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46화
야안은 아버지에게 부탁해 각지의 촌장들과 함께 이 공사를 맡아달라고 했는데, 확실히 비록 직책은 촌장이지만 현 영지의 최고 권위자를 아들로 둔 자이기에 촌장들은 물론, 영지 내에서 그의 지시에 반하는 의견을 내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자는 없었다.
급한 불을 어느 정도 끄게 된 야안은 공부하던 당시 다음으로 중요하게 생각한 정책으로 눈을 돌렸다.
“이제 인재를 양성해야…….”
인재. 그것은 마크 남작이 고민했고 매틀 요한을 탄식게 했던, 시골 영지에서 가장 구하기 힘든 자원이었다.
하지만 그들과 야안이 다른 점이 있다면 진실의 눈을 통해 사람의 재능을 가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남작의 영지에서 스스로 잘 모르고 있는 인재들을 끌어모아야 했다.
이곳 마크 영지는 스물일곱 개의 마을과 영지 내성으로 나뉜다. 마을은 100가구로 나뉘어 살고 있고, 영지 내성에는 500가구가 살아가고 있었다.
간단히 계산을 한다면 대략 이곳 남작의 영지에는 16,000명가량의 영지민이 사는 것이다.
그중에서 3,000명에 달하는 이들이 전장에 끌려갔고, 이제 13,000의 영지민이 남았는데 사실 핵심 인력 상당수가 빠져나간 것이라 영지 전력의 반 이상이 떨어져 나갔다 생각해야 한다.
중년층과 노년층, 여인들 외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비율이 아이들인 탓인데 실제로 남은 13,000의 영지민에서 대략 30%가 아이들이었다.
그러니 야안이 처음부터 이같이 독하게 밀고 나가는 것에는 이 같은 이유가 있었다.
야안은 이 아이 중에서 자신이 가르칠 인재를 찾기로 했다. 너무 어린 아이들은 자라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리니 일단 제외를 하고, 열두 살에서 열다섯 살까지의 어느 정도 지능이 자리를 잡은 이들 중에서 고르기로 했다.
그 대상은 단지 영지민만이 아니라 1,200명의 농노도 포함했는데 대부분 어른이 되기도 전에 병들어 죽거나 사고로 죽거나 하여 어린 층들이 대부분이라 오히려 그 대상자가 평민들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해당자를 모두 모아보니 1,000명에 달했다. 그것도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았기에 그 정도가 모인 것이었다.
야안은 그날부터 자신이 벌인 정책과 행정 업무들을 다 끝낸 뒤 저녁에 100명씩 진실의 눈으로 그들의 재능을 나누었다. 운이 좋은 것인지 이들 중 야안이 원하는 재능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하루 종일 움직여야 하는 농노들은 적게 먹음에도 지구력이 뛰어났다. 야안은 그들 중에서 근골이 뛰어나고 충성심이 좋은 쉰 명을 뽑고 평민 중에서도 근골이 좋고 충성심이 뛰어날 기미가 보이는 이들 열 명을 더 뽑아 무인으로 키우기로 했다.
또한 대장간 일에 능력이 보이는 이 아홉 명을 찾아냈고, 목수 일에 재능 있는 이도 스무 명을 찾아냈다. 이들은 영지 내에 있는 대장간과 목재소에 적절히 나누어 배치했다.
처음 대장장이와 목수들은 성내에서 많은 이들을 보내며 가르치라 하자 상당히 불만을 토해 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이런 일에서 자신의 몫을 하게 가르치려면 최소 1년의 시간이 걸리고, 그전에는 자신들의 시간을 잡아먹는 짐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성내에서 그런 그들의 수고를 알아 많은 금화를 풀어 주었지만 크게 내키지 않아 했다.
하나 그런 그들의 생각도 한 달이 지나자 달라졌는데, 이는 새로 받은 아이들이 이 분야에서 매우 뛰어난 재능을 보였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대장장이 일이나 목수 일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지라, 일을 가르치기가 상당히 편했다.
사람이 태어나 즐기는 일 중에는 단순히 술, 여자 같은 것도 있겠지만, 이처럼 영특한 어린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그보다 더 즐거운 일이었다.
