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49화
15. 혼인
2월을 맞아 파종을 준비하기 위해 영지는 바쁜 일상을 보내기 시작했다.
야안은 그간 대장간에서 준비했던 영지의 잡철들을 모아 만든 철제 농기구를 농노들에게 주어 효율을 높였는데, 그간 잘 먹었던 탓에 건장해진 그들이었기에 시너지 효과를 이루어 예전보다 그 노동력이 두 배에 달했다.
거기에 야안은 농노들을 100명씩 조를 이루게 하여 그날의 성과에 따라 식사량을 늘리거나 영지의 주민에게 적은 돈으로 거둬들인 헌 옷 따위를 나누어주자, 게으름을 피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이 그렇게 되자 빠져나간 영지의 인력을 어느 정도 감당하게 되었고, 조금 늦게나마 파종 시기를 맞출 수 있었다.
비료 시설도 이제 한 달 정도면 다 지어지는 터라 때를 맞추어 비료를 생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야안은 석 달 동안 영지의 급한 불들을 어느 정도 끄고 나자, 그제야 혼사 얘기를 꺼낼 수 있었다. 본래 장인어른이신 한스가 이야기한 대로 멜리나와의 혼인을 봄에 하기로 한 터라 이해해 주는 눈치였다.
“요즘 너무 바쁜 거 아냐?”
“미안,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 줘.”
벌써 며칠 동안 찾아오지 않은 것에 불만을 표하는 멜리나에게 야안이 사과했다. 멜리나도 아버지에게 들어 지금 야안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섭섭하지 않을 수 없는지라 이렇게 작게나마 투정을 부렸다.
기껏 투정을 부리는데 야안이 그 맑은 눈으로 빤히 자신을 바라보자, 멜리나는 부끄러운 감정에 작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물었다.
“뭐, 뭐야. 왜 그렇게 빤히 봐.”
그녀의 말에 야안이 그녀의 허리에 손을 올려 가볍게 들어 안으며 말했다.
“아, 너무 보고 싶었어. 요즘 이래저래 힘들었는데, 너랑 이렇게 있으니 피로가 사라지는 것 같아.”
그 말에 멜리나는 샐쭉한 표정으로 야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치, 거짓말. 요즘 그런 쪽으로 말만 늘어서는.”
“하하, 잘 봐. 이것이 거짓을 말하는 눈 같아?”
멜리나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야안의 눈을 말없이 바라보다 이내 홍조를 띠며 말했다.
“그, 그래. 봐줬다.”
그녀의 그 모습에 야안은 어떻게 이런 귀여운 생명체가 다 있나 하는 생각에 절로 퍼져가는 미소를 막을 수 없었다.
야안은 화가 풀린 그녀와 함께 집을 나와 이제 들꽃들이 피기 시작한 오솔길을 걸었다. 예전의 기억 때문인지 봄을 유난히 좋아하던 그녀는 산뜻한 봄 날씨를 기꺼이 즐겼다. 야안 또한 멜리나와 함께 걷는 지금의 순간이 좋아 아무 말 없이 오랜만의 여유를 즐겼다.
어느새 그녀와의 추억이 많은 나무에 온 그들은 그 나뭇가지에 올라가 파종을 하느라 바쁜 마을 사람들과 뛰어노는 아이들을 구경했다. 말없이 구경하던 야안이 멜리나에게 말을 꺼냈다.
“우리가 살 곳은 어때? 가구는? 내 나름대로 신경을 써 채워 넣기는 했지만 그래도 너의 입장에서는 다를 수 있으니까.”
멜리나는 우리가 살 곳이라는 말에 눈을 살짝 지끈 감다 뒤를 이어 묻는 야안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만족해. 특히 욕조는 최고야. 네가 만든 거라면서?”
예전에 본 부잣집의 마법 욕조를 개량해 만든 것으로 질 좋은 돌로 만들어 감촉도 좋고, 물의 온도 유지 시간이 길어 최근 들어 찬 것을 기피하시던 부모님도 좋아하시는 물건이었다.
항시 뜨거운 물을 쓸 수 있으니 자연히 몸도 자주 씻는 터라 청결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야안은 자신들 것만 아니라 장인·장모 댁에도 만들어 드렸다.
