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30화
9. 몬스터 토벌 II
오크의 군대는 아직 다 모이지 않았기에, 아무래도 내일 정오가 지나서야 전투가 벌어질 듯 보였다. 인간들 입장에서도 다 모이기 전에 목책을 부수고 들어가는 것보다 투쟁심이 강한 오크들이 목책 밖으로 나와 싸우는 것이 이득이었다.
야안은 앞으로 싸우게 될 황금 갈기 오크의 정보를 얻기 위해 진실의 눈을 펼쳤다. 거리가 멀었지만 그곳까지 마나를 유동할 정도의 마나양은 충분했다.
하지만 강한 몬스터일수록 마법 저항력이 높다는 이야기가 맞는 듯 그의 마법은 실패하고 말았다.
황금 갈기 오크는 자신에게 누군가 마법을 펼쳤음을 알고 마법을 펼친 곳을 바라보았다.
과연 괴물 중의 괴물이라 할까?
야안과 그의 거리는 2킬로미터에 달한 데다, 수많은 용병이 밀집된 사이에 자리한 야안을 그는 한눈에 찾아냈다.
그렇게 야안을 바라보던 황금 갈기 오크는 그가 보기 드문 실력을 지닌 자임을 알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쿠룩, 쿠룩. 크하하하.”
야안은 제6감각을 통해 그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 저 웃음소리도 자신에게 보내는 비웃음이리라.
‘너무 자만했군. 스승님의 가르침에 따라 조심해야 했거늘.’
적의 수장의 눈에 띈 것은 그에게 불행이었다. 그만큼 자신이 있는 곳에 적이 몰릴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야안이 이런 걱정들을 하는 사이 군대는 가지고 온 목재로 주변의 흙을 모아 약식 목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용병대도 고랑을 파고 그 위로 목책을 둘러 그 효과를 배가시켰다.
그렇게 아무 일 없이 그저 전투 준비만을 하며 그날 하루가 지나갔다. 거대한 두 군대가 마주하고 있는 이 대치 상황은 마치 태풍 전의 고요함을 보는 듯했다.
라쿤 백작은 자신의 성에서 몇 개월의 노력 끝에 만든 속박 마법진을 이곳에 펼치기 위해 준비했다.
간단한 속박 마법이라면 초급 마스터도 할 수 있지만, 황금 갈기 같은 호도칸급의 괴물은 고위 현자 비기너 정도는 되어야 그 움직임을 둔화시킬 수 있었다. 움직임을 둔화시키는 정도도 20%가 한계이며 유지 시간도 5분가량이었다.
하지만 이 속박 마법진은 편법인 만큼 10%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 유지 시간은 무려 10분에 달했다.
그사이 자신의 기사들이 그의 시선을 빼앗을 수 있다면 그의 심장에 강력한 마법을 꽂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일은 짧은 찰나에 끝이 날 것이다.’
모든 것이 뜻대로 되기를 주신 아리스에게 그는 짧은 기도를 올렸다.
다음 날 아침.
인간의 진영은 이른 시간부터 소리 없이 분주했다. 말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음식을 만들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아침은 지금껏 먹었던 그 어떤 식사보다 거나하게 준비했는데, 이유는 병사들의 사기를 위한 것도 있지만, 앞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 힘들 것이라 보기 때문도 있었다.
삼삼오오로 모여 배식을 받아 식사하던 병사들은 갑자기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에 반도 채 먹지 못한 음식들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황급히 무구를 점검하고 자신들이 있어야 할 진영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 나팔 소리에 이 같은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오크들이 목책에서 나오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하늘 저 멀리까지 울리는 나팔 소리는 이제부터 지옥 같은 전장이 펼쳐진다는 죽음의 서곡을 듣는 것만 같다.
용병단의 용병들 또한 자신들이 맡은 자리를 고수했다. 베테랑 용병들은 쓴 풀을 씹어대며, 그 긴장감을 달래며 흥분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지휘자에 의해 활시위가 당겨졌고, 빠른 돌파력으로 거리를 좁히던 오크들이 사정거리에 도달하기 무섭게 당겨진 활시위가 일제히 놓였다.
파바바바박.
