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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안-47화 (47/385)

야안 47화

이로 인해 론의 지난 어린 시절은 죄책감에 사로잡힌 삶이었다. 어린 여동생이 형을 부끄럽게 여길 때면 크게 화를 내면서도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슬픔에 잠겨 눈물을 훔쳐야 했다.

‘나 때문이야. 내가 그때 형에게 부탁하지 않았어도.’

그렇게 죄책감에 사로잡혀 울고 있으면, 힘들게 일을 끝내고 집에 온 형은 그저 어리숙한 말투로 ‘내가 잘못했어, 동생아. 울지 마.’ 하며 같이 눈물을 흘렸다.

그는 자신 때문에 일그러진 형의 인생이 너무나 슬펐지만, 그가 슬퍼하는 모습을 감당할 수 없어 억지로나마 눈물을 참고 웃음을 짓곤 했다.

그래도 그의 일생에 불행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번 징집 때 그의 형은 징집의 대상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 마을만이 아닌 근처 마을에서도 유명한 바보라, 당시 부패한 관료도 그를 데려갈 수 없었다.

이후 어렵게 삶을 살다가 영지에서 인재를 뽑는다는 말에 지원했고, 총관님이 자신을 제자로 삼자 그는 놀라면서도 그 감사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이제 자신이 받는 돈으로 혹사에 지친 형이 조금은 편안해질 수 있게 되었으니 그 감사하는 마음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제자로 뽑힌 지 한참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믿기지 않아 자신의 볼을 몇 번이고 꼬집어봐야 했다.

농노였던 한스는 본래 이름이 한스가 아니었다. 그의 첫 번째 주인에게는 스무 명의 노예가 있었는데, 그들을 모두 한스라 불렀다.

한스라는 이름은 아주 흔한 이름이었고, 노예 이름 따위를 기억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 부르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는 한스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의 주인은 본래 규모가 있는 상인으로 여기저기 떠도는 일이 많았는데, 한스가 열 살 때 상행의 실패로 적자를 메꾸려 노예를 팔았는데 그중에 어린 한스도 있었다.

그 후 한스는 세 번 주인을 바꾸다 이곳 마크 남작가로 오게 되었고, 이곳의 생활은 그의 긴 노예 인생에서 가장 혹독한 기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보름 전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보름 전, 한스는 아주머니들로 바뀐 농노 관리인들로 행복감을 느꼈다.

전에 있던 농노 관리인들이 워낙 착취를 해 자신들에게 올 여러 가지 물품이나 금전을 빼돌렸기에 농노들은 상당히 빈곤한 삶을 살고 있었는데 그 점이 크게 바뀐 것이다.

비리 사범들을 처단한 뒤 이제야 제대로 물자가 풀리기 시작했고, 어린 농노들에게서 집에서 기다리는 아이들이나 이번에 군대에 끌려간 아들이나 친지를 떠올린 그녀들로 농노들의 생활은 풍족해졌다.

나중에 이야기하기로는 그들이 사는 거처도 지금 하고 있는 대공사가 끝이 나면 손을 볼 예정이라니 한스는 요즘 같은 시기가 계속되었으면 하던 차였다.

그렇게 행복한 시간 속에 젖을 무렵, 성에서 자신과 비슷한 나이 때의 농노를 차출하여 보내라 하자 그는 공포심에 숨이 턱 막힐 것 같았다.

“그, 그 무서운 분이 왜.”

그 무섭던 관리인들을 총관직에 오른 지 며칠도 되지 않아 감옥에 다 처넣고, 감히 얼굴도 들기 힘든 내성의 몇몇 지주들에게 죄를 물어 재산을 압수하자 농노들 사이에서는 그 소문이 와전되어 피를 좋아하는 냉혈한이 총관에 올랐다며 크게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

머리가 좋은 한스는 그 소문이 와전되었음을 알고 있지만 평생을 노예로서 살아왔기에, 총관이 그 정도는 아니라도 상당히 무서운 자라는 것에 심한 공포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그분과 만나게 된다 하니, 한겨울에 찬물로 몸을 씻겨 온몸의 털을 곧추세우는 추위도 그 공포심을 잊기에 부족했다.

새로 들어온 물품에서 제 헌 옷을 골라 갈아입은 농노들 사이에 끼어 영주 성에 간 한스는 자신만이 아닌 평민의 자제들도 그곳에 있자 잠시 의아함을 금치 못했지만, 섣부른 판단은 하지 않았다.

100명씩 끊는다는 말에 그는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가장 마지막의 순서로 자리를 옮겼는데, 영주 성에 들어간 이들 중 일부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 그는 온몸을 와들와들 떨어댔다. 어쩌면 소문이 사실이 아닐까 생각한 탓이다.

