생각보다 코볼트가 약한 편이라 많은 것을 해보기도 전에 전투가 끝이 났지만 소량의 성과를 거둔 거라 만족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레벨이 낮았기에 그 과정에서 다음 1레벨을 올리는 수치를 반 이상을 채울 수 있었다.
그제야 레벨을 올리는 데 이런 식으로 작용이 되는 것을 알고 놀라워하는 야안은 자신을 괴물 보는 것같이 보는 파일의 눈빛을 보게 되었다.
그 눈빛에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한 야안은 크게 숨기지 않은 채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검지를 갖다 댔다.
예전과는 많이 달랐다.
이제 그에게는 어느 정도 자신의 것을 지킬 정도의 힘이 있었다. 검만을 따져도 직위를 얻는다면 마일드 왕국에서도 최소 남작의 직위를 얻을 수 있으리라. 물론 공이 없기에 영지는 받을 수 없겠지만.
중급에 달하는 익스퍼트 검사는 웬만한 초급에 달하는 익스퍼트 검사 서너 명과도 같은 전력이었으니 그의 힘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론이 남겨주신 전설의 추종자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가 크게 떠올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파일에게 비밀을 지켜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아무래도 지금 자신이 능력을 모두 보인다면 수많은 이들의 관심의 대상이 될 것이다.
앞으로 대륙의 구존에 대항할 만한 존재로 그의 행동에 제약이 걸릴 것이 분명했다. 벌써 20년이 넘게 구존의 자리에 도전할 이들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시기에 그의 등장은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 분명했다.
파일은 생각이 깊은 자라 야안이 무엇 때문에 그러한 것인지 짐작하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표정을 수습하며, 코볼트 시체 처리에 한 손 거들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의 몸속에는 인이라는 성분이 과다하게 자리했다. 그래서 몬스터의 질긴 가죽을 뚫을 수 있다면 불을 붙이는 것은 여반장과 같았다.
몬스터의 가죽은 돈이 되기에, 심하게 난도질한 상태가 아니라면 코볼트의 가죽을 벗겨냈고, 또한 이들의 손톱은 마법 실험에 필요한 재료라 모두 뽑아내어 모았다.
용병만이 아닌 상인들과 인부들도 모두 거들었는지라 빠른 시간 안에 모두 처리할 수 있었다. 코볼트의 시체에 불을 붙여 태워버리고 남은 재는 나무에 뿌렸다.
코볼트 가죽과 손톱은 모두 이 상행을 주도하고 있는 상주가 사들였다.
파일은 그렇게 얻은 40골드에서 가장 높은 성과를 올린 야안에게 10골드를 건네고 각자 수하들에게 1골드를 성과급으로 주었다. 나머지 10골드는 이틀 뒤에 도착할 왕성 도시에서 상처 치료와 무기 손질 등으로 쓰일 예정이었다.
야안은 파일이 준 10골드를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마론 스승님이 쓰신 책을 통해 이런 호의는 거절하는 것이 오히려 상대를 모독하는 일이라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첫 전투였고, 피를 보는 전장의 일을 겪었음에도 스스로 크게 생각하지 않는 것에 야안은 자신이 기이하다 여겼다.
역사책이나 기타 여행기를 쓴 저서들을 보거나 또는 예전 전쟁에 참여한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사흘 밤낮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죄책감이나 혐오감에 시달린다고 했다.
그만큼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는다는 것인데 야안은 고민하다 아마 자신의 유년 시절이 제대로 된 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결론 지었다.
그렇게 마음을 잡자 생각지 못한 거금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궁리했다.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힘으로 번 돈이었다. 자신의 마을에서 밀 스무 포대를 살 엄청난 금액인 것이다.
물론, 자신이 만든 마법 물품이 인정을 받아 좋은 값을 받게 된다면 지금의 돈은 그에 비해 적을지 모른다.
하지만 처음으로 번 돈인 만큼 언제나 사랑을 아끼지 않으시는 부모님께 무엇인가 선물을 해드리고 싶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야안은 왕성 도회지에 상당한 물류가 오고 간다는 말을 들었다. 그중에는 얇고도 따듯한 옷감들이 있다고 하니 야안은 그것을 부모님께 사드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옷감으로 멜리나와의 결혼식에 입을 옷을 지으신다면 더할 수 없이 좋은 일.’
