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29화
나흘이 지난 뒤에야 몬스터 토벌이 시작되었다.
라쿤 백작가가 자랑하는 7인의 기사가 출정의 가장 앞을 자처했고, 그 뒤를 이어 3만에 달하는 보병이 따랐다. 잘 훈련된 500명의 경기병은 기사와 주요 인물들을 보호하며 따랐다.
특히 이곳 라쿤 영지의 백작은 중급 마스터 현자로 그와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 그리고 세 명의 제자들은 철통 같은 호위를 받았는데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
그들이 움직이자 맥스 용병단과 같은 대용병단 세 곳이 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군인들의 칼 같은 질서 정연함 정도는 아니지만 저마다 소규모 모임으로 움직이는 그들의 형태는 군인들 못지않게 매서워 보였다.
이만한 군대를 매년 일으키려면 엄청난 자금이 필요하다. 나라에서 일정 지원금을 매번 보내오지만 10분의 1에도 되지 않는 미약한 수준이었다.
매번 이렇게 군을 일으킬 때면 라쿤 백작은 상당한 손해를 봐야 해야 했다. 하지만 백작은 군을 이끌 수밖에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자금과 인력에 여유가 있다면 한 차례 더 군을 일으키거나 토벌 기간을 늘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오크의 번식력 때문이었다.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그들의 번식력은 인간들에게 악몽과 같았다.
더구나 죽음의 지배자에게 저주를 받은 뒤부터 미리미리 싹수가 노란 오크들을 처리하지 않으면 10년이 지나 새로운 족장이나 대족장과 같은 오크가 자신들의 진영에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그러니 1년에 한 번 그들의 세를 꺾어주어야 했다. 오크 또한 자신들의 수가 너무 많으면 또 다른 위험이 찾아올 것을 알기에 자체적으로 힘이 약한 오크들을 치거나 하는 탓에 오히려 이런 전투를 반기는 편이었다.
전투를 통해서만이 강해진다고 믿는 오크들. 그중에서도 정예라 하는 전사급의 오크들은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광기 어린 전투를 할 수 있는 인간들의 군대는 아주 매력적이라 그들은 매년 이 전쟁에 나가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라쿤 백작의 목표는 벌써 8년째 자신들을 저지했던 호도칸급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황금 갈기 오크였다. 휘하에 1만 오크 전사를 지휘하는 그는 그 실력이 뛰어난 만큼 머리도 영악해 수준 높은 전술을 지휘할 줄 알았다.
물론 인간들만큼은 아니지만 1만이나 되는 중상급 실력의 오크 전사들이 그의 지휘하에 전술을 펼치는 위용은 자연재해만큼이나 끔찍했다. 이곳에서만큼은 대륙에 떠도는 멍청하고 어리석다는 오크에 대한 편견은 버려야 한다.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라쿤 백작은 이번에야말로 황금 갈기 오크의 숨통을 끊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번 대용병단에는 거금을 들여 영입한 중급 익스퍼트의 경지에 들어선 맥스와 그의 대용병단도 있었고, 몇 개월 끝에 완성한 호도칸급의 오크에게 치명타를 줄 마법도 자리했다.
그 마법을 펼치기 위해서는 중급 마정석 열 개를 소비해야 했지만, 성공만 한다면 그 정도의 마정석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런 그의 단호한 결심을 알아서일까? 백작가의 군대는 오크의 숲이라고 부르는 지점에 들어서기 시작했음에도 그 누구 하나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았다.
반나절을 더 올라가서야 몬스터들이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인간들의 수가 우세한지라, 여타의 소형 몬스터 따위는 애초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간혹 나타나는 몬스터는 키가 3미터가 넘는 트롤들이거나 오크들이 타고 다닌다는 회색 갈기 늑대들과 동행하는 가장 하층민 오크들 따위였다.
마치 밭에서 오이 따듯이 몬스터의 목을 치며 이동 속도를 유지하던 그들은 스무 차례의 크고 작은 기습을 받고 나서야 첫 야영지를 만들었다.
중급 마스터 현자가 영주인 만큼 알람 마법의 설치는 빨랐다. 상당한 규모였지만 가져온 마법 물품을 이용하여, 한 시간도 안 되어 대비를 할 수 있었다.
