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32화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오크 전사들이 유난히 그 주위를 돌아다니는 강력한 방어 체제가 아니었다면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지하 동굴인 듯한데.’
그 입구의 크기는 덩치가 큰 붉은 오크의 체형으로는 겨우 한 명이 들어갈 듯했다. 야안은 다른 수상한 곳도 찾아냈지만, 그보다 더 은밀한 곳은 없었음을 알았다.
직감적으로 그곳임을 깨달은 야안은 이 장소를 중심으로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주위의 지형을 만지며 시간을 벌어줄 간단한 트랩들을 만들었다.
그가 만드는 트랩들은 스승의 책에서 배운 것으로 간단하면서도 위력이 대단한 것이었다. 나무를 매다는 것도 있었고 땅을 파 죽창을 박아 넣거나 간단한 올무들을 만들어 움직임을 방해하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트랩을 얼마나 잘 은폐하고 또한 어디에 놓느냐인데, 야안은 스승 마론 현자의 가르침을 통해 오크들이 움직이는 경로를 예측하며, 다수가 움직일 때 어떻게 혼란을 주는 것이 좋은가를 배운 바 있었다.
그는 가장 밤이 깊은 시간에 움직이기로 했는데, 이유는 어둠의 자식인 오크들이 그 생김새와 기질과 달리 밤에는 오감이 현저하게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오크와 인간들의 전쟁은 밤이 되면 그쳤는데, 만약 그것이 아니었다면 오크들의 성정을 보아 밤낮없이 전쟁을 벌였을 것이다.
붉은 진흙을 발랐다지만 오크의 시력은 평균적으로 인간보다 두 배나 뛰어났다. 한데 어둠에 잠기면 인간의 반 정도로 떨어진다고 스승의 책에서 배운 바를 잘 이용하면 어둠에 몸을 숨긴 채 상당히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지 모른다.
야안은 오크의 진영에서 가까우면서도 가장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 파래 따위로 식사를 하고 운기로 피로를 푼 뒤 밧줄을 꺼내 나무에 몸을 묶어 짧은 단잠을 취했다.
거목들이 우후죽순처럼 자리한지라 이곳에서 달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생각보다 짧은 시간에 깊은 어둠이 찾아왔는지라 야안은 많은 휴식을 취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다행이라 여겼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고, 일을 끝내고 물러서는 와중에 도망쳐 오던 오크들을 맞이하다 큰 낭패를 볼 수도 있었다. 될수록 이곳에서 빠른 시간 안에 일을 처리해야 했다.
야안은 횃불을 든 채 꼼꼼히 정찰하는 오크들을 보면서 자기 전에 본 투로를 다시 점검했다.
그들의 정찰 투로를 검사하던 그는 정찰의 교대 시간이 다가오자 그때를 놓치지 않고 맞추어 몸을 날렸다.
탁.
무사히도 오크의 진영에 들어선 그는 낮에 본 지형지물을 이용해 그 비밀 장소를 향해 다가갔다.
중간 중간 오크들을 마주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자 단검들을 날려 목을 꿰어내어 소리 없이 죽인 뒤 검기를 일으켜 다시 상처를 베어냈다. 어둠 속에서도 강한 후각을 지닌 오크들을 의식해서였다.
불로 지지면 냄새가 나는지라 그보다 마나 손실이 큰 검기로 흘러나오는 피를 멈추게 한 것이다.
그는 그렇게 스무 마리의 하급 오크를 처리한 끝에야 그 비밀 장소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야안은 비밀 장소를 철통으로 경계하는 오크 전사들이 교대하는 시간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그들이 자리가 바뀌자마자, 단검을 날렸다.
하지만 하급 오크와 달리 단검으로 처리한다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단검으로 시선을 끈 뒤, 거리를 좁혀 검기를 생성해 그들의 목을 쳐냈다. 야안은 그런 식으로 다섯 차례의 일을 끝내서야 비밀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간이 없어.’
30분을 기준으로 자리를 바꾸는 그들을 볼 때 이제 10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는 이제 적어도 10분 안에 문 앞을 지키는 오크와 늑대들을 소리 없이 처리하고, 철문 안으로 들어가 일을 끝내야 한다.
