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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안-45화 (45/385)

야안 45화

14. 내치

다음 날.

아직 새벽의 기운도 채 오지 않은 이른 시간부터 영주 성은 바빴다. 출정식을 이행하기 위해서였다.

2,000명의 징집병은 자신들이 책임져야 할 물자들을 확인했고, 700명의 정예병은 내일 행군 준비와 자신들의 무구 점검에 빠져 있었다.

어제 늦게 잠이 들었던 터라 두어 시간밖에 눈을 붙이지 못한 야안도 가신들을 도와 군 정비를 끝내도록 유도했는데, 미처 집에 가지 못한 열일곱 명의 하급 행정인도 야안의 지시에 빠르게 움직였다.

야안 덕분에 빠르게 군 정비를 마치고 가신들이 모여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되자 마크 벨로치 남작은 크게 만족하며 치하했다.

“과연, 살아생전 매틀 요한이 감탄을 한 이답소. 확실히 그대라면 마음 놓고 이곳에 대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소.”

“감사합니다. 부디 전쟁터에서 높은 전공을 세워 돌아오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좋군. 좋아. 자, 이것을 받으시오.”

마크 벨로치 남작이 식사 시중을 돕는 하인에게 작은 상자를 건네자, 식탁 끝자락에 있던 야안에게 그것을 넘겨주었다.

상자를 받은 야안은 남작에게 작게 묵례를 하고,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청동 열쇠 하나와 글이 쓰여 있는 쪽지가 들어 있었다.

야안이 다시 묵례를 하고 쪽지를 꺼내어 내용을 살피니, 다름 아닌 마크가가 최후까지 남겨놓은 유물의 목록과 그것이 숨겨진 비밀의 방문이 자리한 위치였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귀족가에서 직계 혈통에게만 알려주는 마지막 보루 같은 것이었는데, 야안은 잠시 왜 이것을 자신에게 주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워 남작을 바라보았다.

“이것을 왜 저에게?”

야안의 말에 마크 벨로치 남작은 평소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과 달리 걱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큰 규모의 전쟁이오. 어쩌면 몇 년의 시간을 잡아먹을 길고 긴 전쟁일지도 모를. 그 긴 전쟁 속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없소. 또한, 전쟁이 길어져 평화조약 기간이 끝이 나면 저 간악한 나프롬 자작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일이오.

지금 영지의 대부분 물품과 자금을 가져가는 것이라 몇 년간 내치에만 힘을 쏟아부어야 할 것이니 아마 그때 가서는 그의 공격을 변변히 막을 자금이 없을 것이 분명하오. 그때 이곳에서 유물을 꺼내어 쓰시오. 그대의 능력이면 적어도 수성은 할 수 있을 것이라 보오.”

야안은 남작의 말에 과연 그렇다 싶어 예를 표하며 상자를 품속에 넣었다.

식사가 끝이 나고 밖을 나와 보니 이제 해가 떠 날이 어느 정도 밝아 있었다. 새벽의 빛이 저 너머로 사라지는 것과 함께 군대 출정식을 거행했다.

이미 영주 성 밖에는 제 아들, 또는 아버지, 동생 등을 기다리는 주민들이 한 번이라도 더 그들을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징집병들은 그동안 혹독한 훈련 끝에 정신 무장을 한 뒤라 눈물을 흘릴지언정 자리를 이탈하려는 이도 그들을 쳐다보는 이도 없었다.

질서 정연하게 발을 구르는 소리 사이로 퍼지는 울음과 통곡의 소리를 뒤로하며 남작가의 군대는 영지 경계를 넘었다.

* * *

남작가의 군대가 떠난 지 그로부터 이틀이 더 지난 뒤에야 밀려 있는 모든 행정 일을 끝낼 수 있었다. 밤잠을 제대로 재우지도 않고 밀어붙이는 야안에 나이가 어리다고 만만하게 보던 성내의 관료들은 바짝 긴장해야 했다.

현재 야안의 권한은 그야말로 영주의 권한과 동일한지라 그에게 잘못 보이면 앞으로의 생활이 곤란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런 그들의 생각처럼 그 이후의 행보도 매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린 나이와 달리, 하는 말이나 행동이 칼 같았는데, 이는 야안이 일부러 유도한 것이었다.