마법 물품이라 하면 믿기 어려워하실 터라 그저 외국에서 수입한 특이 광물의 성질을 이용한 것이라 둘러댔는데, 다행히 평생을 마법과는 인연이 없는 시골이라 그 말들을 믿으셨다.
“만족한다면 다행이야. 그래도 생각이 나면 말해.”
“응.”
그녀는 짧게 대답하고는 야안의 품에 기댔다. 집에서는 며칠 뒤의 혼인에 입을 옷을 만드니 하며 바빴지만, 예쁜 옷을 지어 입는 것보다 야안의 품에 있는 것이 더 좋았다.
잠시 그렇게 봄바람을 맞이하던 그들은 해가 중천에 떠서야 나무에서 내려섰다.
그날은 분주했다.
영지 총관의 혼인식이 있는 날이기도 해 영지 내의 많은 사람이 그들의 혼인을 구경하러 왔다.
본래 이런 시골에서는 혼인식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그저 영주 성에 간단히 신고하는 것으로 끝인 것이다.
여유가 있다면 주위의 아는 이들을 초대해 음식을 제공하는 것 정도인데, 야안도 처음에는 그 관례를 따르려다 부모님이 총관이라는 직책이 있으니 그렇게 가볍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에 혼인식을 치르게 되었다.
사실 야안으로서도 멜리나에게 좋은 경험을 주고 싶었던지라 지금의 혼인식에 상당히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남작 성의 기록에서 찾아본 혼인식의 관례는 이렇다.
남자가 여자의 집에 방문하여 장인장모에게 예물을 드리고, 여자를 데려와 자신의 집에서 혼인을 치르는데, 남자의 아버지나 친가의 웃어른이 나서 이 둘의 혼례를 진행한다.
이때 필요한 물건은 오래된 것, 파란 것, 그리고 리리스 님께 바칠 제물이다. 야안은 그 제물로 돼지 세 마리와 소 두 마리를 바쳤는데, 이것은 혼인 이후 결혼식을 축하해 주러 온 이들에게 나누어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지켜봐 달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간식 예단을 만들어 그곳에서 세 잔의 잘 담근 술을 아리스 님께 바치고, 서로의 손바닥을 맞대어 앞으로 상대에게 이러이러하겠다는 짧은 맹세를 한다.
그 과정에서 이 혼인식을 진행하는 웃어른에게 축복의 말을 듣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 방법은 사실 좀 간략한 형식의 혼인 방법인데, 정석은 성직자를 찾아가 성소를 만들어 성직자의 축복을 받는 것이지만 이런 방법은 돈이 많은 귀족이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야안은 그 절차대로 석 잔의 술을 아리스 님에 바쳤고, 이후 멜리나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이며 그녀를 평생 보살피며 살겠노라 맹세했다. 그녀 또한 자신을 끝까지 믿고 현명한 아내와 어머니가 되겠다며 맹세했다.
이후 베론 가한으로부터 그 둘은 축복의 말을 들었고, 그곳에 모인 여러 지주와 영지 사람들에게 축하의 말을 들으며 혼인식이 끝났다.
마을 사람들을 고용하여, 그날 자신을 찾으러 온 마을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게 했으나, 생각보다 더 많은 이가 모여 나중에는 영지 내성의 농부에게서 산 돼지 두 마리를 더 잡아야 했다.
야안은 이 혼례식에서 많은 예물을 받았는데, 그 정도가 이번 혼인식에 들어간 비용을 훌쩍 넘어섰는지라 다시 돌려주는 게 어떨까 생각했다.
혹시나 해 자신의 의견을 아버지에게 물으니 아버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좋지 않다. 네가 하는 지금의 정치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지만, 너무 딱딱해서는 다음 방향으로 나아갈 때, 그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사실 지금의 예물은 오히려 적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아무래도 네가 처음에 비리 사범들을 강력히 처단한 것 때문에 그런 것일 게다.