덕분에 마지막으로 끌려갔을 때의 그의 모습은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해 병색이 짙은 환자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먹지 못해서 그렇지 그 외모는 이런 시골 영지에서는 볼 수 없는 뛰어난 미색이었기에, 오히려 그런 초췌함도 그의 미색을 가리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기묘하게 매력적인 모습이 되었다.

어느 한 장소에서 대기하다 열 명씩 끊어 총관을 만나게 했는데, 그는 자신의 차례가 되자 그저 평소에 찾지도 않는 아리스를 연발하며 무거운 걸음을 옮겨야 했다.

하인을 따라 넓은 방에 들어간 그는 무서워 오들오들 떨며 감히 총관님을 보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발만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총관님이 자신의 이름을 지명하며 그 외에는 모두 물러나라고 말하자 그는 고인 침을 요란히 삼키며 절망에 빠졌다.

‘으으, 이대로 죽는가 보구나.’

그는 농노 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보아왔던 그 수많은 죽음의 형태들을 생각하며 자신은 그보다 더 심한 몰골로 죽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갑자기 총관이 자신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겁먹지 마라. 해를 끼치려는 것이 아니니 말이야. 이해는 한다만 사내 녀석이 너무 겁이 많구나.”

생각보다 온화한 목소리라 생각하던 그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굳어 있던 몸이 빠르게 풀리며 그 덕분에 점차 공포심이 사그라졌다.

그제야 고개를 들어 총관의 모습을 살핀 그는 크게 놀랐는데 이는 막연히 생각한 모습과 거리가 먼 젊은 총관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는 이처럼 어린 나이에 총관을 하는 그가 너무 크게 느껴져 아찔한 충격에 빠졌다. 더구나 그의 등 뒤에서 지는 노을이 마치 후광 같아서 그는 순간 야안이 신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느끼자 가슴이 크게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는 무릎을 꿇어 크게 절을 올렸다. 절을 올리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흘러넘쳤는데, 그 신이라 여겨지는 총관이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의 눈물을 닦아주며 일으켰다.

“그것참, 무척이나 감성적인 녀석이군. 뭐, 그것도 좋겠지. 보아하니 그동안 제대로 자지도 못한 것 같은데. 잠시 눈을 붙여라. 일어나면 그때 이야기를 하자.”

그러며 자신의 머리를 툭 치자 그는 그 벅찬 감동과 함께 잠에 빠져버렸다.

한스가 깨어나 주위를 살피니 한밤중이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싶어 당황하는데 이내 처음 느껴보는 푹신함에 이것이 무엇이지 하다 자신의 상황을 깨닫고 벌떡 일어났다.

‘이건 그분의 침대. 내가 미친 것인가?’

존경을 넘어서 크게 신처럼 경외하는 그의 침실을 썼다는 자체에 그는 죄책감을 가졌는데, 때마침 그분이 방에 들어섰다.

“그래, 깨어났군. 배가 고프겠지. 일단 따라오너라. 식사부터 하자.”

그 고귀한 분의 말에 한스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앞서 가는 위대한 자를 살피며 걸어가던 중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흘러들어 그의 코를 자극했다.

음식을 달라고 요동치는 배를 움켜잡으며 따라가던 그는 그 냄새가 흘러나오던 방으로 갈 수 있었다.

긴 테이블에는 자신 말고도 네 명의 또래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예전 농사일을 도와주러 갔을 때 보았던 여자아이였다.

다른 노는 마을 아이들과 달리 워낙 일만 하는 여자아이였던 터라, 그는 이 여자아이도 농노 같은 존재라 착각을 할 뻔해 기억에 깊이 남았다.

“자, 이리로 와서 앉아라.”

하지만 그런 여자아이에 대한 관심도 잠시, 그분이 과분하게도 비어 있는 자신의 옆자리를 권하자 그는 잠시 망설이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자리에 앉았다.

차려진 음식들은 많았는데, 커다란 수탉을 구워 만든 요리도 있었고, 훈제하여 만든 짭조름한 햄도 있었다. 또한, 검은 빵과 뜨끈한 옥수수 수프도 놓여 있었다.

꿈에서도 감히 상상치 못한 음식들을 보는 한스는 물론이고 아이들도 저마다 흘러나오는 침을 요란히도 삼켜댔다.

“아! 그래, 아무래도 식사를 한 뒤에 이야기를 하는 게 나을 테지. 자, 사양하지 말고 먹어라. 음식은 넉넉하게 준비되었으니 말이야.”

그 말에 한스와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먹기 시작했는데, 한스는 처음에는 손으로 먹다, 그분과 아이들이 옆에 있는 도구를 이용하는 것을 알고 저도 어설프게나마 따라 먹기 시작했다.

