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31화
그는 등장만으로 전장의 흐름을 좌지우지할 듯했다.
“쿠룩, 쿠루루, 이제 끝을 내보자.”
그의 말 한마디에 귀를 찢어버릴 듯, 거대한 북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그에 질세라 인간 진영에서도 북을 치기 시작했고, 곧 그들과 인간의 진형이 부딪쳤다.
야안은 황금 갈기 오크 옆에 자리한 제사장의 모습을 한 붉은 오크 족장을 찾을 수 있었다.
제사장은 오크 주술사 중에서도 몇 되지 않는 뛰어난 자들이었다. 다음 대의 도칸의 후보 중 하나답게 제사장까지 세력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번 기회에 저 제사장을 잡아야 한다. 저자 때문에 라쿤 백작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일 테니.’
잡을 수만 있다면 일거양득인 일이다. 그리고 그 후 자신은 이 진영을 벗어나 붉은 오크의 본거지로 가 대현자의 유물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제 떠나야 할 때가 왔다.’
지금이라는 생각에 야안은 옆에 자리한 두 친구에게 수화로 작별을 고했다. 갑작스러운 작별의 통보였지만 하이일, 하이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수화로 ‘무사히 다음에 또 보자.’라며 의사를 보일 뿐이다.
야안은 그런 친구들의 모습에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 말 않고 오랫동안 지켜온 자신의 자리를 벗어났다.
그의 몸놀림은 워낙 빠르고 은밀하여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장의 뒤까지 다가갔다.
일검과 이검이 위험에 처하자 라쿤 백작은 마법진을 발동했다. 현재 붉은 오크 족장인 제사장은 자신 휘하의 주술사들과 함께 대족장이 위험에 처하지 않게 라쿤 백작 측의 마법을 방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유능한 제사장이었으나 바로 이어 거대한 마나 유동과 함께 펼쳐진 마법진은 그로서도 막을 수 없는 종류였다.
“쿠르르, 이건 뭔가?”
갑자기 무언가 자신의 몸을 제어하자 황금 갈기 오크는 놀란 듯 일검과 이검의 검을 맞받아치며 몸을 빼냈다. 어지간한 마법은 통하지 않는 마항력이 그에게 있건만 고위 현자급의 마법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자신의 몸 같지 않았다. 갑자기 낮아진 능력치에 감각이 불일치되어 그의 전투 능력이 크게 감소했다.
바로 이 점이 이 마법의 무서움이었다. 고수일수록 자신의 몸 상태에 예민한 법이다. 한데 갑자기 10분의 1이나 능력이 낮추어진 몸이라면 감각의 이상 신호가 오게 마련이다.
“쿠룩, 이딴 잔재주라니. 실망이구나, 쿠르르르.”
하지만 그래도 호도칸이었다. 그는 그 치명적인 상태에서도 여전히 일검과 이검 둘을 압도해 나갔다.
하지만 진정한 노림수는 그 두 명의 기사가 아니었다. 바로 라쿤의 마나 대부분이 필요한 하나의 마법이었다.
불의 번뇌라는 마법으로 고위 현자 비기너급의 마법이었다. 중급 현자 마스터가 되면 전력을 다할 경우 이 같은 고급 마법 하나 정도는 펼칠 수 있다.
압축한 화염의 정을 뿜어내는 이 마법에 스치기만 해도 그에게 큰 치명타를 줄 수 있을 것이고, 적중하기만 한다면 필사였다.
하지만 눈치 빠른 제사장은 그런 라쿤 백작의 노림수를 깨닫고 주위에 있던 주술사들을 모두 끌어모아 그의 마법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라쿤 백작은 마법진의 영향이 다 끝나가려 하는데도 마지막 부분에서 막혀 마법을 펼칠 수 없었다.
“이런, 젠장!”
수많은 희생 끝에 겨우 이 한 번의 기회를 잡았는데 결국 실패하는가? 입에서 불이 나올 것 같은 심정이다.
눈앞이 흐릿해져 갔다. 그랬다. 절망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일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제 곧 마법진의 시간이 끝이 날 것이다.
그는 비관적인 생각에 빠졌고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했다.
그때였다. 자신의 마법을 방해하던 오크의 주술이 사라진 것은.
그리고 동시에 라쿤 백작의 마나가 한 번에 쭉 사그라지며 어른 엄지손가락만한 불의 번뇌가 튀어 나갔다.
