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39화
나중에 마을 사람들도 그 소식을 듣게 되어 모습을 보였고, 덕분에 전쟁의 여파로 크게 상심한 베론 마을은 오랜만에 좋은 소식으로 잔치가 열렸다.
하지만 그 잔치가 그저 흥겹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이는 아버지를, 어떤 이는 아우를, 어떤 이는 아들을 빼앗겼던 터라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위로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마크 벨로치 남작은 어제 군인을 통해 들은 야안의 출사 소식에 호탕하게 웃었다.
“좋고, 좋도다. 어찌 이토록 적절할 때가 다 있던가. 이 마크가가 과거의 영광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개국 당시 마크가는 남작의 직위가 아니었다. 본래는 개국 당시 많은 전공을 인정받아 백작의 직위에 올라선 고위 귀족이었으나, 중앙 정치의 힘겨루기에 밀려 세가 축소되기 시작하더니 다시 밀리고 밀려, 지금은 이런 작은 변방의 영지만을 맡고 있었다.
무엇하나 변변치 않은 시골 영지이기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으나 야망이 큰 마크 벨로치는 어려운 영지 살림을 알고 있음에도 아버지께 부탁하여 왕성 수도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그곳에서 문화, 정치, 전쟁을 공부했지만 검술은 배우지 않았다. 본래 태어나기를 키가 작고 여린 체형이라 스스로 무재가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에 그는 차선책으로 전략과 전술을 공부했다. 지휘관이 꼭 무위가 강해야 하는 것이 아님을 젊은 시절 한 권의 책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뛰어난 무위는 일을 조금 편하게 만드는 것이 전부이다. 무위가 뛰어나지 않아도 위대한 지휘관은 될 수 있다.”
그것은 500년 전 지금은 사라진 왕국에서 한 귀족의 영애가 앞장서 외친 말이었다.
그녀는 나라가 큰 위기에 빠지자 드레스 대신 갑옷을 입었고, 부채 대신 검을 들었다. 힘이 없고 약하다고 남들이 깔보아도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으며, 수하들을 이끌고 무너지는 전장의 전선을 막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다, 위대한 승리의 막이 오르게 된 것은.
적에게 악마라 불리고, 아군에게 검은 장미라 불리며 위대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한 그녀는 결국 적국을 물러서게 했으나, 왕성에 남아 있는 모리배들의 모함에 부딪혀 마녀라 불리며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산 채로 불에 타 죽고 말았다.
후에 그녀가 사라진 것을 안 적국은 다시 그 왕국을 침공했고, 구심점이 없어진 왕국은 놀라운 속도로 빠르게 멸망하고 말았다.
한때 그녀와 치열한 머리싸움을 했던 적국의 왕은 그녀가 타 죽은 자리에 묘비를 세우며 그녀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 후대에 전했다.
<아리우네 린.>
지금도 병법을 공부하는 자라면 한 번쯤 읽어보는 그녀의 서사시가 적힌 책이었다.
마크 벨로치의 인생은 그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으나, 전술을 배우던 중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받고 유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영지에 돌아온 그는 잔병들을 끌어모아 힘껏 자작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고, 전술에 특히 자신이 있던 그는 은밀히 치고 빠지는 유격대 방식으로 조금씩 전장의 흐름을 돌려놓았다.
결국 버티고 버티는 식으로 진을 빼놓았던 그는 길어지는 전쟁에 지친 그들에게서 평화협정서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후 영지를 부강하게 하려 여러 방법을 써보았지만, 아쉽게도 그는 전술 쪽에만 재능이 있을 뿐 행정에는 영 재주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을 하는 게 효율적이라 생각하고 군사 외에는 모두 아버지 때부터 자신을 위해 힘써주는 매틀 요한에게 권한을 넘겨주었다.
매틀 요한은 선대 마크 영주의 지원 아래 시험에 합격한 자로, 보기 드물게 신의가 있고 정치적 견해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선대 영주와 겨우 몇 살 차이 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그를 오래전 자신을 키우다 돌아가신 삼촌처럼 여기며 따랐기에, 그가 죽을 때 그 누구보다도 슬퍼하기도 했다.
그런 사정을 잘 알기에 마크 벨로치는 물론이고 그 밑의 가신들도 그에게 많은 권한을 주는 것에 대해 크게 우려하는 자는 없었다.
하지만 지난 전쟁에서 상당 부분이 파괴된 영지는 아무리 행정에 힘을 써도 적자에 적자만을 볼 뿐이었다.
