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38화
그러면서도 야안은 어머니가 모르는 사이 병약한 몸을 한시라도 빨리 회복하려 힐링과 마케를 쉴 새 없이 걸어주다 어머니의 안색에서 활력이 보이자 그제야 참았던 말을 털어놓았다.
“어머니, 아버지는 어디에 계신가요?”
“아! 그러고 보니. 그래, 너희, 너희 아버지가 오늘 어디에 가신다고 하셨지?”
기력이 없어 낮 내내 멍하니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바라던 그녀는 남편이 무엇이라 말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러니깐…… 그게…….”
자신의 굳은 머리를 탓하려는 마리였지만, 그때를 맞추어 말 울음소리가 급히 들려왔다. 그리고 말을 마구간에 채 넣지도 않은 채 누군가 문을 세차게 열며 모습을 보였다.
베론 가한이었다.
그는 몹시도 급하게 온 듯 반백의 머리는 정리가 안 되어 제멋대로 휘날렸고, 차가운 공기 탓에 얼굴이 얼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들! 야안아.”
베론 가한은 자신의 아내와 같이 있는 아들을 보자 크게 기뻐하며 그를 안으며 말했다.
“정말이더냐, 네가 시험에 붙은 것이.”
“네, 사실입니다. 아버지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야안의 말에 베론 가한은 자신이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해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베론 가한은 예전 안면이 있던 남작의 가신 중 한 분에게 부탁을 하러 갔다. 이곳 영지에 성을 받은 촌장은 둘뿐인데 그중 하나가 베론 가한이었으니, 예전 그의 조상의 공을 생각해 그 귀족도 베론 가한의 부탁을 긍정적으로 생각했지만, 결론은 어렵다였다.
그러며 말하기를 자신들도 모든 재산을 바쳐 전쟁을 준비하는 만큼 이번 남작님의 전쟁 준비는 역대 남작 중에서도 최대의 규모라 했다. 그런지라 어떻게 손을 쓸 방법이 없다고.
절망적인 소식에 베론 가한은 어쩔 도리가 없어 나갈 수밖에 없음에도 선뜻 걸음을 떼어내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귀족이 부리는 시종이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꺼냈다.
조금 전 만난 가신이 긴급하게 알려준 소식이라면서 자신의 아들이 이번 시험을 통과하여 준귀족에 올라섰다는 것이었다. 아마 지금쯤 집으로 가고 있을 것이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에 그는 크게 기뻐하며 한걸음에 이렇게 달려온 것이었다.
그는 한참을 아들과 근심을 풀고 해후를 하며 마음이 진정되자 아들에게 말했다.
“어디 그 임명장을 보자꾸나.”
야안은 그 말에 준귀족 임명장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베론 가한은 아들이 건네준 임명장을 서둘러 풀어 읽다 이내 매우 놀람을 보였다.
“이건…… 설마. 장원이더냐?”
그 말에 야안은 볼을 긁적이며 긍정했다.
“네, 아버님. 운이 좋게도.”
“허, 그것참.”
긍정하는 아들의 말에 베론 가한은 쉽게 믿기 힘들어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한 것이 시험에 붙은 것만 해도 기적이라 여기는 시점에서 장원을 했으니.
‘어릴 적부터 영특하다 여기긴 했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겨우 열일곱 살의 나이로 베론가의 오랜 숙원을 이룬 아들이 기특하면서도 여전히 믿기지 않아 그는 그저 말없이 아들의 등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마리는 야안이 펼친 마케와 힐링으로 몸이 나아지고 있었고, 소식에 마음이 즐거워지자 예전의 활기 가득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아직 야안이 식사를 하지 못했다는 것을 잊고 있었는데, 지금에야 생각이 나 급히 말했다.
“아직 식사 하지 못했지. 내 금방 만들어줄 터이니 잠시 기다리려무나.”
“네, 어머니. 잠시만 기다리겠습니다.”
“호호, 녀석도.”
오랜만에 듣는 아들의 장난스러운 말에 마음이 즐거운 듯, 닭 뼈로 육수를 우려 고기와 야채를 다듬어 스튜를 끓이기 시작했다. 베론 가한도 말을 마구간에 묶어놓고 들어와 야안에게 물었다.
“마구간에 보니 예전의 그 말은 없고 다른 말 두 마리가 있더구나. 더구나 그 옆 웬 커다란 마차에 짐이 한껏 실린 듯한데 말이야.”
그 말에 그제야 야안은 자신이 가져온 선물을 소개할 수 있음에 미소를 보였다.
“네, 제가 이번 여정에서 얻은 것입니다.”
그러며 야안은 본래 그대로 말을 했다간 부모님이 믿기지 않아 매우 놀라실 수 있는지라, 적당히 이야기를 각색해서 전했다.