야안은 이날을 위해 연습했다는 듯 빛 계열의 마법인 나스를 펼쳤다. 이것 또한 고대 마법 중 하나로 지금의 라이트 마법과 같은 형식이지만 마나를 얼마나 주입하느냐에 따라 빛의 밝기가 달라진다.
오크가 어둠 속에서 살기에 빛에 약하다고 하니 갑자기 강렬한 빛을 받으면 한동안 시력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의 생각처럼 일순간 태양을 바라보는 듯한, 강렬한 빛이 그들 눈앞에서 터져 나가자 오크들과 늑대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야안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단검을 던져 늑대들의 성대를 절개하고 오크들의 목을 베어냈다. 이후 재빠르게 늑대들에게 다가가 단검에 검기를 주입해 빼냈다.
다행이라 할지 철문이 있는 곳은 우거진 나무 때문에 빛이 새어 나가지 못해 다른 오크들은 눈치를 채지 못한 듯 보였다.
아니, 그러기를 바랐다.
야안은 이번에도 검기로 이들의 상처를 이겨 피를 막은 뒤 짧은 한숨으로 긴장을 풀어내며 철문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여기까지 최소한의 힘으로 들어왔으니 나갈 때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 할 것이다.
철문은 생각보다 두꺼워 성인 남자 세 명의 무게보다 더 나갈 듯했지만 야안은 큰 수고로움 없이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지하 동굴은 상당히 넓었는데, 그 크기나 범위도 예전 폐쇄된 던전에서 본 듯 새벽빛이 동굴에 은은히 감돌고 있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기에 새벽빛이 이끄는 대로 빠르게 움직이던 야안은 순간 무언가 이질적인 기운에 걸음을 멈추었다.
“이건, 무슨 기운이지.”
그것은 괴이한 기운이었다. 물도 아니고 불도 아니었다. 뜨겁고 타는 듯한, 강렬한 느낌을 주는 어떤 무언가였다.
야안은 이 기운이 낯설지 않았던지라 잠시 고민하다 이내 알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 이건…… 뇌전. 그래, 그것이구나.”
세상의 모든 삿된 것을 멸하는 정화의 극치이며, 모든 것을 태워 없애는 파괴의 극치이기도 하다.
한데 그 기운이 지금 이곳에서 왜 느껴진단 말인가?
야안의 의문에 답이라도 하듯 기운의 파장은 더욱 강력하게 동굴 속을 채워갔다. 야안은 잠시 망설이다 이내 서둘러 그 기운이 흘러나오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동굴은 상당히 깊어 수백 미터를 움직여서야 그 기운의 정체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작고 흰빛을 발산하는 구슬이었다.
그 구슬은 오크의 십여 개나 되는 강력한 주술에 묶여 있었음에도 그런 파장을 보였는데, 마치 그 주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기운의 파장은 덫에 걸린 작은 새가 우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이것인가? 숨겨진 비밀이란 것이.”
야안은 자신의 검으로는 이 주술 더미들을 처리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이런 주술 더미는 날카로움이 아닌 오직 힘과 힘의 대결로써 끊어야 하는데, 준명검에 달하는 그의 검일지라도 이 두 개의 기운을 버텨내기 어려울지 모른다.
야안은 인벤토리를 불러 그동안 몇 번 써보지도 못한 전설의 검을 꺼내 들었다. 전설의 검은 대현자의 지팡이를 벗어나 모습을 보이자 마치 스스로 의지라도 지닌 듯 짧은 검명을 흘려댔다.
스스로 실력을 향상하기 위해 능력 이상의 힘을 보여주는 이 무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경계하느라 크게 가까이하지 않았지만, 이 검은 그 예기만으로도 예전 무기점에서 본 위대한 망치의 칠검에도 능히 대적할 만한 것이었다.
아니, 봉인이 되었다고 하니, 그 본래의 힘을 보인다면 어떤 모습을 보일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절대 파괴할 수 없는 검이라는 정보가 확실하다면 지금 이 순간을 헤쳐나가는 데 최고의 무기라 할 만했다. 더구나 검기의 출력을 두 배로 높여주는 효능을 지니고 있으니 이 주술과의 힘 싸움에서도 상당한 도움이 되리라.