그것은 마치 불붙은 작은 화살을 연상케 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세차게 날아가던 그것은 힘없이 황금 갈기 오크의 가슴에 적중했는데, 적중된다 생각한 순간 그 빈약한 모습과는 달리 거대한 불의 회오리가 일어나며 황금 갈기 오크를 넝마 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다.
라쿤 백작은 주술사의 견제 탓에 이 한 번의 마법에 상당한 정신력을 소모해 정신을 놓고 말았다.
그는 의식을 잃어 가면서도 하나의 궁금증을 쉽게 떨치지 못했다.
‘도대체 방해하던 주술이 왜 사라진 것일까?’
그 하나의 궁금증을 뒤로한 채 라쿤 백작은 정신을 잃었고, 그때부터 대족장을 잃어 정신을 못 차리는 오크들에게 그동안 당한 응분을 풀기 위한 인간들의 거센 반격이 시작되었다.
야안은 황금 갈기 오크가 지배하고 있는 전장에 다가가면서 자신의 본 힘을 모두 이끌어냈다. 검기를 날려 자신을 덮치는 늑대의 목을 잘라내고, 동시에 팔방에서 달려오는 오크들을 향해 찌른 검은 어느새 그의 목줄을 따고 있었다.
전장의 깊은 곳에 들어온 것이라 넘쳐나는 오크들의 공격에 그는 침착히 구의 발현을 유지했다. 그러면서도 지금 가장 치열한 격전을 펼치는 대족장과 기사들의 전투를 바라보았다.
‘좋지 않구나. 저러다가 저 두 명의 기사도 죽음을 맞이하리라.’
자신이라도 도울까 했지만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상대는 상급 익스퍼트의 끝자락에 다다랐으니.
어찌해야 할지 몰라 고심하던 중, 라쿤 백작이 있던 진영에서 거대한 마나가 유동되며 마법이 펼쳐졌다. 야안 또한 현자라 그 마법이 자신은 짐작도 못 할 고위 마법임을 단숨에 느꼈다.
그 마법은 황금 갈기 오크에게 적중되었고, 동시에 그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마치 거대한 족쇄에 묶인 듯했는데, 야안은 그때서야 라쿤 백작의 생각을 깨닫고 감탄사를 터뜨렸다.
“아! 대단하군. 설마 이 순간을 위해서 그토록 인내하신 건가?”
그는 라쿤 백작의 그 놀라운 인내와 자제력에 마음 깊이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그사이를 노려 라쿤 백작이 준비하는 마법이 붉은 오크 제사장에 방해를 받게 되자, 야안은 직감적으로 이때를 놓치면 크게 후회할 것임을 깨달았다.
결심이 서자 그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카의 조각을 발동했고, 그로 그의 신체는 청동 조각 같은 강력한 강도로 변모했다.
그는 지금껏 검으로 세세하게 적의 암습과 공격을 모두 막아왔는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지자 자잘한 것은 몸으로 받아넘긴 채 다시금 검기를 모아 날리며 주술사가 있는 곳을 향해 돌파하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불길이 가로지르며 타오르듯 그 무엇도 야안을 막지 못했다. 그가 지나친 곳은 잠시 공기가 사라진 진공 상태를 상기시켰다.
갑작스러운 강자의 출현에 오크들은 혼란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야안은 그런 낮은 계급의 오크들을 뒤로한 채, 주술사들을 보호하고 있는 오크 전사들 수십 마리와 맞닿게 되었다.
갑자기 나타난 적의 출현에 오크 전사들은 크게 흥분한 듯 야안에게 무시무시한 힘으로 압박해 들어갔으나, 야안은 약한 공격은 몸으로 빗겨 맞고 흘리며 자신이 가려는 길을 막아서는 오크 다섯 마리를 베어내더니 다시 길을 뚫었다.
강력한 돌파력으로 드디어 주술사들이 있는 곳까지 도착한 야안은 그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모든 힘을 뿜어냈다.
마치 사신의 낫과 같은 기세로 검기를 뿜으며 주술사 십여 명을 베어내던 야안은 그 기세를 몰아, 갑자기 자신에게 향하던 주술력이 끊기자 뒤를 돌아본 붉은 오크 제사장의 미간을 꿰뚫고 지나쳤다.
그 모든 일이 한 호흡에 이루어졌고, 그랬기에 기감이 비상한 황금 갈기 오크도 야안이 이만큼 다가와 일을 벌인 것을 알지 못했다.
