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44화
천재였다.
겨우 관리직 수석 따위에 만족하는 자가 아니라 진리의 길을 볼 수 있는 천재에 달하는 자였다. 그가 보인 모습만으로도 지금도 현자의 길을 갈 능력이 있었다.
‘본래는 농노 출신이라 했지. 그러다 베론 가한이 양아들로 들였다고.’
그는 그 사실을 상기하자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이 만분의 일이라는 존재가 농노로 떠돌다 세상에서 묻힐 뻔했다. 이 같은 천재들은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잘 해야 한다.
육체를 단련하지 않으면 퇴화하는 것처럼 머리도 쓰지 않으면 퇴화해 버린다. 그것은 그 수많은 농노 중에서 특출한 천재가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오직 먹고, 자고, 일하기만 하는 마치 쳇바퀴 도는 것처럼 단순한 세상에 살아가는데 아무리 타고난 머리가 똑똑해도 무용지물인지라 결국 세월이 지나면 퇴화해 버리고 만다.
이 때문에 신분 사회가 그토록 오랜 세월을 유지하는 것이다. 가지고 있는 자일수록 더욱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을 할 수 있으니 평범한 지능을 타고난 자도 커갈수록 뛰어난 견해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실제로 귀족들은 자식들을 교육할 때 많은 연회에 참석하게 하여 사람들과 교류를 나누게 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친분을 쌓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견문을 넓히고 사람을 보는 안목을 익히는 것이다.
이는 굳이 귀족만이 아니어도 돈이 많은 상인들이 후계자를 키울 때도 이와 같은 방법을 따르고 있다.
반대로 앞의 농노의 이야기처럼 가진 게 없을수록 퇴화의 과정만을 계속 밟게 되니 피지배층의 사람들은 그곳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런고로 야안은 운이 좋다고 매틀 요한은 생각했다.
베론 가한의 조상이 예전 남작성의 집사를 지냈던 만큼 베론 가한은 야안에게 어린 시절부터 많은 지식을 전수했을 것이다.
아마 그것을 바탕으로 삼아 그의 집에 있는 책들과 베론 가한이 어렵게 구해놓은 책들을 공부하여 관료직 시험에 합격한 것이 틀림없다.
만분의 일이라고 불리는 비상한 머리를 지닌 천재라면 최연소 수석 합격자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보면 이 총관직도 원래 그에게는 모자라는 자리였군.’
현자가 되면 그 순간부터 준남작의 직위에 봉한다. 검사가 익스퍽트의 경지에 올라서면 기사의 작위를 주어 준남작에 준하는 것과 같은 것인데, 현자는 여러 조건이 부가되어야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 희귀성은 더해 같은 직급이라면 현자를 더 귀히 여긴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고 그 경지에 따라 변화가 있겠지만, 무력만을 놓고 따졌을 때, 기사가 현자보다 더 뛰어나다. 변변찮은 마법으로는 단숨에 다가와 목을 치는 기사의 검을 당해낼 수 없었다.
하지만 일대일이 아닌 다수의 전투에서 현자가 뒤를 보조하는 입장에서는 그 이야기가 달라진다. 가벼운 마법으로 갑자기 시선을 뺏거나 힐링으로 부상을 회복시키는 현자가 있는 군대의 사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강력해진다.
더구나 현자의 지혜로운 안목으로 뛰어난 군사로서의 조언을 들을 수도 있으니 전쟁에서 현자의 비중은 대단히 컸다.
이뿐만 아니라 초급 현자 마스터의 경지에 들어서기만 한다면 다수를 공격할 수 있는 범위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고, 또한 시간만 끌어준다면 한 단계 이상의 마법을 펼쳐 전장의 흐름을 바꾸어놓을 수 있다.
그러니 현자는 나라의 입장에서도 큰 재산이었고, 그 숫자를 지키기 위해 여러 가지 보호법이나 지원 제도를 만들어 놓았다. 특히 마일드 왕국에서는 이런 혜택이 뛰어났지만 그럼에도 이 현자의 수는 고작 오십여 명에 불과했다.
여하튼 기사와 같이 실력을 쌓아 그 능력이 초급 현자 마스터에 달하면 남작의 직위를 주고 중급 현자에 달하면 자작의 직위를 준다. 중급 현자 마스터에 들어서면 백작 직위를 주며 고위 현자에 들어서면 후작의 직위를 제공하게 된다.
