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안-43화 (43/385)

야안 43화

13. 총관

마크 남작에게 출사한 야안은 이틀이 지난 뒤에야 전령을 받았다.

급히 온 듯 크게 투레질을 하는 말에서 내려선 전령은 마크 남작 가문의 직인이 찍힌 서신을 야안에게 바쳤다.

이후 전령은 무언가를 들었는지 바짝 긴장한 얼굴로 야안에게 경례를 올리고는 물러났다.

전령이 물러나 집 밖에서 대기하고 있자, 잠시 그를 보던 야안은 이내 서신을 뜯어 펼쳤다. 글을 읽어가던 그의 안색은 점차 굳어져 갔는데 그 서신에는 놀라운 내용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기다리게 한 것에 사과하오.

이는 그대의 능력이 범상치 않아 그런 것이니 이해를 해주었으면 좋겠소. 가신들과 의견 끝에 그대의 직책을 정했소.

바로 총관직이 그것이오.

아니, 정확히는 예비 총관이라는 것이 맞을 듯하오. 지금의 총관은 그대도 알다시피 매틀 요한이니 말이오. 하지만 지금 병세가 깊어 사실 그는 한 달의 시간도 장담하지 못하는 실정이오. 그러니 부디 그 시간 동안 매틀 요한에게 이 자리를 이양받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오.

이는 다른 곳의 총관직과 우리 영지의 총관직의 권한이 다르기 때문이오. 나의 능력이 변변찮아 전술 외에는 쓸모가 없기에 영지 행정의 권한 대부분이 총관에게 있소. 이 때문에 이 자리를 이양받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 보오.

전령을 보내니 이 전령이 매틀 요한의 집으로 안내할 것이오. 부디 내가 총애하던 매틀 요한과 좋은 관계를 맺었으면 바랄 것이 없겠소.]

“하! 총관직이라니.”

이 서신에도 쓰여 있다시피 이곳 영지의 총관직은 행정에 한해서는 최고 권위자라 해도 다름이 아니다.

더구나 이번 마크 남작이 출정한 뒤라면 그야말로 영주와 다름없는 권력을 가지게 된다. 그야말로 대리 영주가 되는 것이다.

‘과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것인가?’

아무리 변방이라 인재가 없다 해도 그렇지 이제 막 출사를 한 자에게 총관직이라니 유례없는 일이다. 도대체 무엇을 믿고 자신에게 이러는 것인가? 겨우 17세의, 이제 막 성인이 된 사내의 무엇을 보고 이렇게 신뢰하는가?

‘이걸 그릇이 크다고 해야 할지.’

야안은 곰곰이 생각에 잠기다, 영주 성에서 전령이 왔다는 소리에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에게 서신을 보여 드렸다.

베론 가한은 야안이 심상치 않은 기색이라 혹시 일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어 서둘러 서신을 펼쳐 읽으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흠, 이건 과하구나. 비록 지금 영지가 돌아가는 상황이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너에게 이런 자리를 맡기시다니. 너의 마음을 알겠다.”

베론 가한은 담배 파이프를 꺼내 담배를 피우며 생각에 잠기다 신색이 어두운 아들에게 말했다.

“이 서신에는 분명 예비 총관이라 했다. 또한, 매틀 요한 님께 직접 일을 이양받으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이는 사실 결정된 것 같지만, 그 속뜻은 다르다. 매틀 요한 님께 최종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아마 매틀 요한 님께서 너의 그릇을 잴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너는 지금 이 모든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것은 없으니 말이다.”

야안은 아버지의 말에 과연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이런 인간관계에서는 역시 아버지가 자신보다 나았다. 자신이 비록 책에서 많은 것을 보고 공부했다지만, 그것은 결국 자기 것으로 만들기 전에는 죽은 지식이다.

아버지의 말을 들으니 불편한 마음이 사그라졌고, 그는 어머니의 도움으로 행색을 바로 한 뒤 전령을 따라 매틀 요한을 만나러 갔다.

벽난로가 타오르는 옆에 담요를 덮은 노인은 예전 자신의 제자들을 가르쳐주기 위해 만든 자료는 물론 그간 그가 작성했던 문서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 이제 마흔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아들과 아직 열둘밖에 안 된 손자 또한 그의 지시에 따라 정리하고 있었는데, 그 양이 상당했다.

전쟁 이후 총관직을 맡고 16년의 역사가 흐른 만큼 그의 손을 거쳐 간 문서는 거실의 한 벽을 채울 만큼의 양이었다.

책으로 만든다면 300권은 넘을 것이다.

그는 먼저 연도별로 나눈 다음 다시 실패한 정책과 성공한 정책으로 나누었고, 거기서 다시 왜 실패를 하고 성공을 한 것인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담긴 간단한 문서들을 차례대로 모아놓았다.

이후 매틀 요한은 분류하면서 지금 자신이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담긴 책을 쓰고 있었다. 또한, 가끔 적어놓은 일기들도 연도별로 정리했다.

눈이 침침해져 글을 적기 어려워지자, 그는 아들을 불러 대신 적게 했다. 효성스러운 그의 아들은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아버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다 말없이 지시를 따랐다.

매틀 요한은 자신이 생각한 것을 다 쏟아낸 뒤 침침한 눈을 감으며 아들에게 자신이 불러준 것을 읽어주기를 원했다.

아들이 다시 불러주기 시작하자, 중간 중간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의 내용을 고치기 시작했고, 한참의 시간 뒤에 끝이 나자 그제야 그는 만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침침한 눈을 끔뻑거리며 아들에게 물었다.

“방은 준비해 두었느냐?”

아버지의 말에 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미 방은 물론, 그의 편의를 도와줄 하녀도 구해 놓았습니다. 부인과 아들은 한동안 성에서 지내기로 했으니 걱정하실 필요가 없으실 것입니다.”