이 같은 인재들이 많아지면 대장간이나 목수들의 일터 규모도 커지고 기술 축적도 늘어나 예전 타지에서 보던 물건들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니 우두머리들은 이들을 가르치는 데 전력을 다했다.
인재는 그뿐만 아니라 행정 일에 뛰어난 자들도 찾아낼 수 있었는데, 특히 그들 중 모든 정책이 실패해도 이 한 명을 얻은 것만으로도 이득이라 생각할 정도의 인재가 있었다.
천재라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수재 정도의 머리를 지닌 네 명과 야안이 감탄한 본래 타고나기를 대단한 천재로 태어났으나 이후의 삶이 어려워 이제 퇴화의 시기로 가려는 인재 한 명의 발견은 감탄할 만한 수확이었다.
그가 발견한 천재는 농노였다.
한스라 불리는 이 농노는 올해로 13세인 어린 나이였는데, 눈빛이 매우 맑고 깊었다. 워낙 뛰어난 머리를 타고난 존재였기에 농노와 같은 비정상적인 삶에서도 그 머리는 이제야 퇴화 과정을 밟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야안이 몇 년만 더 늦게 그를 찾았다면, 그도 잘해봐야 뛰어난 수재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상당히 운이 좋았다.’
고작 1,000명도 안 되는 이들 중에서 현자가 될 만한 재능을 지닌 이를 찾았다는 것은 진정 아리스께서 도와주신 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야안은 한스와 이 네 명을 매틀 요한이 한 것처럼 제자로 삼았다. 한스 외 세 명은 남자이고 한 명은 여자였는데, 이 중 티애라는 여자아이는 아버지를 잃고 이번에 막 성인이 된 오빠를 징집당해 외삼촌 댁에서 계속 신세 지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외삼촌의 식구들도 적지 않아 그녀까지 감당하기가 어려웠는데 그런 사정으로 티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가 총관님이 자신을 행정 제자로 삼자 매우 놀라며 기뻐했다.
이제 열네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금 자신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운이 나쁘면, 외삼촌이 돈을 받고 외지의 떠돌이에게 시집을 보낼지 모를 일이었다.
한데, 이제 총관님의 제자가 되어 영지에서의 지원을 받게 되었으니 그녀는 몇 살 차이가 나지 않는 총관님에게 돌아가신 부모님보다 더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품었다.
그 외에 롬, 타일, 코른이라는 이름의 세 사내아이는 모두 15세로 내성이 아니라 각각 다른 마을의 출신이었다. 이 중 타일과 코른은 큰 형과 작은 아버지가 징집되어 나가 집안이 크게 어려워진 상태였다.
자신의 밭이 없어 지주에게 땅을 빌려 대신 농사를 해준 뒤 일당을 받는데 이런 경우가 전형적인 시골 영지의 주민들의 삶이었다.
겨우 15세, 성인이 17세부터이니 아직 2년밖에 남지 않았다지만, 성장기에서 2년의 세월은 아주 크다. 15세는 아직 골격이 완전히 자리 잡은 상태도 아니고, 단순히 힘을 보아도 나이가 많은 이가 더 큰 편이기에 지주들은 아이보다 어른들을 선호했다.
가격이 비슷하다면 일을 잘하는 어른을 선호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랬다. 도회지에서와 달리 이곳에서 일자리를 얻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인 것이다.
영지에서 큰 공사를 하고 있지만, 아직 부주의하고 힘이 없는 아이를 쓰려 하지 않았다.
큰 힘이 필요한 큰 공사에서는 누구 하나 잘못 실수하다가는 여럿 다치거나 죽는 것은 일순간이었고, 나무를 세우는 등의 합이 맞아야 하는 일에도 누구 하나가 자신의 몫을 다하지 못하면 한 번의 힘으로 될 일을 여러 번으로 늘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사 기간이 늘어나는 것이니 관리자의 입장에서는 웬만큼 체격이 좋고 눈치가 빠르지 않은 이상에는 인력난에도 아이들을 쓰는 것을 꺼렸다.
이런 실정이니 아이가 많은 시골에서는 못해도 입 하나가 줄어드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겼는데, 성에서 인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 중 누구도 망설이지 않고 지원했다.