야안은 잠시 눈을 감아 몸과 마음을 더없이 고요한 상태로 만들었다. 몸과 마음이 일체가 되고 기의 발현이 극한에 다다르자 야안은 손에 쥔 검을 천천히 내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마치 지반이 무너질 것 같은 충격이 동굴 안을 울려댔다. 단순히 힘의 파장만으로도 거대한 충격이 일어난 것이다. 그 엄청난 반발력 때문에 야안의 몸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에 마지막 기운마저 검에 부어 넣었고, 그제야 야안은 그 충격의 여파를 버텨낼 수 있었다.
툭, 툭…… 툭.
과연 전설의 검이라고 할까? 그 숨겨진 비밀이 무엇인지, 각성하면 어떤 모습을 보일지 모르지만 야안은 지금 이 검의 힘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이런 힘이라니. 말도 안 되는군.’
야안은 본능적으로 지금까지 이 검을 멀리한 것에 대해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직 자신은 이 검을 다루지 못했다.
예로부터 마검이라는 것이 있었고, 또한 성검이라는 존재도 있었다.
하지만 이 성검과 마검은 사실 인간들의 잣대에 맞추어 나누었을 뿐 차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명검을 뛰어넘은 능력을 지닌 검이라는 점에서는 같았다.
성스럽다는 전설이 있는 검도 악에 쓰이면 마검인 것이고, 마검도 선한 일에 쓰면 성검이었다. 하니 어째서 인간은 그저 검일 뿐인데 둘로 정체성을 나누는 것인가? 사실 그 책임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사용자의 능력이 검에 미치지 못한 경우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오히려 검에 휘둘리게 되며, 그 성정이 잔혹해지고, 인내심을 잃게 되며 마지막에는 자아까지 붕괴된다.
하니 뛰어난 검을 얻었다 해도 사용할 만한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면 오히려 사용하지 않는 게 더 나았다.
제6감각이 그에게 경고를 보냈고, 그랬기에 야안은 치열한 전장에서도 이 검을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이렇게 사용하니 야안은 이 검이 보이는 힘에 벌써 마음이 현혹될 지경이었지만, 그럴수록 마음을 모아 고요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다.
안쪽에 자리한 주술일수록 부딪치는 힘의 반동은 점차 증가했다. 그 충격파에 동굴 속의 기반이 무너지기라도 하듯이 높은 천장에서는 돌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그 지진과도 같은 충격을 오크들도 느꼈던 모양이다. 조금 전부터 저 멀리서 들려오는 오크의 발 구르는 소리와 특유의 함성에 주저함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생각보다 빠른 시간이다. 아무래도 입구에서의 마법 때문인가 보구나.’
그래도 다행이라면, 이 동굴의 폭이 길다는 점. 도착하려면 적어도 2분가량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야안은 점차 다가오는 오크들의 소리에 좀 더 힘을 가했고, 결국 오크들이 그를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까지 와서야 마지막 봉인을 끊을 수 있었다.
그 마지막 봉인을 끊는 데 필요한 힘은 대단했다. 그 힘의 파장에서 그런지 아니면 본래 그런 함정이 있었든지 동굴이 무너지려는 기미가 보였다.
그 현상에 살기 가득한 오크들도 순간 당황했다. 그런 오크들을 보며 그 하얀 구슬을 인벤토리에 던지다시피 넣은 그는 거친 숨소리로 홀로 중얼거렸다.
“하아, 일단 어쩔 수 없지.”
전설의 검이 주술을 부수는 데 큰 힘을 주기는 했으나, 그래도 제사장이 걸어두었던 주술인 만큼 그는 체력이나 정신적으로 바닥을 친 상태였다.
야안은 내키지 않았지만, 자신과 비슷한 실력을 지닌 이가 없기를 바라며 다시 남은 스탯으로 각 스탯을 하나씩 올렸다.
특히 지혜에는 남은 하나를 더 올렸는데, 그 이유는 지금부터 그가 이 검으로 오크들을 뚫고 나가기 위해서 써야 할 전설의 검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