또는 백작위 대신 자작의 위치에서 영지를 주기도 하는데, 현자의 입장에서는 뒤의 입장이 더 매력적인 일이다.
이는 마법이 고차원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큰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현자들의 흐름이 중급 현자 익스퍼트까지 간다 생각할 때 현자라면 결국에는 영지는 고사하고 자작의 직위까지만 올라갈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일반인들에게는 물론 귀족의 입장에서도 대단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 실정에 많은 권한이 있다 해도 결국 준남작의 직위인 총관직이니 길게 생각하면 야안에게 모자란 자리였다.
매틀 요한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왜인지 모르지만, 몸도 가벼워져 자신의 사후를 걱정하던 마음은 빠른 속도로 사그라졌다.
‘이런 재능을 지닌 이라면 내가 죽기 전에 정치를 보는 눈을 뜨게 할 수 있으리라.’
그는 그렇게 생각이 들자 자리에서 일어나 야안에게 준비된 그의 방과 그리고 어제 정리를 끝낸 자료들을 보여주며 미소를 지었다.
“기쁘네, 나는. 자네가 그 정도의 역량을 가진 자일 줄 몰랐네. 덕분에 확신할 수 있었네. 자네에게 눈을 줄 수 있음을 말일세.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고작 이 남작의 영지를 다스리는 정도이지만, 자네는 나라 안의 이해타산을 좇아 움직이는 흐름을 볼 수 있는 정치의 눈을 가질 수 있을 것일세. 아마 그 정도까지 가려면 나의 사후에도 그대는 부지런히 나라 안팎을 살펴야 하겠지만 거기까지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군.”
그러며 야안에게 자신의 집에서 지내며 공부하기를 권했고, 야안은 고민하다 이내 수락했다.
아무래도 이분이 자신을 크게 마음에 들어 하시니 총관 일을 해야 한다면 그에게 최대한 많은 것을 배워두는 것이 좋을 듯했다. 단순히 책과 지난 자료만 보는 것과, 실제 그 일을 진행하며 겪은 이의 견해를 듣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아무래도 책이나 자료만 보아서는 자신의 주관이 들어가게 되어 당시의 상황을 왜곡할 수 있다. 그리되면 후에 자신이 그 정책을 밀고 나갈 때 왜곡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실패할 수 있기에, 이런 금과 같은 귀한 견해는 많이 들을수록 좋았다.
그날 야안은 저녁 늦게까지 책을 보고 자료를 살피며, 그에게 궁금한 점을 물어보다 날이 늦어지자 집으로 돌아가 한동안 총관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고 말을 꺼냈다.
본래 시골 영지의 특성상 큰 격식 없이 혼인을 신고하기에 멜리나와 야안 또한 이를 따르려 했는데 사정이 이렇게 되자 한스네에 양해를 구해 혼인을 뒤로 미뤘다.
나쁜 일 때문도 아니고, 좋은 일 때문에 그런 것이라 한스는 오히려 야안을 위로했다.
“고생이 많네. 그래, 오히려 잘되었다고 할 수 있어. 전쟁이 나 징집을 당한 이 시기에 사실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이도 별로 없을 것이야. 자네도 일을 시작하면 처음 한동안 바쁠 터이니 이후 따뜻한 봄이 되어 혼인을 하는 것도 좋은 일이라 생각하네.”
한스는 그렇게 말하며, 오늘 낮에 베론 가한과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낮에 촌장님과 함께 자네와 멜리나가 살 곳을 만들기로 했네. 집을 새로 짓는 것은 아니고 듣기로 자네가 벌어 온 돈이 상당한지라, 집을 크게 증축하기로 했네. 겨우내 일이 없는 마을 사람들에게 일자리도 만들 겸 일을 시작한 것이지.
당장 큰 일손이 없어졌으니, 이 같은 일자리는 그들에게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야. 또한, 이제 영주의 총관직에 오를 것이니 영지인이 너무 멀게 느껴져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가깝게 느껴져서도 안 되니 이 정도의 위세는 있어야 할 것이야.”
야안은 낮에 아버지가 한스를 만나러 간 것이 이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그 마음 씀씀이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언제나 자신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을 살피는 아버지에 절로 가슴이 먹먹했다.