결국 남작가의 보물을 팔아 그 적자를 메꾸었고,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는 본래의 영지 경제 규모로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자 매틀 요한은 여윳돈으로 안으로는 제자를 키우고 밖으로는 어린 농노들을 늘려 이들로 노동력을 대신하여 다시 발전해 나갔다.
하지만 쉬지 않고 무리하게 일을 했던 탓일까?
그는 1년 전부터 병에 걸려 제대로 행정을 살필 수 없었다. 그의 제자들이 있지만 사실 시간이 없어 많이 가르치지 못해 겨우 간단한 하급 행정의 일을 감당할 뿐이었다.
그의 하나뿐인 아들은 매틀 요한만큼이나 머리가 좋았지만, 아쉽게도 일찍이 남작의 눈에 띄어 전술을 공부하고 있었다.
결국 앞서 말했듯이 마크 가신들이 그 일을 나누어 맡게 되었다. 하나 그렇게 일을 나누었음에도 겨우 한 사람이 했던 일을 감당하지 못해 좋은 성과를 기대하기 힘든 실정이다.
마크 벨로치는 그제야 그가 얼마나 충성스럽게 일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정말 미련하게도 일했구려. 미안하오.’
언젠가 병문안을 간 그가 매틀 요한에게 한 말이었다. 그에 매틀 요한은 그저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기에.
하여튼 이제 군사 조련이 끝이 나면 자신은 이들을 이끌고 전쟁에 나가야 할 터인데 그때에는 겨우겨우 이어가고 있는 영지에 손쓸 방법이 없었다.
최악의 경우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위해 수도에 유학을 보낸 아들을 데려와야 할지도 몰라 고민하는데, 야안이라는 이 생각지도 못한 인재가 출사를 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니 그가 그만큼 기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곧 야안이 남작의 가신들을 만나 그들에게 선물을 건네주며 호의를 보였는데, 그때 야안은 그동안 숙달하여 실패할 확률이 낮아진 이미지 마법을 그들에게 걸었다.
이미지 마법이라고는 하지만 하위 수준이라 그저 첫인상이 좋은 것 정도밖에 안 되지만, 선물과 같이 펼치니 그들의 눈에는 야안이 경우를 잘 아는 착실한 인재로 보였다.
그들의 호의 섞인 안내를 받으며 회의장에 함께 들어선 야안은 그 옛날 농노 시절 시찰 중이던 영주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의 모습은 여전했다. 당시에 인상 깊었던 볼록한 배는 많이 들어가 있었지만 작은 키에 왜소한 체격에서 뿜어 나오는 기백은 나이가 들었음에도 여전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올해로 마흔여섯인 그였지만 아직 마흔도 안 되어 보였다.
그는 군의 규율에 길들어 다소 딱딱한 기질이 있는 가신들이 야안에게 호의를 보이는 모습을 흥미 있게 보다,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인상이 좋다는 생각이 들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
야안은 다행히도 마크 남작에게도 이미지 마법이 성공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그가 가장 핵심이니.’
남작에게도 과하지도 그렇다고 실례가 되지도 않는 수준의 예물을 바친 야안이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
“베론 가한의 아들 베론 야안이 마크 벨로치 남작님께 출사합니다. 부디 저의 출사를 받아 주십시오.”
정중하게 말하자, 마크 남작은 크게 반기며 예의를 갖추느라 바닥에 무릎이 닿은 그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주었다.
“물론이네. 나 마크 벨로치는 베론 야안의 출사를 받겠네.”
마크 남작은 그렇게 말하며 야안과 가신들이 인사를 나눌 자리를 만들었다. 다들 식사를 한 뒤라 소화에 도움을 주는 도수가 낮은 술과 음식들을 내놓았는데, 야안과 남작의 사이를 가까이해 대화 소통이 쉽게 만들었다.
이 자리는 사실 마크 남작이 물어 야안의 견해를 재보는 자리로, 가신들은 야안의 생각을 들은 뒤 야안에게 어떤 자리를 줄 것인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야안 또한 그것을 눈치채어 술과 음식에는 입도 대지 않았다.
마크 남작이 물었다.
“내 묻겠네. 지금 우리 영지는 변방 쪽이라 물류 유통이 어렵고, 주위를 둘러싼 산지의 몬스터 때문에 보통 영지 규모보다 반 정도밖에 되지 않네. 다행히 몬스터들이 산지에만 있을 뿐 우리 영역을 건드리지 않으니 그 점은 다행일 수 있지.