야안은 이번 몬스터 토벌을 같이함으로써 붉은 오크 관련 퀘스트 말고도 새로운 오크 퀘스트를 받았다.
바로 황금 갈기 오크의 세력을 멸살하라는 것이었다.
[황금 갈기 오크와 그 세력을 멸살하라.
등급 : B급
뛰어난 지도자인 호도칸급의 오크 대족장은 최근 대족장들 중에서도 크게 부각되는 존재이다. 이번 토벌에서 그를 없애지 못하면 그는 새로운 도칸의 후계자 수업에 들어갈 것이다.
*미션 완료 시 전투 성과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경험치를 얻을 수 있다.
*이번 전투에 붉은 오크들도 참여했다. 그들의 세를 꺾어놓을 좋은 기회이다.]
야안은 마론이 남긴 책을 통해서 오크들의 계급사회를 알기에 퀘스트는 둘째 치더라도 반드시 이 오크 대족장을 처리하는 데 한 손을 보태기로 했다.
훗날 도칸 계급의 오크가 이곳에 모습을 보이면 그 여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일 것이다. 열 마리의 대족장을 이끄는 존재가 도칸급의 오크이니 그 힘이 마일드 왕국을 덮친다면 진정 재앙 수준이라 하겠다.
새로 받은 퀘스트에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수정하던 그에게 다음 불 당번인 벙어리 사내 하이일이 다가왔다.
머리가 좋은 야안인 만큼 그는 한동안 같이 다닐 하이일, 하이이 형제와의 의사소통을 위해 수화를 마스터한 뒤였다. 아직 고급스러운 수화 방법은 모르지만 그래도 일상적인 대화는 무난하게 할 수 있었다.
하이일은 자신들과 의사소통을 위해 수화를 배운 야안에게 감동해 큰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와 야안의 나이 차는 다섯 살 정도라 친구처럼 지내게 되었다.
야안에게 다가온 하이일은 수화로 야안에게 물었다.
-야안, 고민이 있어? 표정이 심각해 보여.
하이일의 말에 야안은 손을 저어 말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다만 전쟁은 처음이라서 말이야.”
그 말에 하이일은 야안의 마음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이번으로 전쟁은 세 번째였다.
워낙 실력이 좋고 전투에서 빛을 발하는 미켈의 대원이어서 그렇지 아니었으면 저번 전쟁에서 크게 다쳤을 것이다.
‘재수가 없었으면 죽었을지도 모르지.’
하이일, 하이이 형제는 귀가 들리는 만큼 본래 말을 할 줄 아는 비장애인이었다. 하지만 재수가 없게도 그들이 사는 마을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가족을 잃고 살아난 그들은 목숨 대신 목소리를 빼앗겼다.
은퇴 용병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어느 정도 실력은 있었던지라 떠돌며 이런저런 일거리를 하며 검을 닦던 그들은 열여섯에 용병 일을 시작했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독기를 가슴속에 채우던 그들은 이곳저곳을 떠돌다 2년 전에야 이곳에 들어섰는데, 정이 많은 미켈 조장 덕분에 그들은 가슴속의 독기를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 맥스 단장님은 검으로도 유명하지만, 백전노장이시라 전술이 더 유명하신 분이니 말이야. 더구나 넌 실력이 대단하니 뭔지 몰라도 너의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거야.
야안은 수화로 자신을 위로하는 그에 고맙다는 듯 주먹으로 어깨를 툭 쳤다. 처음으로 친구라 할 만한 이를 만난 것이라 그와의 대화는 상당히 즐거웠다.
이야기가 길어지자 그다음 불 당번인 하이이도 같이 대화에 끼어들어 전장을 눈앞에 두었음에도 그들은 유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군대가 오크들을 본격적으로 맞이하게 된 것은 이틀이 지나 야로스 산맥의 초입을 막 벗어날 때였다.
인간들의 군대와 전투 준비를 위해 모이고 있던 300에 달하는 전사들을 이끄는 오크 족장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오크 전사들 외에도 잔일을 위해 데리고 다니는 오크만 2,000마리가 넘어 순식간에 큰 전쟁이 일어났다.
인간들의 수는 압도적이었지만, 오크 족장의 실력은 익스퍼트 초급의 끝에 다다랐고, 최정예만 뽑은 듯 상급 유저급의 전사만 50에 달했다.