수많은 화살 비가 하늘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그에 맞추어 오크들은 그 거대한 힘을 과시라도 하는 듯, 등에 매달린 커다랗고 둔탁한 모양의 나무 방패를 들어 올렸다.
수없이 박히는 화살 비 덕분에 돌격하던 오크의 진영이 주춤하기 시작하자, 그사이 인간들의 군대는 마지막 점검을 끝마쳤다.
가장 앞에 선 오크들은 최하층 오크들이었는데, 왜 그들을 선봉으로 삼았는지는 인간들의 다음 공격에서 알 수 있다.
인간들이 흙으로 쌓아 올린 언덕 위 나무 목책 뒤에서 사정거리가 되자 단창을 날리기 시작한 것이다. 사정거리가 50미터에 불과했지만, 그 파괴력은 화살 따위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덕분에 순식간에 가장 앞에 자리 잡은 1,000에 달한 오크가 목숨을 잃었지만, 오크들은 두려운 기색 없이 방패를 앞세우며 천천히 거리를 좁혀나갔다.
거리가 조금씩 줄어들며 10미터 앞까지 다가가자 갑자기 선봉에 있던 오크들의 진형이 흔들리더니 이내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뒤에서 따라오던 오크 전사들이 회색 갈기 늑대들을 타고 인간의 진영에 들어섰다.
장거리에서는 말보다는 못하지만, 짧은 거리에서만큼은 압도적인 도약력을 보이는 늑대들은 무거운 중장비를 한 오크 전사들을 태웠음에도 그 움직임이 가벼웠다.
훌쩍 목책을 뛰어넘어 인간들의 진영에 들어섰는데, 경험이 많은 선임 병사는 침착하게 긴 창대로 늑대를 위협하며 오크 전사들 전용으로 만들어진 방패를 든 방패병을 이용해 압박했다.
그 모습은 마치 거대 곤충과 맞서 싸우는 병정개미들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가장 먼저 들어선 오크 전사들은 별다른 힘도 쓰지 못하고 죽어나갔지만, 뒤를 이어 거세게 밀어붙이는 오크들로 인간 측에서 희생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오크 주술사의 주술 때문인지 오크들은 인간들의 거센 위협 속에서도 두려움이 없었다.
죽고 죽이며 목책을 넘어서는 오크 전사들을 신경 쓰기도 어려울 만큼 정신없는 전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것은 백작의 군대뿐만 아니라 용병대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이들 진영에 오크 족장이 네 마리나 모습을 보여 가슴을 서늘케 했다.
용병단의 단장들은 각자 하나씩 맡았고, 맥스는 그 족장 중 가장 강해 보이는 이를 맡았다.
나머지 한 마리는 그 사정을 안 백작가의 일곱 번째 기사가 다급히 다가와 막았는데, 그 실력이 족장보다 낮아 주위의 경험 많은 용병들과 합심해 겨우 견제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야안은 족장들의 등장에 거세어진 그들의 공격에 용병 진형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점차 자신의 숨겨진 검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가 있는 곳은 전사들은 없었고, 하층 계급인 오크들뿐인지라 굳이 검기를 올릴 이유는 없었다. 만약에 있을 일을 대비하며 힘을 비축하던 야안은 그 치열한 전장의 한복판에서 놀라운 신위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무너지려는 다른 진영에 비해 야안이 있는 곳은 아직 흐트러짐 없이 자리를 잡고 있자, 자연히 살아남은 용병들은 그 진영으로 움직였다.
이내 새롭게 전선을 잡은 그들이 다시 오크들을 압박을 하게 되자, 지루하면서도 순간순간이 섬뜩한 시간과 함께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숨이 목까지 차오른 거친 숨소리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사이를 타고 흘렀으며, 역겨운 피비린내가 후각을 마비시켰다.
극에 달한 고통과 격정이 담긴 울부짖음이 귓가를 울릴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져만 갔다. 힘이 약한 자는 일찍 도태되었고, 살아남은 조장들은 죽은 조장의 대원들 일부를 흡수하여 자신의 대원들과 함께 도닥이며 진형을 다시 짜기 시작했다.
바닥에 흘러넘치는 피 웅덩이만큼 빠르게 지는 석양은 유난히 차갑고 슬펐다. 늦가을이라 해도 올해는 다른 때보다 날이 따뜻한 편이었지만 역겨운 전장의 기운에 일찍 겨울이 찾아온 것 같았다.