“그래, 그래. 네가 알아서 잘했겠지.”

아버지의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그에게 기대를 거는 모습이 답답하여 아들은 한마디 하고 말았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인재라 하지만.”

아들의 말에 매틀 요한은 이해한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만약 나에게 3년이라는 시간이 더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래, 베론 야안, 이 어린 인재에게 이 같은 무거운 짐을 갑자기 줄 필요도 없겠지. 차근차근 밑에서 모든 행정 일들을 경험케 하여 그의 눈을 뜨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바라나 이루어질 수 없는 일. 나의 수명은 잘해야 마크 남작님의 출정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때까지 나는 이 어린 인재에게 최대한 많은 것을 주고 가야 해. 적어도 스스로 눈을 뜰 수 있을 만큼은 주고 가야 하겠지.”

매틀 요한은 그렇게 말하더니 무리를 한 탓에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그에 놀란 아들은 아버지를 부축해 침대에 데려가 눕혔다.

서둘러 침대 옆에 자리한 작은 난로에 불을 더 지피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매틀 요한은 힘들게 말을 열었다.

“너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그저 미안하구나. 마지막까지 너에게 신세를 지니.”

그 말에 아들 매틀 카이는 그렇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신세라니요. 아들로서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아들의 말에서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모습을 발견해 그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너는 나의 아들이지. 너는 정말이지 좋은 아들이었다.”

매틀 요한은 그렇게 조용히 읊조리다 잠이 들었다. 조심스럽게 불을 지피는 아들을 옆에 두고서.

다음 날 이른 시간부터 마지막으로 어제 하루 종일 준비한 것을 확인하던 매틀 요한은 환자 옷을 벗고 격식에 맞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오늘이 베론 야안과의 첫 대면이기 때문이다.

해가 정오를 벗어나려 할 때쯤에야 전령을 뒤따라온 야안과 대면할 수 있었다.

야안은 하녀의 안내를 따라 자신을 기다리고 계시는 병색이 짙은 백발의 노인을 볼 수 있었고, 그가 바로 매틀 요한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예를 보이며 말했다.

“베론 야안이 총관님을 뵙습니다.”

“그래, 자네가 베론 야안이었군. 음, 과연.”

매틀 요한은 베론 야안의 눈을 보고 절로 감탄을 흘렸다. 저런 눈은 그의 일생에서도 단 한 번 보았을 뿐이다.

예전 마크 남작을 대신하여 간 백작의 연회장에서 본 현자의 눈이 바로 저랬다. 그 현자가 중급에 들어선 이였으니, 베론 야안이 제 생각보다 더 뛰어난 인물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는 미리 준비해 둔 곳으로 그를 데려와 질 좋은 탁자에 그를 앉혔다. 곧 하녀가 몸에 좋은 허브차를 준비해 왔고, 그는 야안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많이 놀랐으리라 생각하네. 사실 자네에게 차기 총관직을 맡기자 한 것은 나일세. 지금 영지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

야안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어 그렇다고 대답했다. 매틀 요한은 야안에게 예전 제자들에게 가르치던 내용을 축약하여 만들어둔 책을 건넸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쉽겠군. 사실 나의 명은 얼마 남지 않았네. 운이 좋으면 남작님의 출정식까지 살 것이고, 아니면 오늘 당장 숨이 멎을 수도 있겠지. 나는 나의 마지막 시간을 그대에게 투자하기로 했네. 이것은 영지 일의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네. 한 번 읽어보게나.”

그렇게 말하며 기침을 하던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야안에게 손을 저으며 어서 읽어보라 권유했다. 야안은 잠시 그의 모습을 보다 마케를 연달아 그의 몸에 펼쳤다. 과연 야안의 마법이 도움이 되었는지 일시적이나 그의 호흡이 안정되어 가는 모습을 보였다.

사락, 사락.

매틀 요한이 주었던 책은 본래의 책 두어 권을 합친 두께의 책이었다. 일반적이라면 이 한 권을 다 읽어보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지만, 야안은 마치 훑어보는 듯 종이를 넘겼다. 마지막 종이까지 그렇게 살펴보던 야안은 노한 표정인 매틀 요한에게 말했다.

“다 읽었습니다. 글이 잘 분류되어 축약했음에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야안의 그 말에 매틀 요한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놀리는 것인가! 훑어보라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내용을 숙지하라는 뜻이었네.”

그 말에 오해가 생겼음을 안 야안은 매틀 요한에게 말했다.

“오해하신 모양이군요. 저는 총관님이 주신 책의 내용을 미약하나마 숙지했습니다.”

“…….”

한 치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하는 야안에 매틀 요한은 말문을 잃었다. 겨우 20분도 채 되지 않아 저 한 권의 책에 달하는 자료를 숙지했단 말인가?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눈앞의 사내가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니 농은 아닐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저렇게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거짓을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전문적으로 사기를 치는 자들이 아니라면.

믿기 힘든 일이라 그는 고심하다 그 자료의 내용에 대해 묻기 시작했고, 야안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잠시 놀라던 그는 사소한 것이라 지나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묻기 시작했는데, 야안은 그것에 대답하면서 이렇게 하면 일이 더 수월하지 않을까 하며 자신의 의견도 섞어 대답했다.

30분가량을 묻고 답하던 그들은 하녀가 차를 새롭게 내오면서 잠시 대화가 멈추었다. 매틀 요한은 새로 나온 허브차로 입을 축이며 놀란 마음을 다스렸다.

‘믿기지 않는군. 그저 식견이 매우 뛰어난 자라 생각했는데. 그뿐이 아니군. 이건 나의 예상을 넘어도 한참 넘어선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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