하지만 반대로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오면 맹렬히 공격하는지라 몬스터 부산물을 얻기도 어렵네. 윗대의 조상께서는 많은 산지를 보고 광물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조사를 해보았지만 그 또한 실패로 끝이 났지. 그 때문에 지금 영지는 밀과, 매틀 요한이 개발하고 이제 어느 정도 자리 잡은 포도밭에 의지하고 있네. 이런 실정에서 자네가 영주라면 이 영지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그 말에 야안은 잠시 고민하다 이내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고는 낭랑한 목소리로 답했다.
“변방이란 말은 왕국의 외곽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를 바꿔 말하자면 다른 나라와 가장 가까이 있다는 것이니 외국과의 물류 교류에서 큰 이득을 취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마크 영지와 멀지 않은 곳에 세 개의 나라가 가까이 있습니다.
분명 이들 나라에도 우리와 같은 처지의 영지가 있을 것이고,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 그들의 특산물을 구입하도록 합니다. 이후 믿을 만한 이에게 상단을 꾸려 맡긴 뒤 그 특산물을 시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팔며 소문을 흘립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이곳 변방까지 상인들이 모여들 것이고, 그들을 모아 시장을 형성케 한 뒤 조금씩 거래하는 영지의 수를 늘립니다.”
가신들은 곰곰이 생각하며 야안의 말을 경청했다.
“여기까지 무사히 일이 성사되면 이와 같은 상행이 이득이 있음을 거래하는 영지의 영주도 깨달아 상단을 꾸리려 할 것이고, 그들은 그 꾸민 상단으로 자연히 가깝고 큰 이득이 날 수밖에 없는 우리가 형성한 시장으로 오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더 좋아지는데 초기에 물류 운행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비용과 시장에서 얻어지는 자금으로 시설을 개간하는 대규모의 공사를 하고 세금을 낮추는 등의 복지 정책을 펼칠 것입니다. 그리되면 일자리가 많고 복지가 좋은 우리 영지로 영지민이 몰려들 것이니 저는 그중 신체 건강한 이를 직업군인으로 뽑아 훈련시켜 상인을 보호할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일이 진행되면 이미 능히 영지의 군사만으로도 주위의 몬스터들을 굴복시킬 수 있게 되고, 천천히 몬스터 토벌의 영역을 넓혀 주위의 산지를 손에 다 넣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영지의 본래 크기보다 최소 다섯 배는 넓힐 수 있을 것입니다.”
야안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이제 땅이 넓어졌으니 다시 관개수로를 정비하고 성벽을 새로 짓는 등 일자리를 더 만드시면 그만큼의 영지민들이 몰려들 것입니다. 이때부터 우리 영지는 하나의 명분이 생기는데, 바로 야로스 산맥의 인근에 있다는 점입니다.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 거리가 열흘 거리라 왕국을 수호한다는 분이 있으니 우리는 이때부터 중앙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군사를 모을 수 있습니다.
그때쯤이면 뒤늦게 이 변방의 영지에 권력자들이 손을 뻗으려 해도 이미 손댈 수가 없는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이니 우리는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대영지로 발전시키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말을 마친 야안은 자신이 실수한 것이 없는가를 하나하나 따지며 생각에 빠지다 이내 주위의 시선이 이상하자 조심스레 살폈다.
남작과 그의 가신들은 보잘것없는 야안의 외모와 달리 이상적이면서도 또한 실현 가능성이 높은 이 놀라운 정책을 숨 한 번 거르지 않고 토해 내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남작은 처음 이 어린 사내가 장원으로 시험을 통과했다는 말에 대단하다 생각하면서도, 막상 만나보자 그의 흙냄새 나는 외모나 어린 나이 때문에 조금은 깔보았다.
그 인상이나 그에게서 느껴진 특유의 분위기에 호감이 가지만 관료로서의 능력을 의심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단 한 번의 그의 식견으로 그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토록 놀라운 식견이라니. 자신의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동요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꺼내는 그의 이야기는 신천지와 같았다.
생각의 발상이 뛰어났다. 상식적으로 변방 외지에 있는 영주라면 중앙으로 진출하는 길을 열거나, 아니면 뛰어난 세력 아래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다.
한데 그는 아니었다. 오히려 단점을 장점으로 만들면서 시작된 그의 이야기는 비록 세세한 것을 듣지 못했음에도 꼭 그렇게 될 것 같은 확고한 큰 물줄기를 보여주었다.
‘고대 탈란의 이야기 하나가 생각나는군.’
탈란은 신자는 아니나 신학을 연구하고, 현자가 아니나 세상을 밝히는 지혜로운 자들을 말한다.
지금도 발견되는 탈란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데 그중에서 지금과 비견되는 이야기가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