폭풍 같은 식사를 끝내고 난 뒤에야 자신들이 총관님 앞에서 무례를 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들은 또다시 긴장을 하고 있는데, 총관이 손을 휘저으며 말을 하자 놀랍게도 그 긴장감이 사라졌다.

“그래, 배가 부르느냐. 긴장하지 마라. 너희의 마음을 이해하는 바이니 말이야.”

한스는 자신 같은 비천한 이에게도 신경을 써 다정하게 말해 주는 그분의 말씀에 감동하다, 이내 그 뒤를 이어 하시는 그의 말씀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너희를 뽑아 이 자리에 오게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너희를 내 제자로 삼기 위해서이다. 소문으로 들어 알겠지만, 무능한 관료들의 패악들을 정리하다 보니 영지에 관료들의 수가 상당히 부족해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시급한 것이 이 행정직인데, 너희는 나의 가르침을 잘 따라 하루빨리 이 행정직을 맡아야 할 것이다.”

천지가 뒤바뀌는 말이라 한스가 놀라다 못해 공포심에 떨어댔는데, 그분은 그의 심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의 가르침은 엄하고 또한 어려우나, 그렇다 하여 모르는 것을 쉬이 넘어가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한스, 너는 여기 모인 자 중 그 잠재력이 가장 뛰어나다. 하지만 그렇다고 교만해져서는 안 될 것이야. 세상에는 너보다 뛰어나고 무서운 지혜를 지닌 이들은 셀 수가 없이 많으니.”

“저, 저 같은 놈이 무슨.”

감히 감당할 수 없는 말에 떨며 말하는데 그분이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말했다.

“그래, 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지. 하지만 스스로 폄하하지 마라.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특별한 존재이니 말이야.”

그분의 손길이 닿은 머리 부위에 질투하던 그는 그분의 말씀에 머리가 멍해졌다.

‘특별한 존재.’

어느새 마치 신처럼 여기는 존재가 자신을 특별하다 하니 저도 모르게 그간의 서러움이 폭발해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분은 이런 자신의 마음을 잘 아시는지 그저 어깨를 토닥여 주었고, 그는 그날 그렇게 자신의 평생의 스승이자, 태양과도 같은 야안의 곁에 머물게 되었다.

그 외에도 영주 성에는 검에 자질이 있는 아이들 60명이 머물게 되었다. 야안은 지금은 나간 하인들의 방을 개조해서 그들이 지내게 했는데, 아무래도 둘씩 지내던 방에 그 이상의 인원을 넣다 보니 방이 좁았다.

하지만 그들 중 대다수가 농노 출신들이라, 크게 불편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농노 출신들은 크게 반겼는데, 그 이유는 바람 한 점 없는 지붕 아래에 따뜻한 이불을 덮고 자는 적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병에 걸릴까 싶어 밤에는 군불을 넣어 주는지라 평민들도 오히려 집에서보다 안락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성의 일꾼들이 크게 준 터라, 그들에게 당번을 나누어 식사나 여러 가지를 돕게 했는데 그렇게 되자 일이 많아 불만이던 하인들도 어느 정도 만족한 눈치였다.

현재 마크 영지에서 가장 바쁜 이는 야안이었다.

그는 행정을 하면서, 예전 기록을 찾아 비료도 만들어야 했고, 공사 중인 곳에 시찰도 가야 했는데, 그 와중에서도 제자들과 세 명의 행정인도 가르쳐야 했다.

또한 그걸로 끝이 아니라 자신의 수련 또한 꾸준히 행하고 있으니 그는 잠을 상당 부분 줄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잠을 줄이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것은 아무리 경지가 높아도 치명적일 정도로 신체에 부담이 쌓여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예전 고사에서 읽었던 한 현자의 기행에서 그 잠을 보충할 수 있었다.

복수면이라는 것인데 네 시간에 한 번씩 15분간의 잠을 자는 방법을 말한다. 이렇게 되면 하루에 한 시간 15분만 잠을 잘 뿐인데, 그렇다고 해도 몸에 이상은 없다 한다.

습관을 들이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막상 이렇게 잠을 유지하면 집중력이 좋아져 작업 능률도 높아진다.

실제로 이 복수면은 몸에도 이상이 없고 오히려 여러 점에서 좋아 그 현자는 130세까지 장수를 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야안은 마법의 도움을 받아 슬립 마법과 정신을 깨우는 마법인 ‘톤’을 응용하여 복수면을 유지했는데, 과연 처음 며칠 동안은 습관이 들기 어려워 힘들었지만, 그 시간이 지나자 능률이 오르기 시작했다.

덕분에 영주 성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총관이 잠을 자는 모습도 보이지 않은 채 자신의 정책들을 무서운 속도로 진행하는 것에 대해 경의를 넘어 경외감을 느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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