남작이 사라진 뒤 모든 권한이 자신에게 임시로 오게 되어 그의 권한은 커졌지만, 달리 말하면 그 카리스마적인 분위기로 성을 휘어잡던 남작이라는 배경이 사라진 것이기도 했기에 틈을 주면 앞으로 영지를 운영하는 데 어려움이 클 것이라 본 것이다.

이런 상황으로 우선 자신의 기반을 확고히 해야 하기에 그는 상당히 냉정한 행보를 걸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야안은 본격적으로 공포 정치를 행하기 시작했다.

공포 정치를 펼치는 데 가장 좋은 것은 다름 아닌 비리 행위자들을 잡아내어 혹독하게 처리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그에게는 전설의 시대에 파생된 마법인 진실의 눈이 있었기에 그는 관료 중 그동안 부정한 자들을 모두 감옥에 처넣었다.

이 관료들은 남작이 나가면서 많은 이들이 빠져나갔지만, 아직 행정 일을 하는 자는 물론, 경비대나 농노 관리원, 포도밭 관리인 등으로 그 수가 육십여 명에 달했다. 하지만 이들 중 부정한 자는 생각보다 많아 3분의 2가 감옥에 갇혀야 했다.

이렇게 많은 비리 행위자가 생긴 이유는 매틀 요한이 나이가 들면서 점차 관리하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때 남작이 다시 행정에 손을 댔다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이미 스스로 행정에는 재능이 없다 생각하여 여전히 그 일을 잡지 않았기에 오만방자한 비리 행위자들이 많아진 것이다.

그렇게 감옥에 갇힌 관료들은 반성의 기미는커녕 그저 감옥에서 코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우리를 감옥에 넣은 뒤에 영주 성이 잘 돌아갈 것 같은가? 어림도 없는 소리지.”

60명에 달하는 관료들이 하루아침에 3분의 1로 줄었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영지의 업무가 삐꺽거릴 것이 분명했다.

결국 며칠 지나지 않아 총관은 적당한 훈계와 함께 자신들을 풀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들은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과 달리 시간이 지나도 야안이 그들을 찾으러 오는 일은 없었다.

야안은 3분의 1밖에 남지 않은 관료들을 모아 진실의 눈으로 적성에 맞게 다시 배치했는데, 행정직에 종사하던 열일곱 명 중 크게 부정을 저지른 여덟 명을 제외하고 남은 아홉 명 중 세 명을 뺀 여섯 명을 경비대로 돌렸다.

하급 행정직이라 해도 일반 주민보다 잘 먹어 비교적 체력이 좋았기에 행한 일이었다.

하루아침에 펜대를 잡던 손으로 검을 잡으며 훈련을 받아야 했지만, 사실 이들도 정도가 약한 것뿐이지 부정을 저지르지 않은 것은 아니었기에 이 일도 감지덕지했다.

이로써 예전보다는 못하지만, 경비대의 인원을 최소한으로 맞춘 야안은 영지 내 미망인들을 모아 팀을 꾸려 농노 관리 일을 대신 하게 했다.

이후 포도밭에 남아 있는 일꾼 중 인망이 좋은 이를 관리인으로 뽑아 그를 대신했는데 지금 감옥에 가 있는 관리인보다 그 일에 대한 관심이나 애정이 높은 자였다.

야안은 그럼에도 부족한 인원은 성내에 성을 관리하는 하인들을 최소로 줄여, 그들로 일을 대신 보게 했다.

행정직에서 상당 부분에 달하는 인력이 손실되었지만, 그 정도의 인력의 차는 야안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자잘한 일들까지는 다 할 수 없는지라 그 일 중 촌장이 감당할 만한 일들은 그들에게 넘기고 그 외에 쓸모없는 과정을 잘라 좀 더 간결하게 짜인 남은 자잘한 행정 일을 세 명에게 넘겼다.

이 세 명의 하급 행정인은 야안이 잘 가르치면 지금보다 몇 배의 일을 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한동안 낮에는 행정 일을 하고 밤에는 야안에게 가르침을 받도록 이야기를 마친 상태였다.