도착이 늦어진 이유는 상단의 호위로서 여러 영지를 돌았기 때문이고, 그 와중에 적지 않은 몬스터들을 만났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오우거도 만났다 했다.
일행들과 합심하여 오우거를 잡았는데, 자신도 한몫했기에 자신에게도 큰 배분이 떨어졌고, 나라에서 전쟁을 선포한 덕분에 오우거 가죽도 시세보다 상당히 비싼 값에 팔 수 있었다 했다.
아무래도 이곳이 변방이니 돈보다는 물건으로 가져오는 게 좋을 듯해서, 그간 호위한 상단의 도움을 받아 마차와 물건을 좋은 값에 살 수 있었다고 이야기를 끝을 냈다.
야안의 말에 그의 부모님은 돈이나 물건에 좋아하기보다는 몬스터들과 오우거를 만났다는 얘기에 크게 걱정의 기색을 보였다. 야안은 볼을 긁적이며 자신도 잘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이 상급 유저의 수준이라며 그들의 걱정을 재웠다.
마리와 달리 베론 가한은 촌장으로서 들어오는 소식이 많은지라 소드 상급 유저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고 있었다.
기사의 바로 밑에 자리한 자들이며 잘 훈련된 병사 수십을 홀로 상대한다는 자들이다. 용병계에서도 그 직위가 대단하여 경험과 명성을 쌓으면 용병대를 창설할 수 있기까지 하니 군에 들어가서 약간의 공을 세운다면 백인장은 할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이었다.
“하, 네가 그간 얼마나 열심히 검을 수련했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 정도의 능력일 줄이야.”
감탄하는 아버지의 말에 야안은 다시금 볼을 긁적이다, 미리 정해둔 60골드가 든 주머니를 꺼내 건네 드렸다.
“여기요. 이래저래 물건을 사고 처분하니 금액이 좀 남았어요.”
야안의 그 말에 베론 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재촉하는 아들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받아들였다.
그리고 브론이나 실버에서 느낄 수 없는 묵직함에 가죽을 열어보니 60골드나 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60골드면 이곳에서 대지주인 자신도 2, 3년간 풍년이 들어야 얻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물론 그렇게 얻은 금액도 반은 영주에게 드려야 하고, 여러 생활필수품이나 음식에서 나가는 비용을 생각하면 15년은 지나야 가질 수 있는 금액이었다.
남편의 반응에 궁금증이 동한 마리가 주머니를 가져와 그 안에 든 금액을 확인하고는 놀라 말했다.
“어머나, 어떻게 이렇게 많은 금액을 가지고 있는 것이니.”
갑작스러운 큰돈에 불안한지 걱정하는 그녀의 말에 야안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어머니도 참. 말씀드렸잖아요. 오우거를 잡았다고요. 가죽이 두꺼워 부유한 천인장들 이상이나 입는 것이 오우거 가죽이에요. 갑주를 만들면 열 벌은 나오는 것이니 금액이 상당하죠.
저는 그중에서 두 개의 갑주에 달하는 금액을 받았어요. 그 외에도 그동안 잡은 몬스터 부산물 따위를 돈으로 바꾸었더니 모두 360골드인데, 이곳에서 쓰기란 큰 금액이라 3분의 2를 저렇게 물건으로 바꾸어 왔어요.”
그 말은 60골드가 더 있다는 말이라 베론 가한과 마리는 상당히 놀란 모습을 보였다. 오우거가 그 사나운 명성만큼 가죽도 비싸게 팔린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 정도의 가격인지는 몰랐던 것이다.
그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베론 가한은 아주 잘했다고 야안의 행동을 칭찬했다.
“그래, 너의 말이 크게 옳다. 네 말대로이다. 이런 변방에 그 정도의 금액이 풀려 좋을 일이 없지. 이제 내일부터 영주 성에 가야 할 것인데, 너의 윗사람들에게도 성의를 보여야 하니 빈손으로 가는 것은 예가 아니다. 그렇다고 돈으로 주는 것은 너무 노골적이어서 싫어하는 분들도 있으니 물건으로 가져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내 듣기로 남작님의 가신들께서도 재산 대부분을 투자하여 이번 전쟁을 준비한다니, 이 어려운 시기에 네가 좋은 물건을 진상하여 그들의 허전한 마음을 풀어 드리면 이 일은 오래 기억될 것이다. 다만 내가 너에게 걱정하는 것이 있다면 너의 뛰어난 검 실력은 숨겼으면 하는 것이다. 워낙 이번 남작께서 호전적이신 분인지라, 너의 실력을 안다면 결국에 너를 전쟁터에 끌고 갈 것이니 말이야.”