더구나 전사들이 타고 다니는 회색 갈기 늑대만 하더라도 몸집이 소만 한 크기라 오크를 떼어 놓더라도 그 자체가 무서운 몬스터였다.
하지만 이런 오크들과 상당한 전투를 겪었던 선임 병사들의 지휘에 따라 군인들은 크게 동요하는 바 없이 연습한 대로 단창을 걸어 던지고, 방패수들로 앞을 막아 공격을 저지하면 뒤의 창기 부대는 그들의 허점을 노려 찔렀다.
오크 족장을 처리하기 위해 7인의 기사 중 세 번째 검이 나섰는데, 그와 족장의 실력이 비슷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했다.
“쿠구구…… 쿠엑.”
네 시간이 지나서야 마지막으로 남은 오크 전사를 처리한 백작의 군대는 세 번째 검이 조금 전부터 승기를 잡더니 결국 족장의 목을 베어내며 사기를 고조했다. 백작은 그를 치하하여 500골드를 하사하고, 기세를 이어 전진 속도를 높였다.
‘역시 마일드 왕국의 오른팔답군. 지금의 모습만 보아도 라쿤 백작가가 얼마나 유능한지를 알겠어.’
하기야 그러니 지난 200년을 넘게 오크들의 침공을 막고 있는지 모른다. 맥스는 전투에 흥분한 용병들을 보며 손을 위로 올리며 소리쳤다.
“흥분들 하지 마라! 오늘 밤이 지나면 이런 전투는 물릴 정도로 겪게 될 테니 말이야.”
그렇게 용병들을 다독이던 그는 품속에서 지도를 꺼내 다시금 자신들이 맡아야 할 부분을 살펴보았다.
오랫동안 오크와 전쟁을 한 라쿤 백작가인 만큼 오크들의 동선을 꿰뚫고 있었다. 또한, 산의 지형을 매번 꼼꼼하게 조사하기에, 퇴로 또한 쉽사리 찾을 수 있었다.
전술가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전쟁에서 전략에 맞춰 어떻게 진형을 짜고 작전을 짜는가도 있겠지만,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퇴로의 확보였다.
퇴로를 제대로 확보하지 않으면 전략적인 이유로 물러서게 될 때 잘못하다 절멸에 가까운 피해를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조금 불리할 때 퇴로를 통해 재빠르게 진형을 다지면 되기에, 자신이 원하는 형식으로 전투한다는 점이 가장 큰 이점이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적은 멀고 나는 가깝게 하라.’라는 전장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는 발이 빠른 용병 조장들을 뽑아 지도를 보여주며 실제 지형이 그런지, 변형된 점이 있는지 또한 후퇴할 경우 어느 곳을 퇴로로 삼아야 할지에 대해 조사하게 했다.
다른 용병단장도 맥스의 의견을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조사에 임했다.
시간이 흘러 산 중턱에 올라서자 오크들의 목책들이 모습을 보였다. 힘이 좋은 오크들답게 거대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목책들은 인간들이 만드는 목책에 비해 이색적인 면이 있었다.
목책의 가장 위로 한 오크가 스무 명의 전사들을 호위 삼아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다른 오크들에 비해 덩치가 두 배에 달하는 오크는 위압적인 인간들의 군대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쿠룩, 쿠루루, 이번에는 빠르게들 왔군, 쿠룩. 저번에는 너희 인간 군대가 생각보다 빨리 빠져서 피를 충분히 달구지 못했다, 쿠르르. 이번에는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군, 쿠룩.”
오크의 숨소리가 거슬리긴 했으나 인간이 말을 하는 듯 매끄러웠다. 또한, 능숙하게 도발하는 그의 모습은 오크라고 믿기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미켈은 입 안이 써 침을 뱉었다.
“퉤, 젠장. 지능이 너무 높은데. 저번보다 더 말이 부드러워진 것 같아. 빌어먹을, 매번 느끼지만 갈수록 이 녀석들과의 전쟁은 어려워지고 있어.”
저번 전쟁에서는 기습 부대에 후송 물자를 막는 전략까지 보였으니 이번 전쟁은 그보다 더 치열한 머리싸움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