석양이 기울기 시작하자, 오크 대전사들의 지시에 따라 오크들이 물러가기 시작했다. 오크 전사들은 처음 전장이 시작되었을 때 보인 그 무시무시한 돌파력만큼이나 재빠른 움직임을 보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썰물이 밀려가듯했다.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하급 오크들이 후미를 잡는 인간들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고, 결국 인간들은 주 전력인 오크 전사들을 상대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첫날의 전투로 전체 전력의 2할이 날아가 버렸다. 오크 진영도 하급 오크들의 전력이 반 이상 날아간 듯 보였다.
그 결과를 보자면 상당히 치열하고 불안한 전장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생각한 바였기에, 군의 책임자들은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이 생각한 한계선까지 가지 않았음을 다행이라 생각해야 했다. 이 첫 전투는 그저 서로의 역량을 살피는 것뿐이다.
그것이 사실임을 반영하는 바, 실제로 죽어나간 이들은 이번에 새로 들어온 용병이나 병사들이 주였다. 지금 살아남아 있는 병사들은 이미 이런 전투를 벌이고 살아남은 자들. 그야말로 전장의 전문가들이었다.
또한 상대 오크 진영도 그러하다. 그토록 많은 오크를 죽였건만 오크 전사들의 시체 수효는 고작 그 수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확실히 병력이 많다는 것은 좋은 일이야.”
라쿤 백작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랬다. 병력이 많으면 확실히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더구나 오크 전사들은 괴물만 아니라면 죽이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뛰어난 무인들이다.
황금 갈기 오크가 상당히 머리가 뛰어나다지만, 결국 오크이다. 오크들은 그 머리를 지탱할 문화와 지식이 쌓여 있지 않았다. 그것은 적장에게 비운이었고, 아군에게는 축복이었다.
하지만 그런 약점을 황금 갈기 오크는 병력의 질과 양으로 커버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런 머리는 그에게 있기에 매번 그를 뚫지 못한 것이다.
라쿤은 이번 첫 전투로 상대의 전력과 자신의 전력을 좀 더 자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하기에 그는 이 마법진을 펼칠 기회를 포착할 수 있도록 전략을 다시 수정해 나갔다.
보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은 실제 짧다고도 할 수 있는 기간이었지만, 전쟁에 참여하는 인간 중 그 누구도 그 시간이 짧다고 하지 못할 것이다.
아주 길고 긴 시간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 전장은 많은 것을 집어삼켰다. 막대한 물자는 물론이고, 죽어나간 인간들의 수만 해도 7,000명에 달했다. 또한, 산세가 바뀔 정도로 바위와 대지는 깎여 나가고 몇백 년을 산 거대한 나무 또한 뿌리째 뽑혀 나가기도 했다.
마치 거대한 태풍이 분 뒤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그런 자연재해 같았던 전쟁도 이제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적지에 오크 전사는 반밖에 남지 않았고, 족장도 둘이나 잃었다. 그 과정에서 백작의 여섯 번째 검이 전사했지만,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절로 고개를 숙이게 하는 숭고한 그의 희생이 승기를 잡는 데 큰 영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분위기도 오래가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그 긴 시간을 참고 인내하다 옆을 치며 합류한 오크들에 의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하지만 아직은 인간들의 전력이 조금은 앞서는 것은 사실이었다.
끝없는 소모전에 지친 것일까?
황금 갈기 오크는 서서히 그 무거운 엉덩이를 떼어낼 듯했다. 그가 움직이는 순간부터 전장은 새로운 전환점에 들어가게 된다.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은 일검과 이검 그리고 라쿤 백작도 움직이기 시작할 터이니 그야말로 총력전이 된다.
확실히 그날은 달랐다. 다른 때와 달리 질서 정연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오크들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보였다. 그것은 인간 진영도 마찬가지.
여기저기서 침 삼키는 소리만이 그 고요를 일깨웠다. 그리고 오크 진영에서 그가 나타났다. 두 개의 머리를 한 거대한 회색 갈기 늑대와 그의 주인인 황금 갈기 오크가 모습을 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