야안이 이 모든 일을 끝내는 데 걸린 시간은 열흘밖에 되지 않았다.

겨우 열흘이라는 시간에 마크 남작의 영지를 휘어잡자 관료들은 물론 소문을 들은 내성의 주민들은 야안의 눈치를 크게 봐야 했다.

어린 나이라고 만만하게 보는 자가 없었다. 오히려 젊은 나이에 이런 공포 정치를 운영하는 야안의 능력을 경외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인원을 줄이고 부정부패를 근절하자 여유 자금이 한 달에 1,500골드가량이 남게 되었다. 그것 말고도 부정부패를 한 이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모은 돈이 17,000골드에 달했다.

보통 군 운영비를 빼고 이 남작 영지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돈이 한 달에 6,000골드에 달한 것을 생각하면 이들은 어마어마한 금액을 빼돌린 것이다.

야안은 자금에 여유가 생기자 그가 예전부터 하고자 했던 정책 중 가장 시급한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이 돈으로 비료를 만들어야겠다.’

비료는 식물의 성장을 도와주는 것으로 지금 농부들이 쓰는 거름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종류이다.

비료와 거름은 식물의 성장을 도와주는 점에서는 같으나 그 과정이 다르다. 비료는 고대어로 그 뜻은 살찌게 하는 재료를 의미한다. 그야말로 소출을 많이 얻게 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반면 거름은 고대어로 땅을 기름지게 하겠다는 뜻이 있다. 땅을 기름지게 하여 식물의 성장을 돕는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거름은 똥과 오줌 따위를 몇 년간 발효를 시켜야 좋은 거름을 얻을 수 있는데, 실상 그렇게 제대로 된 거름을 얻기가 힘들기에 보통 길면 1년 아니면 몇 달간 발효한 것을 쓰기도 한다.

그런 실정이라 사실 소출이 늘어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랬기에 야안은 비료를 개발하는 것이 가장 급하다 생각했다. 지금 이 영지의 수입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밀이었기 때문이다.

야안은 매틀 요한 밑에서 공부하던 당시 마크 영지의 역사를 살피다 초기에 한정된 영지의 밀 생산력을 늘리기 위해 많은 시도를 했다는 기록을 읽었는데, 그중에서 거름에 관한 부분이 많았다.

그들은 오랜 연구 끝에 밀의 생산량을 크게 늘릴 수 있는 거름을 만들 수 있었는데, 골분, 채종 유박, 밀 껍질 등을 썩혀 만드는 방식이었다.

이 거름을 이용해 밀을 수확해 본 결과 그 수확량이 두 배 이상이나 증가했는데 이에 놀란 당시의 남작은 그 거름을 옛 고대어를 따 비료라 명명했다.

하지만 이 같은 뛰어난 생산성을 지닌 비료를 만들었음에도 상용화되지 못한 것은 이것을 대량으로 쓸 수 있게 만들려면, 행정 직종에서 크게 재능이 있는 자 다섯 명이 관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이 복잡했고 그 발효 상태에 따라 비율을 새로 계산을 해야 하는 탓인데, 그런 고급 인력을 거름 따위를 만드는 데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기껏 공부한 그들이 이런 오물 따위를 만지려고도 안 하겠지만, 그 이전에 이 같은 외진 시골 영지에 그 같은 고급 인력이 잘 오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 문제로 이 비료는 오랜 시간 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야안의 능력이라면 그 혼자서도 잠시 시간을 내면 그 정도의 관리는 크게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 세 명의 행정 인력에 간략하게 비료를 만드는 방식을 집중적으로 가르친다면 내년부터는 그들이 대부분을 관리할 능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야안은 남작 내성에 자리한 휴경지에 비료 시설을 짓도록 했다. 그것은 초기 비용만 1만 골드에 달하고, 완성까지 한 달에 1,000골드를 잡아먹는 대규모의 공사였다.

가장이 빠져나가고 영지 내에서 어려움을 호소하던 영지민들은 영주 성에서 그런 큰 공사를 실행하자, 너도나도 뛰어들어 인부의 부족함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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