하니 이마저 돌려줘 버리면 그들은 불안해 너의 정치에 관계하지 않으려 이리저리 빠질 궁리만 할 터이니 길게 보면 좋지 않다. 오히려 너는 가벼운 답신을 써 그들의 마음을 잘 도닥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야안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보니 과연 그러한지라, 그 말을 따랐다. 사실, 지금의 정책들이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 다음 정책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그때 그들이 따라주지 않으면 여러 면에서 곤란했기 때문이다.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손님들이 물러갔다. 야안은 이제 증축한 울타리를 뜯어 본래의 집 옆에 집을 이어 붙인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단층에다 두 개의 방과 거실 하나뿐이었지만, 그 넓이는 본래의 집보다 넓었기에 둘이 살기에는 상당히 큰 편이었다.
새집 냄새가 강한 그곳에 들어서, 홀로 테이블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든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 많은 이들을 상대해야 했기에, 오랫동안 홀로 기다린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녀의 옆에 앉아 귀엽게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는 야안의 기척을 느꼈던지 멜리나는 고양이 같은 실눈으로 야안을 바라보았다.
“왔어? 생각보다 일찍 왔네. 그렇게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녀의 말에 야안이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다 쫓아냈지.”
야안의 장난에 그녀는 키득키득하며 작게 웃음을 지었다. 야안은 탁자 위에 그린 그림 같은 그녀의 손 위로 깍지를 끼었다.
“정말이야, 너무 보고 싶었어.”
“치, 앞으로 잘해.”
장난스러운 말투에서 불안함과 들뜬 흥분이 자리한 그녀의 마음을 알았기에 야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할게. 날 믿어.”
야안의 진지한 모습과 그 말투에 멜리나는 만족하다는 웃음을 짧게 흘리며 일어섰다.
“밖에 날씨가 쌀쌀하지. 차라도 한잔할래?”
그러며 부엌으로 가는 그녀의 모습에 야안은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당겼다. 힘없이 야안의 품에 안기는 꼴이 된 멜리나는 크게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믿기지 않아.”
나지막한 야안의 말에 멜리나도 공감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믿기지 않아.”
뒤에서 부서지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럽게 껴안는 야안의 품에서 어느새 부끄러움보다는 한줄기의 벅찬 설렘으로 작은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녀의 말은 잘게 떨렸다.
야안도 그 같은 그녀의 감정을 느끼자 마음에 설레는 감정이 가득 찼다. 그녀의 향기에 코가 찡해지고, 머리가 아찔할 정도로 행복함을 느끼던 그의 숨은 거칠어져 갔다.
멜리나는 야안의 거친 숨소리에 그 설레는 마음을 감당할 수 없었고, 뒤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야안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얇고 보드라운 윗입술을 탐하고, 도톰한 아랫입술을 훔쳤다. 길고 긴 서로의 숨결을 탐하던 그들은 믿음을 맹세하던 손과 손을 마주 잡았다. 야안은 하얀 도화지에 고결하게 핀 꽃 한 송이 같은 멜리나를 보며 숨이 막힐 만큼 그녀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탐스러운 복숭앗빛을 띤 그녀의 볼이 달콤해 보여 입을 맞추었고, 작지만 오뚝한 모양새를 갖춘 그녀의 코에도 입을 맞추었다. 사파이어 같은 그녀의 푸른 눈에도 입을 맞추었고, 조금 전 자신의 숨결을 나누던 그 작고 붉은 입술에도 입을 맞추었다.
서로의 옷을 조심스레 벗겨주며, 처음으로 알몸인 상태로 서로 바라보았지만 부끄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 서로의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감탄에 젖어 있었다.
작고 하얀, 너무 연약해 잠시라도 잘못 힘을 주면 부서질 것 같은 그녀의 말랑거리는 육체에 야안은 뇌가 터질 것 같았고, 그녀는 극도로 단련된 조밀한 근육들이 빈틈없이 이어진 야안의 육체에 인간의 육체가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에 벅찬 감동을 느꼈다.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서로의 육체를 훔치던 그들은 이내 벌이 꿀을 찾듯이 서로 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욕망에만 빠지지 않았다.
자신의 흘러넘치는 감정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해주고 싶어 아주 부드러우면서도 깊고 뜨거운 숨결을 서로의 몸에 남겼다. 그러면서도 혹여나 서로가 놀라지 않을까 싶어 서두른 기색 없이 갓 태어난 아기를 만지듯 그렇게 그들의 첫날밤은 깊어갔다.