집에 돌아온 야안은 아버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올리고, 다시 60골드를 꺼내놓으며 기왕이면 마을 저장고를 다시 지어 일자리를 더 늘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을 창고의 가치를 아는 야안으로서는 그 귀한 재료를 자신이 가져 좋고, 마을 사람들 또한 돈을 벌 수 있어 좋으니 하는 말이었는데, 곰곰이 생각에 빠지던 베론 가한은 좋은 의견이라며 승낙했다.
아무래도 나이가 어린 아들이 총관의 자리를 잘 다지려면 평이 좋아야 할 터이니 이 같은 일로 평을 다지는 게 여러모로 좋다 생각했다.
야안은 마을 저장고에 있던 목재는 자신이 따로 쓸데가 있으니 잘 보관해 달라 부탁하고, 잠시 아버지와 술을 한잔하며 이야기를 나누다 다음 날 어머니가 꾸려준 짐을 들고 집을 나섰다.
* * *
그로부터 17일이 지났다.
이날의 하늘은 유난히 맑고 높았으며, 중천에 뜬 태양은 더없이 눈 부셨다. 추위는 여전했으나 바람 한 점 없어 외투로 온몸을 꽁꽁 두르는 이는 없었다.
내일 전쟁터로 떠나는 마크 벨로치 남작과 가신들, 그리고 수많은 이들은 그날 하루만큼은 바쁜 손을 멈추었다.
이는 지난 오랜 세월을 마크가와 함께한 전 총관인 매틀 요한의 죽음에 조의를 표하기 위해서이다.
전날 마크가의 총관직에 오른 베론 야안은 매틀 요한의 아들인 매틀 카이를 도와 그를 화장한 뒤 남은 유골을 자기에 담았다. 이후 짧지만 그의 제자로서 있었던 날들을 그와 공유하며 위로하고는 말없이 침묵하는 그를 두고 성으로 돌아왔다.
짧은 시간이지만 정치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준 매틀 요한의 죽음은 그에게도 크게 슬픈 일이긴 하나, 그런 감상에 빠질 여유는 야안에게 없었다.
내일 당장 전쟁터를 떠나는 이들의 출정식 준비와, 물류가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확보되었는지, 무구의 상태는 어떠한지, 병사 중 심한 병에 걸려 전염의 위험이 있는 자가 있는지 등 여러 가지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마크 남작의 가신들이 신경을 쓴다고 했지만, 역시나 익숙하지 않은 일을 했던 만큼 행정의 여러 업무가 많이 밀려 있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밑에 유능한 인재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야안은 전쟁 외에도 해야 할 일이 차고 넘쳤다.
그래도 수많은 계산식을 한순간에 끝내고 빠른 속독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지닌 야안이었기에, 야안은 잠시도 쉬지 않고 서류 작성에 몰두해 그날 자정이 넘어서야 밀린 업무의 반 정도를 끝낼 수 있었다.
야안 때문에 잡혀 있었던, 전 총관의 열일곱 명의 제자들은 야안의 일 처리 속도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혼자 예전 전 총관 같은 분이 다섯은 모여 이틀을 해야 할 분량을 하루 만에 끝내어 버렸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
야안은 어느 정도 행정 일을 수습하고 전쟁 물류 관계 업무들을 다시 살펴본 뒤에야 하루를 끝냈다.
이날은 내일 이른 시간에 출정식이 있기에, 집에 들르기보다는 남작이 내준 방에 머물러야 했다.
남작이 야안에게 내준 방은 본래 그의 할아버지가 살아생전 쓰시던 방으로, 오래되긴 했어도 귀족이 묵었던 방이라 고풍스러웠다.
또한, 귀족이 묵었던 방답게 그 크기도 예전 로테리안의 저택에서 머물었던 방보다 배는 컸던지라 지금 확장 공사를 하는 자신의 집보다 더 넓은 구조였다.
물건을 잘 치우면 그곳에서 검을 수련해도 될 정도라, 실제로 처음 야안이 이 방을 배정받았을 때 자신의 걸음으로 거리를 재며 후에 수련장으로 만들어야겠다 생각하기도 했다.
전쟁의 규모가 큰 만큼 얼마의 시일이 걸릴지는 모를 일이니, 어쩌면 오랫동안 이 방과 인연을 맺을지 모른다.
그날 야안은 미처 하지 못한 운기행공을 한 뒤 가볍게 체술로 몸을 풀고는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