듣기로 이번에 뽑힌 이들은 한 달에 2실버라는 거금이 나온다고 하니, 그것이면 밑의 어린 동생들은 굶주림은 면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 사정이 있는 타일과 코른의 지금 심정은 티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론의 경우는 앞서 두 사람보다 그 사정이 더욱 어려웠었다.
론에게는 이제 여덟 살짜리인 어린 여동생과 자신보다 일곱 살이 많은 형이 하나 있었는데, 그의 형은 영민한 그와 달리 지능이 아주 낮았다.
지능 수준이 다섯 살 정도밖에 되지 않은 바보였으나, 힘이 아주 세고 일을 하는 데 요령을 피우지를 않아 여러 이들이 그를 찾았다.
하지만 일반인이 아니기에, 그 품삯은 아주 적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워낙 동생들을 아끼는 마음에 부지런하게 일을 했던 터라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본래 론의 형은 바보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론보다 영민한 면이 있는 인재였다.
그는 전쟁에서 부친을 잃은 뒤 막내 여동생을 낳고 몸이 약해진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론과 같은 열다섯 살이었다.
그는 겨우 열다섯 살의 나이에 여덟 살짜리 남동생과 갓난아기를 책임져야 했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자신은 이 고난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해야만 했다.
그의 부친은 원래 용병 일을 하던 자로 어머니를 만나 정착한 은퇴 용병이었다. 부친은 사내라면 자신의 사람 정도는 지켜야 한다면 어린 시절부터 그를 수련시켰는데, 그 덕분에 그는 웬만한 어른들보다 체력이나 힘이 뛰어났다.
사실 그것마저 없었다면 어쩌면 그는 이 지독한 삶을 포기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에게 일감을 주고 제대로 품삯을 주는 이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언제나 많은 일을 하면서도 동생들에게 겨우 주린 배를 채우는 정도의 식량만을 가져다줄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어느 겨울, 막 성인이 되었지만 일거리가 없어 남은 식량을 최대한 아끼며 굶고 있는데, 밖에서 먹을 것을 찾아다니던 이제 열 살인 론이 집으로 와 그를 이끌었다.
“형, 저기 감이 있어. 저기, 저기 말이야.”
그 말에 론의 형은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았다. 마을에서도 유명한 큰 감나무의 맨 꼭대기에 달려 있는 감을 말하는 것이었다.
너무 높아 장대로도 딸 수 없어 매번 여기에 둥지를 트는 새들이 쪼아 먹는 식량이기도 했다.
막상 론의 손에 이끌려 온 감나무는 멀리서 본 것보다 훨씬 컸다. 론의 말대로 저 꼭대기에 감 몇 개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지만, 저것을 따려면 저기까지 올라가야 했다.
너무도 높은 감나무의 높이에 그는 두려움이 들어 포기하려 했으나 이내 자신을 바라보는 동생의 간절한 눈빛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거면 내 동생들은 한동안 배가 고프지 않을 거야.’
난 할 수 있어. 난 할 수 있을 거야. 스스로 주문을 외며 그는 나무를 올라갔다. 과연 힘과 체력이 남다른 그답게 거침없이 나무를 타기 시작했고, 얼마 되지 않아 감나무 꼭대기까지 올라섰다.
그리고 그는 감을 따기 시작했는데, 그만 거기서 욕심이 동했다. 밑에서 본 것보다 위에서 본 감나무의 감의 수가 상당했던 것이다. 그는 품속 가득 감을 넣어 채웠고, 그로 인해 무거워진 몸으로 감나무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올라갈 때와 달리 감나무에서 내려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본래 나무를 타본 적이 없었는데 그저 올라가기만 할 때와 달리 나무에서 내려올 때는 어느 정도의
요령이 필요했다.
그런 요령도 없이 무거워진 몸으로 감나무를 내려오려 했으니, 결국에는 무게를 이기지 못해 그는 감나무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때 머리를 심하게 다쳤는데, 일반적이었다면 죽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남겨진 동생들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그 힘든 겨울을 버티며 소생했다.
하지만 소생한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사고의 후유증으로 고작 다섯 살배기의 지능을 가진 바보가 되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