생각이 꼬리를 물어 멜리나와 멜리나의 부모님께도 선물할 것을 생각하던 야안은 상인들의 물품 상태 확인이 다 끝이 나자 자신도 손질하던 검을 검집에 넣으며 상념을 지웠다.
이틀이 지나 야안은 왕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동안 야안은 작은 무역도시 하나와 백작 영지를 지나쳤다. 시골 영지에서, 그것도 고작 100가구가 고작인 시골 마을에서 살았던 야안에게 있어 작은 항구도시나 백작급 영지는 새로운 세상이라 해도 무방할 일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길에서 오고 가는 모습을 보며 갑갑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에게 문화 충격이었다.
하지만 정작 마일드 왕성에 자리한 대도시에 들어선 야안은 지금까지와 차원이 다른 문화적 충격을 받아야 했다.
무역을 우선으로 한다는 마일드 왕국답게 항구에는 뒷산만 한 거대한 배 수십 척이 자리하고 있었고, 단층이나 2층짜리 건물이 아닌 5층에 달하는 거대한 목조건물이 아무렇지 않게 길거리에 널려 있었다.
이 건물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도로는 자갈이 깔려 있어 균등했으며, 그 폭은 마차 네 대가 동시에 지나쳐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마차가 다니는 길과 사람이 다니는 길이 따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야안은 그곳에서 인간이지만 피부와 머리 색이 다른 인종들을 보았다. 말로만 듣던 샤트 왕국의 흑인들과 타 대륙에서 산다는 융 제국의 옐로 맨들이었다.
샤트 왕국은 용병 왕국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용병으로서 나라의 살림을 꾸리고 있었다. 땅이 척박해 사람이 살기는 어려웠으나 다행히 그들은 타고난 전사라 할 정도로 신체 능력이 뛰어났다.
실제로 야안은 그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군인에게 진실의 눈을 써 보았는데 확실히 그의 신체 능력은 다른 왕국의 인종보다 신체 능력이 50% 정도 뛰어났다.
그에 반해 융 제국의 옐로 맨들은 자신과 같은 백인들이나 흑인들에 비해 체격이 작은 편이었으나, 손재주나 머리는 다른 인종에 비해 뛰어났다.
그렇기에 융 제국은 달리 현자의 나라라고도 부르는데, 융 제국에 자리한 현자의 탑은 그들의 손재주로 인해 지상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황금빛을 발하는 특수 물질이 탑을 건설할 때 쓰였던 터라 대륙의 사람들은 이들 현자의 탑을 옐로 탑이라고도 부른다.
그 외, 융 제국이 자리한 대륙 너머에는 갈색 피부를 지닌 이들이 존재한다고 하는데 그들은 마법 대신 오크들이 쓰는 주술을 자유롭게 펼친다.
이들은 떠돌이 생활을 하는 유목 민족으로 부족 단위로 살아가는데 간혹 위대한 주술사가 나타나면 그를 중심으로 제국 못지않은 군사력을 만들어내기도 해 융 제국의 존폐마저 흔들어 놓기도 했다.
“놀랍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고 하더니만, 이렇게 다를 수가.”
야안은 연신 주위를 살피며 감탄을 터뜨렸다. 파일은 처음 왕성을 보아 감탄사를 터뜨리는 야안을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과연 저 모습을 보고 누가 익스퍼트에 들어선 검사라 하겠는가?’
파일이 소속된 상단은 이곳이 목적지가 아니었다. 이웃에 자리한 프랑크 왕국이 최종 목적지라 이곳에서 배를 타고 내일 떠나야 했다.
그렇기에 파일은 자신이 자주 머물러 안면이 있는 여관에 야안을 소개해 주었다. 비록 야안이 익스퍼트에 들어선 대단한 실력의 검사라 하지만, 냉정히 따지자면 시골에서 올라온 촌놈에 불과했다.
이 대도시가 겉의 화려함만큼이나 어두운 면이 많음을 잘 아는 파일이었다. 그가 손해 보거나 다치지 않기를 기원하는 마음에 이렇게 그를 신경 써준 것이다.
그가 부탁한 여관의 주인은 이곳의 토박이라 만약 야안이 어려움에 처해도 잘 처리해 줄 것이다.
잠시 이것저것 그에게 신경을 써주던 파일은 자신 못지않게 신경 써주는 상인 케일을 보면서 간단히 인사를 하며 다시 만나기를 기원했다. 그도 다친 부하들을 위해 약을 구입하거나 무기 수리를 위해서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