역시 연륜은 무시 못 하는 것이었다. 촌장이라 해도 마을을 다스리는 지도자이니만큼 이곳 영지의 정치적인 성향을 잘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자신의 상관들에 대해서 잘 알아야 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추구하는지에 대해 잘 알아야 하는 일을 여타의 촌장과 달리 학식이 높은 그가 몇십 년간 행했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쌓아온 그의 노련함이 지금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야안은 그렇게 하겠노라 하면서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 덕분에 식사 시간은 연기되었지만, 그 누구도 배가 고파하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마리는 지금껏 생전 보지 못한 고급스러운 천을 매만지며 감탄사를 내놓았고, 야안이 왕성 도시에서 가져온 훌륭한 디자인의 옷을 보며 대단히 기뻐했다.
베론 가한 또한 야안이 건네준 고급스러운 음각이 멋진 예전의 담배 파이프보다 길이는 짧은 담배 파이프에 감탄했다. 답답한 마음에 담배 파이프를 내던져 버렸던 터라 마음이 한결 편해진 지금 한 모금의 담배를 느끼고 싶었는데 참으로 잘되었다 싶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야안은 외국에서 들어온 담뱃잎을 꺼내 드렸다. 그것은 담배와 같은 느낌을 주는 물건이지만 사실 환자에게 쓰이는 몸에 좋은 향로로 오히려 꾸준히 가까이하면 정신과 몸에 활기가 도는 물건이라 흡연자들이 상당히 선호하는 물건이었다.
그 맛도 좋아, 벌써 담뱃잎을 파이프에 넣어 피우던 그는 순하면서도 은은함이 감도는 향에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 외에도 그는 이름 모를 약초들을 보고 감탄했는데, 어느 정도 약초를 볼 줄 아는 그로서는 이것들이 상급의 뛰어난 효능을 지닌 것임을 단번에 알았다.
야안이 꺼내놓는 물건에 크게 기뻐하던 그의 어머니는 요란히 끓는 스튜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식사 준비를 서둘러 끝냈다.
고기 스튜를 끓였는데 그중 고기가 반이었다. 사실 그들은 야안이 가기 전에 절여놓은 고기를 별로 먹지 못했다. 나이가 들어 소화가 잘되지 않는 고기류의 식사가 불편하셨던 탓이다. 그런데 오늘 식성이 좋은 아들이 돌아왔으니, 재어놓은 고기를 한껏 풀어놓을 수 있었다.
곧 음식이 완성되었고, 베론가는 실로 오랜만에 세 식구가 모여 식사를 즐겼다. 식사를 마치고 담배 파이프를 찾아 다시 담배를 피우던 베론 가한이 아들에게 말했다.
“그래, 이제 그만 가보는 게 어떠냐. 시간이 늦었지만, 사실 좋은 소식에는 실례라는 것이 없는 법이란다.”
남편의 말에 마리는 아차 하며 자신의 건망증을 탓했다. 그녀는 그제야 잊고 있던 한스네와 자신을 크게 어려워하지 않고 애교를 곧잘 부리는 멜리나를 떠올렸다. 딸과는 인연이 없는 그녀에게 여자아이의 그런 애교는 상당한 즐거움을 주었다.
‘고것이 얼마나 힘들어했는데.’
나중에 한스네 부인에게 들었지만, 멜리나 또한 자신처럼 매일 새벽 기도를 한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눈물을 훔쳤는지 모른다.
그녀는 서둘러 야안의 등을 밀며 말했다.
“어여 갔다 오너라. 안 그래도 그 아이가 우리 못지않게 네 걱정을 하는 모습이 참으로 가슴이 아프더구나. 그래, 그러고 보니 이 옷과 물건들이 한스네 것이었구나. 기특한 것. 너의 아버지 말대로 이처럼 좋은 소식에 실례라는 말이 없는 법이야.”
어머니의 비통해하는 모습에 놀라 멜리나를 잠시 잊었던 야안은 점차 분위기가 좋아지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자 마리가 다시 꾸려준 선물들을 들고 한스네로 갔다.
잠시 후 한스네의 식구들이 야안네 집으로 축하의 인사를 하기 위해 모습을 보였다. 한스는 예전 사냥꾼이 가져갔던 상당히 잘 익은 위스키 한 통을 들고 와 술잔치를 열었다.
한스의 부인과 마리도 안주를 만드느라 분주했고, 울다 눈이 퉁퉁 부은 멜리나는 야안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는 듯 그의 왼팔에 두 팔을 감은 채 바싹 붙어 있었다.
예전 같으면 여자가 부끄러운 것을 모른다며 질타했을 한스였지만 이번 일로 야안이 크게 마음에 들어 그 같은 소리는 하지 않은 채 보기 좋다고 껄껄대며 크게 웃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