야안이 그 모든 일을 끝낸 바로 직후에 하늘의 번개가 내려치는 듯한 소음이 그 뒤를 이었다.
쿠구국궁.
“후, 후우. 성공인가?”
야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라쿤 백작의 마법은 처음 보는 종류였고, 또한 생소한 만큼 고위 마법 중에서도 대단한 위력을 자랑하는 것으로 대족장의 몸이 갈기갈기 찢어나갔다.
그 공격의 여파에 야안의 몸도 뒤로 밀려갈 정도였다.
순식간에 모든 힘을 쏟아부은 야안은 정신적이나 육체적으로 지쳐 있었다. 하지만 너무 깊이 들어와 있는지라 물러설 곳도 없었고, 또한 지금이 아니면 붉은 오크 마을에서 퀘스트를 성공할 기회도 없었다.
그는 그동안 모아놓은 11스탯으로 모든 능력치에 1스탯씩을 올렸다. 그러자 믿기지 않을 만큼 정신이 맑아지고 바닥을 친 마나가 반 이상 찼으며, 지친 육체는 피로를 물리며 어느 정도 활기를 되찾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동시에 자잘한 상처도 빠른 속도로 나아지기 시작했는데, 야안은 자신이 예측한 대로 몸이 빠르게 회복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공황에 빠진 오크들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굳이 다 죽일 필요도 없었다. 대족장의 부재는 오크들에게 큰 충격이었기에 오크들의 그 거칠고 사나운 기세는 크게 약화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야안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길을 뚫으며 자신이 이곳에 온 본래의 목적을 향해 달려나갔다.
곧 그의 뒤를 이어 인간들의 군세가 야안이 지나친 곳을 메우기 시작했다.
1,000년간 몬스터들만이 그 맥을 이어온 야루스 산맥의 한 자락에 흉측한 몰골의 거대한 인영들이 여기저기서 모습을 보였다.
붉은 오크들이었다.
붉은 오크들은 오우거도 두려워할 만큼 강력한 포식자들이다.
다른 오크들보다 천성적으로 덩치가 크고 힘이 강해, 전사들 하나하나가 상급에 달했다. 그들 열이면 오우거와 상대해도 밀리지 않는 실정이었으니 이곳 산맥의 근처에서는 붉은 오크의 노린내가 퍼지기가 무섭게 생명체들이 모습을 감추었다.
지금은 그들의 강력한 지도자인 제사장이 전사들을 이끌고 나가 겨우 100에 달하는 전사와 3,000에 달하는 하급층 오크들만이 영역을 지키고 있었다.
비록 지금 세가 약해졌다고 하나 이들에게 다가가는 생명체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외가 없지 않았다. 상당히 고생을 한 듯 여기저기 오크의 피로 몸을 적신 듯한 사내가 그들의 영역에 들어선 것이다.
“여기부터가 그들의 영역인가? 후, 이틀 거리를 확보하긴 했지만.”
야안은 그동안 전쟁에 진 오크들이 몰려오기 전, 퀘스트를 해결하기 위해 빠른 속도로 움직였지만, 고작 이틀 거리밖에 확보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그는 그동안 잠도 줄이고, 음식 먹는 시간도 아까워 워터 볼로 만든 물에 섞은 파래를 섭취하며 움직였을 정도였다.
야안은 그동안 뛰고 움직이며 상승된 육체 능력에 적응하려 했지만 50%도 채 적응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자신과 같은 등급의 상대가 아니라면 큰 어려움을 없을 듯싶었다.
야안이 그들의 영역에 들어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워터 볼로 오크들의 피를 씻고 근처에 있는 붉은 진흙을 몸에 바르는 것이었다. 얼굴은 물론이고 갑주와 검집에까지 세심하게 발랐는데 그 이유는 오크들의 비정상적인 후각 능력 때문이었다.
그들 오크의 후각은 인간의 후각에 비해 천 배나 뛰어난지라 그에 대응하기 위해, 붉은 진흙을 발랐다. 이러면 인간 특유의 냄새를 감추어 들키지 않고 오크에게 상당히 다가갈 수 있었다.
거대하게 솟은 나무 위를 뛰어다니며 오크의 진영을 살피는 것과 동시에 어디에 퇴로가 있는지를 확인한 야안은 오크들의 숨겨진 비밀을 알기 위해 그들의 주위를 살폈다.
한나절 동안 오크 진영을 세세히 살피던 야안은 진영의 뒷부분에 있는, 나무가 무성한 곳 근처에서 철문을 찾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